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2023년 1월 19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히브리서 7,25-28 / 8,1-6)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한 번에 다 이루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코 3,7-12)
더러운 영들은“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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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복음
마르코 3,7-12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19일 (목)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06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19일 (목)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9:32
📌 강론시작 19:12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19일 (목)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6
📌 강론시작 08:05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믿음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주된 활동 무대는 갈릴래아입니다. 갈릴래아는 호수의 이름이자 호수가 속한 지역을 일컫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지역으로 보면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유다 지역이 자리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스라엘 지역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활동을 설명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중심 도시가 속한 유다 지역, 이스라엘의 최남단인 이두매아,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은 동쪽의 경계를 나타냅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티로와 시돈은 갈릴래아보다 더 북쪽에 있는, 당시에는 페니키아에, 지금은 레바논에 속하는 도시입니다. 도시와 지역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갈릴래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전 지역에, 더 나아가 다른 나라들에도 퍼져 나갔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결과를 통하여 마르코 복음은 이미 예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악령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외칩니다. 악령의 외침은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내지만 그분께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악령의 외침은 진정한 고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신 가르침과 업적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드러나는 신비를 통하여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믿음은 단순히 아는 것 이상입니다. 믿음은 알고 고백하며 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화재 시 대피요령
극장에 간 지가 거의 8~9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 상영 전에 먼저 나왔던 영상이 떠올려집니다. 대한 뉴스? 아닙니다. 광고? 이것도 역시 아닙니다. 그 영상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바로 ‘화재 시 대피요령’입니다. 현재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이곳의 비상구는 어디에 있는지, 만약 불이 난다면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8~9년 전, 그래도 영화를 종종 봤을 때 계속 나왔던 ‘화재 시 대피요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이 대피요령 영상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습니다. 영화 시작 전이라고 생각하면서, 옆에 앉은 사람들과 잡담하는 데 더 집중했었습니다. 하긴 극장에 온 것은 ‘화재 시 대피요령’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러온 것이니까요. 그러나 종종 안전사고로 인해서 인명 피해를 보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화재 시 대피요령’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지요.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은 사람만이 후회를 줄이면서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순간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향해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순간의 만족만을 찾으면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면서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 구원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 바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 말이 거짓일까요? 아닙니다. 분명한 진리이고 정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귀 들린 사람의 말을 누가 믿을까요? 그들이 거짓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어도, 마귀 들린 사람이라고 판정을 내리는 순간에 그의 모든 말은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자신의 더러운 입을 통해 예수님께 대한 진실만을 내뱉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삶의 방향을 찾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 오롯이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건물주인이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하면 이 건물이 무법천지로 변한다. 곧 깨진 유리창처럼 사소한 것들은 사실은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한다.
- 마이클 레빈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무엇보다 순종
순종보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없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가 주님께 가는 이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오늘 주님과 제자들은 호숫가로 물러가시는데 사람들은 그 주님께 몰려가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과 제자들은 왜 물러가시고 물러가시는 그 주님께 사람들은 왜 몰려가는지 자연 생각게 됩니다.
주님께 몰려가는 사람들의 짓은 요즘 문제시하는 스토커의 짓이 아닐까요? 사람들을 피해 가시는데 굳이 거기까지 주님을 쫓아가 괴롭히니 말입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과 제자들은 사람들을 피해 외딴곳으로 자주 가십니다.,오천 명을 먹이실 것도 실은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고 돌아와 쉬러 갔는데 그 외딴곳까지 사람들이 몰려와 쉬지도 못하고 가르치시고 치유해주신 끝에 굶주린 그들을 먹이신 사건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행위가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스토커의 짓이 되겠지만 그러나 주님께는 스토커의 행위가 아닙니다.
스토커가 되는 것은 스토커의 행위에 달린 것 같지만 실은 그 짓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받아들이는 사람에 달리기 때문입니다.
싫다고 하는데도 들이대면 스토커가 되는 것이기에 내가 싫다고 하지 않으면 그는 스토커가 아니 되겠지요.
사랑하는 엄마에게 껌딱지처럼 들러붙는 아기는 스토커가 아니듯 주님께서는 당신이 쉬시려고 하다가도 사람들이 몰려오면 즉시 쉼의 Mode(상태)에서 사랑 Mode로 전환됩니다.
이것이 사랑 충만한 사람의 신기함입니다. 사랑이 바닥나 충전하러 간 사람은 그러지 못하지만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즉시 사랑 상태로 Mode 전환이 가능합니다.
이런 주님을 보면서 저는 자주 사랑이 고갈되고 그래서, 저를 찾는 사람을 스토커로 만드는 저의 사랑에 대해 반성하고 다른 한편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도록 충전해야겠다 다짐하지만 자주 실패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갈되면 즉시 주님께 달려가지 않아 실패하기도 하고,,혹 주님께 가더라도 주님 사랑 안에 진득하니 푹 잠겨서 있지 않고 이내 딴짓을 하는 겁니다.
적합한 예일지 모르지만, 목욕탕에 가 뜨거운 물에 몸을 푹 잠그고 있지 못하고, 이내 때를 닦는다든지 손톱을 깎는다든지 하여 피로를 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 충전에서 저의 실패 그러니까 저의 딴짓이란 주님께로 가서는 직전의 일들을 생각한다든지, 앞일을 생각하며 걱정하거나 계획을 세운다든지 그런 짓을 하기도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실패는 관상 기도를 하지 않고 청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겠다고 하고는 즉시 청원 기도를 하는 거지요. 오늘 주님께 몰려든 사람들 대부분이 병자들인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오늘 저도 제가 주님께 가는 이유를 성찰합니다. 나의 병 때문에만 주님께 가는 나는 아닌지,,또는 나의 병이 아니라 이웃의 병 때문에 갈지라도 주님 사랑 때문에 가지 않고 병 때문에만 가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다.
먼저 깊어지는 우리들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애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우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어설프게 아는 것들이 서로를 찌르는 날카로운 아픔이 됩니다. 다 솓아낸다고 다 풀리지 않듯 먼저 침묵을 통해 가장 중요한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참된 고백은 참된 영혼을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있는 대화를 원하십니다. 소란스럽고 요란스러운 소음 속에서는 단어조차 분간하기 힘듭니다. 분주함을 잠시 내려놓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빈 시간을 마련합니다.
말이 많을수록 점점 멀어지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참된 말은 쓰다듬을수록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편안해지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만나게 되는 마음과 마음의 기쁨입니다. 소멸할 수 없는 예수님과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라지지 않을 마음의 고백이 참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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