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2023년 1월 15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49,3.5-6)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제2독서
(코린토 1서 1,1-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 오늘 복음
(요한복음 1,29-34)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네. 그분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네.
복음
요한 1,29-34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15일 (일)
이기범 요셉 신부 신부 집전
📌 미사시작 : 0분 22초
📌 강론시작 : 12분 11초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15일 (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 10분 59초
📌 강론시작 : 21분 56초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15일 (일)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 1분 21초
📌 강론시작 : 10분 18초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전합니다.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先在)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서문인 로고스 찬가에서부터 언급됩니다(1,1-3). 선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부터 계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그 전부터 예수님께서 이미 계셨다고 증언합니다.
이와 함께 세례자 요한은 ‘알지 못했다’와 ‘보았다’는 말을 반복합니다. 물론 증언에 필요한 표현들이지만 요한 복음에서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단순하게 알고 보는 것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을 나타내고 그분을 믿게 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모든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표현되는 예수님의 전형적인 호칭입니다.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사용된 이 표현은 임금(2사무 7,14 참조)이나 백성 전체(호세 11,1 참조)를 나타내기도 하고, 의인(지혜 2,18 참조)에게 적용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제 복음서는 이 낱말을 예수님께 사용합니다. 요한 복음은 더 나아가 예수님을 “아버지의 외아드님”(1,14)으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또는 외아드님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드러냅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으로 이런 예수님께서 세상에 드러나시고 이제 그분을 믿는 이들도 그 관계 안에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어느 책을 읽다가 저자가 수도원에서 피정하면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매일 바치는 시간경이라고 하는 성무일도를 함께 한 체험을 적었습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바쳤던 기도보다 훨씬 길고, 또 시편이 주를 이루기에 이해하기 힘들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신심이 깊지 않고 전례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은 시도하기 어려운 과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 한 번 참석했다가 끝나자마자 지쳐 쓰러졌다고 자기 책에 적었습니다.
아마 이 작가의 글을 읽는 사람은 성무일도를 끔찍할 정도로 어려운 기도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성무일도를 바쳐온 저로서는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쩌다 한 번 경험하는 것과 30년 넘게 해오는 것의 차이는 이렇게 큽니다.
성인이라면 그 누구도 매일 아침 씻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머리 감기도 너무 어렵고 무서웠던 일로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좋아하는 연인도 처음에는 만남에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요? 아직 만남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이렇다고 봅니다. 신앙생활이 어색하고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그만큼 주님을 알지 못하고 또 주님을 많이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질수록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말합니다. 거친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이 세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우리 모두의 구원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자를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본인 스스로 “나도 저분을 알지 못했다.”(요한 1,31)라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을 알기 위해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사람들 앞에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요. 예수님의 인기보다도 압도적인 인기였습니다. 요한의 말 한마디면 군중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알기에 자신을 높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는 겸손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라는 메시지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1코린 1,3 참조).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해결될 일은 생각할 필요가 없고, 해결되지 않는 일은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 달라이 라마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다른 건 몰라도 ‘사랑’은 가르치며 배운다.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행복일까요? 제가 지금까지 얼마 안 되는 시간 살아오며 깨달은 것은 사랑할 때, 그래서 사랑받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한 여대생이 워렌 버핏에게 성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워렌 버핏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나를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면, 그게 성공입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사랑해줄까요? 사랑은 주는 만큼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먼저 주시기 위해 인간이 되어 우리 양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증가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받고 구원받습니다.
세상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
복음에는 이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가지려면 먼저 더 가져야 합니다. 더 가진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감사하면 가진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있는 것에 감사하면 더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자의 특징은 기쁘게 나누어준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나누어줄까요? 다른 이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증언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더욱 충만히 내려주십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내용의 복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증언하였지만, 처음엔 알지 못하고 증언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말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31)
알지 못하는 분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증언하는 중에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알아볼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3)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 복음 선포 소명을 받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고 믿음이 강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해야 합니다. 해야 어렴풋이 아는 분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저도 대학생 때 수녀님의 강요에 못 이겨 교리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리교사를 하다 보니 내가 가르치는 분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 알고 싶은 마음이 하.사.시.를 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주님의 부르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더 폭넓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함께 성장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깔때기 효과’, 혹은 ‘싱크대 효과’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한 곳에 무언가가 빨려 들어갈 때 주위에 있는 것들이 그곳으로 모입니다. 주님의 은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좋은 곳으로 당신 은총을 내보내려 할 때 은총은 그곳으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주려고 하는 자가 받는 법입니다.
우리가 아는 게 없다고 선교하지 않으면 아는 것마저 잊어버립니다. 가진 사랑마저 빼앗깁니다. 그러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억지로라도 선교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차게 됩니다.
제가 보좌 신부 때 사제인 제게 선교한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 할머니는 저의 미사를 6개월씩이나 나오셨지만, 저를 알아보지 못하고 되려 선교하셨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할머니는 모든 사람이 사제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교하는 사람이 받는 은총입니다.
김하종 신부도 그랬고 이태석 신부도 그랬으며 마더 데레사도 그랬습니다. 모두가 선교하려고 하다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마련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느님 지식과 사랑은 가르쳐야 늡니다. 가르치면서 자신의 부족한 면을 발견하게 되고 보충하고 더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전하는 이들이 당신을 모른 채 선교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 마음을 주시고 마치 모세의 지팡이처럼 힘을 실어주십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해서 전하지 못한다고 하지 말고 전하지 않기 때문에 만나지 못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모든 이들의 스승이 되도록 파견하십니다. 누구든 사랑의 교사가 되도록 합시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보고 닮는
지난주 주님의 세례 축일 때 예수에 대해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 첫째 독서와 복음에서는 예수에 대해 각각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는 나의 종”
“하느님의 어린 양”, “하느님의 아드님”
“자기보다 앞서신 분”, “자기가 알려야 할 분”
저의 초등학교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공부하다 내려가 오래간만에 만나 술을 마시며 얘기하는데 성서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반가워서 세례받았냐고 물으니 그저 예수님이 훌륭한 분이기에 존경하고 삶에 도움이 되기에 성서를 가끔 읽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하였습니다.
옛날 도덕 교과서에서 가르치듯 세계 4대 성인 중의 하나이고 우리 인생에 있어서 스승이 될 만한 분 중의 하나이신 분 말입니다. 실제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부를 때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요. 그것도 나의 스승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좀 뛰어난 분을 일컫는 것으로.
저도 북한에 가면 선생님, 김찬선 신부 선생이라고 불립니다. 그저 ‘김찬선 씨’하고 부르거나 김 동무나 김 선생이라고 부를 수는 없고 그렇다고 김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는 싫으니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호칭을 들으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이 사람들이 저를 마음으로부터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저를 종교인으로 진정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도 종교, 그것도 천주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그리고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선교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도, 스승도 아니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큰 스승으로 추앙받는 세례자 요한이 증언합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러기에 나보다도 훨씬 앞서시고 크신 분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이분은 그리스도를 빙자해 우리를 등쳐먹는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 진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희생제물이 되실 분이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세상의 죄, 우리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요한의 물의 세례는 세상에 죄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회초리의 세례이지만 예수님의 물과 성령의 세례는 세상의 죄를 자기의 것으로 끌어안고 자신의 희생으로 세상 모든 이의 죄를 씻는 사랑의 세례입니다.
이는 어머니의 사랑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자꾸 잘못을 저지르는데 아무리 타일러도 고치지 않자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놓고 당신의 종아리를 치라고 합니다.
네가 이렇게 잘못을 계속 저지르는 것은 내가 네게 나쁜 유전자를 주고 너를 잘 못 가르친 나의 잘못이니 나를 마구 치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희생양이 되게 하신 것도 이처럼 세상의 죄를 당신 죄로 짊어지고 없애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신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세례자 요한은 이런 주님을 보라고 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주님을 봐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기만 하면 우리 과제가 끝납니까? 본 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죄를 씻을 뿐 아니라, 남의 죄를 나의 죄로 끌어안는 어린양을 보고 닮는 것, 이것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통해 하늘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죄를 없애고 죄를 씻어주는 사랑입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우리들에게 볼 수 없었던 사랑의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내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세례로 시작된 사랑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거룩한 어린양의 시간을 살게 되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사랑이 있습니다. 반갑고 기쁜 사랑으로 매일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하느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시작하십니다.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이 시작됩니다.
처음이고 마지막인 사랑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한 분이시며 하나밖에 없는 사랑이 우리와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사랑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살과 뼈로 하느님의 어린양을 닮아갑니다.
사랑은 닮아가는 것이며 여기가 하느님 나라이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힘임을 믿습니다. 가장 좋은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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