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8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8.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9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2022년 9월 8일 (목)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는 예언대로,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9월 8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주님, 복되신 동정녀께서 성자를 낳으시어 저희 구원이 시작되었으니 동정녀 탄생 축일을 지내는 주님의 종인 저희에게 천상 은총의 선물을 내려 주시어 길이 참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장 1-16절, 18-23절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성세현 바르톨로메오 신부 강론

 

 

2022년 9월 8일 (목)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성세현 바르톨로메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9월 8일 (목)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이 시대의 ‘마리아’로 살아가기

 

예수님의 족보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으로 시작합니다. 

다윗의 히브리 말 이름이 가리키는 숫자 ‘14(4+6+4: דוד[代])×3’의 도식은, 다윗의 자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완전한 구원 섭리로 오신 온 세상의 임금이시요 구약 시대부터 예언되신 메시아이심을 드러냅니다. 족보에는 특히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으로 소개되면서, 독자의 주의가 온전히 마리아에게로 쏠리게 합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미카의 예언과(제1독서 참조), 하느님의 다스림과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임마누엘 아기의 탄생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마태 1,23; 이사 7,10-17; 8,23ㄴ─9,6 참조) 모두에 등장하는 그 ‘여인’은 바로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입니다.

성경에는 마리아의 탄생 이야기가 없지만, 외경(外經)인 야고보 원복음서에 부유하고 경건하였던 요아킴과 안나 부부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자식을 청하였을 때 천사에게서 아기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안나가 기적적으로 마리아를 얻게 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비록 이 외경의 내용 때문만은 아니지만, 교회는 구세주의 탄생을 오래전부터 섭리하신 하느님께서 아기의 어머니 또한 신중히 마련하셨음을 믿어 고백하며,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경축합니다.

작고 연약한 아기 마리아의 탄생으로 이어진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기억합니다. 때로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아주 작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들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현존과 섭리를 우리가 발견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하는 이 시대의 ‘마리아’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께서 정하시는 대로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도록 정해진 동정 마리아께서 요아킴과 안나에게서 태어나셨음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동정 마리아는 여러모로 정해진 운명의 대표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느님께서 정하신 대로 살도록 태어났기에 정해진 운명에 가장 잘 순명하신 마리아에게서 배워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운명을 정하셨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오해가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가톨릭은 예정설을 믿지만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고 그래서 정해진 대로 살게 되어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 사람 팔자는 다 정해져 있다는 식이 아닙니다. 

팔자가 다 정해져있다면 그것도 구원될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이 정해져있다면 인간의 자유와 자유의지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결코, 그런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응답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그런 예정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또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이나 세례자 요한과 같이 미리 뽑으신 분만 성자와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성자와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고 그 성소에로 부르셨습니다. 

여기에 응답하고 안 하고는 우리의 자유이고, 하느님께서는 그 자유를 또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자와 같은 모상이 되도록 정하시고 부르신 것도 사랑이고, 그것에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할 것인가 우리가 정할 자유를 주신 것도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사랑의 하느님을 믿어야 할 것이고,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지 멸망케 되도록 정하시거나 내버려두지 않으셨다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대로 우리가 순종한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탄생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하느님의 결정이고 우리는 그 결정에 반대할 나조차 없었고 그래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부모에게 태어나고 이러한 나로 태어난 것은 하느님의 결정이고, 나는 이 부모가 좋다거나 싫다거나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이후의 우리는 우리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섭리에 순명할 것인지 불순명할 것인지 그것은 우리의 자유와 자유 의지에 달렸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런 탄생과 탄생 이후의 삶에 있어서 하느님 사랑에 가장 잘 순종하신 분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동정 성 마리아시기에 우리는 오늘 마리아를 기리며 본받고자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모님께서 평생 동정이실 수밖에 없는 이유 : 성체 영할 때 한 번만 ‘아멘!’하면 끝일까?

 

ENA 병영 드라마 ‘신병’은 군생활을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신병 박민석 이병은 사단장의 아들입니다. 이것을 모른 최일구 상병은 그를 신병 놀이하며 괴롭힙니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는 아닙니다. 장난 수준입니다. 박민석 이병은 사단장 아들임에도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소속된 부대에서 전역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사단장은 그를 육군 본부로 보내고 싶어 합니다. 박민석 이병은 아버지의 말에도 불구하고 부대원들에게 정이 들어 그들과 끝까지 가기로 합니다. 

박민석 이병과는 반대되는 신병이 들어옵니다. 성윤모 이병입니다. 그는 밖에서 불법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다 도피하기 위해 군대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고문관인 척하며 자기를 괴롭히는 이들을 일일이 적어서 밤에 중대장실에 넣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욕이라도 하는 선배가 있다면 영창을 갑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가 전화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가 일부러 자해까지 하며 군 생활을 편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박민석 이병은 일부러 그를 불러내어 따끔하게 혼을 냅니다. 그가 사단장 아들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윤모는 또 쪽지를 써서 중대장실에 넣습니다. 하지만 중대장은 더는 참지 못합니다. 그만큼 참아줬으면 됐다고 하며 심하게 그를 야단칩니다. 그리고 부대원들은 전화부스에 휴대전화를 놓고 그가 통화하는 것을 녹음시켜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한 그를 재판받게 합니다. 

군에 머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군대에서 요구하는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몸만 머무는 것이지 진짜 군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군에 들어가겠다고 받아들였다면 그 군에서 요구하는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 군대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데 그 사람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님 탄생 축일입니다. 성모님을 부를 때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께서 동정이신 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왜 평생 동정이시어야 하는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개신교 측에서는 한결같이 예수님의 친동생들이 있었다고 말을 합니다. 사촌들도 당시 다 형제라고 했었음에도 예수님의 형제들을 굳이 친형제라 믿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모 마리아를 보통의 한 인간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평생 동정이라고 합니다. 우선 예수님을 낳으시기까지 동정이심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여기서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동정성이 없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동정성은 남편을 받아들일 때 사라집니다. 남편을 받아들임은 남편의 ‘뜻’을 받아들임입니다. 결혼하면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겠다고 생각하는 신부는 없습니다. 그러면 순결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동정성은 한 남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자기 비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남자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성모님의 동정성은 하느님의 뜻만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집인 에덴동산에서 살게 됩니다. 

성모님은 기계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는 도구가 아니셨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떠나갔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나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곧 하느님의 뜻입니다. 동정성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뜻을 봉헌한 순결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낳으면 더는 동정성을 유지할 필요가 없을까요? 아이를 낳고 끝내버리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모기와 같은 것들을 제외하고는 부모는 자녀를 계속해서 낳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번 따르기로 했다면 계속 따라야 옳은 것입니다. 

누군가의 뜻을 따르면 그 누군가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그 누군가 안에 들어가 삽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잉태하시게 된 것은 곧 하느님 안에 사시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아버지를 받아들인 것이지만 곧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 14,10)

이것이 아버지 앞에서 그리스도의 동정성입니다. 순결함입니다. 이 순결함이 아버지 품 안에 머물게 함인데 그 순결함을 잃으면 동시에 아버지 품 안에서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은 곧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되셨음을 의미하는데, 이 동정성이 깨지면 또한 하느님 품에서 떠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또 다른 남편을 받아들여 그의 뜻 안에 머물러야 옳겠습니까? 

내가 누군가의 뜻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 안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번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에덴동산에 살게 된 순결한 성모 마리아는 에덴동산에 머물기 위해 그 순결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럴 분이셨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셔서 당신 품에 살게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실수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군대에 입대하면 군생활이 끝나는 것일까요? 끊임없이 군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체를 영할 때 한 번만 ‘아멘’하면 끝일까요? 끊임없이 자신 안의 성체에 아멘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나라에 살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아멘 한 것은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곧 에덴동산에 살게 됨이었습니다. 들어가면 끝일까요? 성모님의 아멘, 곧 동정성은 그 이후로 영원히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정성, 곧 아멘은 혼인 서약과 같이 계속 이어져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평생 동정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성체를 영할 때 하느님의 뜻인 성체가 나를 계속 지배할 수 있도록 평생 동정의 마음으로 아멘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가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분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글 쓰는 방법을 배운다, 책을 열심히 읽는다, 일상의 삶을 잘 관찰한다 등등의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직접 쓰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글이 어떻게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완벽하게 하겠다고, 책만 읽고 글 쓰는 방법만 배우고, 일상 삶을 관찰만 하다 보면 그냥 그 모습에 멈출 뿐입니다. 알면 알수록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것도 쓸 수 없습니다. 
 
글을 정말로 잘 쓰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강론을 위해 쓰는 원고를 보면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평소에 많은 책을 읽고, 매일 일기를 쓰면서 일상의 삶을 잘 관찰하십니다. 여기에 깊은 묵상도 하니 깊이 있는 글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글을 혼자만 간직하지 마시고, 출판해서 신자들에게 나눠주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일에 앞서 잘 준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실 ‘준비’라는 이름으로 ‘두려움’을 표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서 계속 미루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을 얻지 못합니다. 이는 준비가 아니라 두려워서 고백하지 못한 것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해야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종종 두려워하지 말라고, 또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맞이합니다. 성경에 성모님의 탄생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던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공경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역사 안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출생 내력이라고 할 수 있는 족보를 제시합니다. 그 역사가 영광과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함께 공존하는 역사이지요. 그 모든 시간이 지나야 메시아가 온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신앙의 모범을 잘 따라야 합니다. 파혼의 위기까지 맞이하게 된 예수님 잉태 때의 많은 일들을 어떻게 극복하셨을까요? 두려워하지 않고, 또 걱정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굳게 믿음으로 가능했습니다. 
 
성모님 탄생 축일에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모든 것을 사랑하라. 그대 앞에 떨어지는 한 가닥 빗줄기조차도 그대가 모든 것을 사랑하면 그 속에 담긴 신비도 보리라.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태 1, 18)

 

탄생은 저마다의 물음표이다. 우리는 어떠한 탄생으로 살아가는 지를 우리자신에게 다시 묻게된다. 정말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신다. 성령의 힘으로 들려줄 탄생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빛을 향한 따뜻한 탄생이다. 

모든 탄생은 가장 알맞은 때가 있다. 하느님의 뜻만을 찾고 따르는 동정 마리아의 탄생이다. 구원을 위해 또 다른 하와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주신다.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마리아의 탄생은 가장 아름다운 믿음을 위한 구원의 계획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모든 이들을 위한 보편적인 계획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분이시다. 필요한 사람은 하느님께 열려있다. 

마리아의 탄생이 불안한 우리의 손을 잡아준다. 희미한 믿음을 안고사는 우리들에게 은총 가득한 선물로 오시는 선명한 마리아의 탄생이 있다.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 

하느님이 전부인 탄생의 기쁜소식이다. 은총의 방향이 하느님을 향하는 기쁨임을 깨닫는다. 탄생의 선물을 잘 받아 하느님 안에서 성장해야 할 우리들 삶이다. 최고의 선물은 탄생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탄생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구원의 완성은 탄생으로 시작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