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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11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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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4주일

 

 

2022년 9월 11일 연중 제24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수송아지 상을 만들어 제사 지내는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시다가 모세의 애원을 들으시고 재앙을 거두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박해한 죄인임에도 사도의 직무를 맡기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기뻐한다고 하시며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드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9월 11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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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15장 1-32절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1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24주일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 강론

 

 

2022년 9월 11일 (일)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24주일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 갑시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뒤 하느님 앞에서 느낀 첫 감정은 두려움과 수치심이었습니다(창세 3,9-10 참조). 이렇게 죄는 인간이 거룩함을 잃어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의 관계를 끊기게 하고, 다시 그분께 선뜻 다가가기를 주저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는 잃었다가 되찾은 ‘양’과 ‘은전’과 ‘아들’에 관한 세 개의 비유들을 연이어 배치하면서(루카 15,1-7.8-10.11-32 참조), 죄인이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는 일을 하느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강조합니다.

제1독서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면서 하느님을 배반하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을 때, 그분의 용서를 얻고자 모세의 애원과 중개가 필요하였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하느님께서는 용서에 소극적이신 분이 아니라 길 잃은 죄인을 먼저 찾아 나서시는 분으로, 착한 목자요 소중한 은전의 주인이시며 탕자를 끝까지 사랑하는 아버지이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떠올리면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신 이유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매번 자신의 부당함에도 주저앉지 않고 곧바로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까닭은, 다름 아닌 그분의 한없이 자비로우신 본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비유 속 잃어버린 양과 동전 그리고 탕자가 바로 자신임을 알지 못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가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알면서도 용기 내어 예수님의 식탁에 모여든 세리와 죄인의 마음을 닮아야겠습니다. 당신께로 발걸음을 돌리는 죄인을 가장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되돌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투덜이?

 

연중 제24주일의 주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더 자세하게 얘기한다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의 사랑 가운데서도 죄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자비이며 그것은 용서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비는 사랑이 죄보다 클 때 나타나는 것인데 우리 인간은 자기의 사랑이 이웃의 죄보다 작기에 분노로 나타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랑이 인간의 죄보다 크기에 자비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하기에 이웃의 죄 때문에 얼룩이 지고 흔들리기에 미움의 불순물이 늘 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크실 뿐 아니라 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도 100%의 완전한 사랑이기에 인간의 죄에 의해 얼룩이 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그래서 늘 자비와 용서로 그 사랑이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런 것인데 이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죄인인 우리 인간이 어떻게 다가가느냐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복음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하고 투덜거렸다. 

하느님 자비에 다가가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 자비에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다는 얘깁니다. 

달리 얘기하면 인간은 모두 죄인인데 하느님 자비에 다가가 용서받고 은총을 입는 죄인이 있고, 하느님 자비가 못마땅하여 하느님 은총 밖에서 투덜거리는 투덜이 죄인이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십니다. 

하느님께는 다 사람일 뿐이고 다 죄인일 뿐인데 하느님의 빛에 다가가 빛을 쬐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빛이 싫다고 피하거나 필요 없다는 사람이 악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또 달리 얘기하면 인간은 모두 죄인인데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해서 찾아가 용서를 받는 죄인이 있고, 자기는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하기에 하느님을 찾지도 않고 이웃에게 자비로운 하느님을 못마땅해 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니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을 뿐이고 주님은 복음에서 내내 이것을 꼬집으십니다. 

세리나 창녀처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기에 하느님께 다가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는 데 비해 바리사이처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은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기에 자기에게는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 없다고 하느님 자비를 걷어차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웃에게 자비로운 하느님께는 불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동생과 형이 그 좋은 예인데 우리는 오늘 동생처럼 하느님 자비에로 다가가기로 결심할 뿐 아니라 하느님 자비를 걷어차고 이웃에 자비로운 하느님이 못 마땅해 노상 투덜거리는 투덜이가 내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냉담자 한 사람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지 않으면 어쩌면 당신이 냉담자

 

1954년 콜롬비아에 살고 있던 다섯 살 소녀 ‘마리나 채프먼’은 집 근처에서 놀다 괴한들에게 납치당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사정으로 납치범들은 소녀를 데리고 있을 여건이 되지 않자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깊은 숲속에 버립니다. 

그렇게 홀로 숲속에서 떨고 있던 소녀는 큰 나무 주위에 있던 원숭이 무리를 따라갑니다. 그 원숭이들은 높은 지능을 지닌 ‘흰 목 꼬리 감기 원숭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너무 배가 고팠던 마리나는 어떤 과일을 먹었고 심한 복통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한 늙은 원숭이가 다가오더니 그녀에게 구정물을 먹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구정물을 마셨습니다. 배 속에 있던 모든 것들을 토해 냈습니다. 그러자 배가 편안해졌습니다. 원숭이들은 마리나를 5년 동안 보살피며 의사소통과 먹는 방법, 야생의 포식자들을 피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습니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사냥꾼들이 그녀를 발견하였습니다. 사냥꾼들은 말도 못 하는 그 어린 소녀를 매춘 조직에 팔아넘겼습니다.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그녀는 다행히도 길거리 생활에서 탈출하여 그녀를 거두어준 가족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후 그녀는 결혼도 하고 두 명의 예쁜 딸을 가진 영국의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5년간의 숲속 경험을 『이름 없는 소녀』란 제목으로 책을 냈습니다. 

[출처: ‘부모님 품을 떠나 원숭이들 손에 길러진 소녀’, 유튜브 채널, ‘인간츄르’]

원숭이들에게 자라서 말도 못 하는 소녀를 사창가에 팔아넘긴 사냥꾼들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녀를 키워준 원숭이 가족들보다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복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알았다면 그녀에게 불쌍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어떻게든 자신들의 행복한 삶으로 끌어올리려 했을 것입니다. 

개들에게 키워진 옥사나 말라야를 보며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드나요? 강아지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귀여움보다는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인간의 행복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키워진 아이들을 인간으로 성장시키고 싶어집니다. 만약 자신이 개라고 믿는 아이를 인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자신들이나 인정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인간의 수준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고 식사하는 것에 잔뜩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 나라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 잃어버린 은전을 찾은 여인의 비유,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하나같이 ‘기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돌아온 동생에게 너무 잘 대해주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가진 형입니다. 형은 아버지와 함께 머무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냉담하는 한 신자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거나, 혹은 다시 돌아온 한 신자 때문에 기뻐 뛰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교회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맛보지 못했다면 아직 하느님 나라 백성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을 모르면 인간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하는 한 사람 때문에 잔치를 벌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교회 안에 머무는 삶이 천국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 3』에 ‘눈 치우는 할아버지’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사회복지과에 근무 중인 영주씨는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기 위해 육교를 오릅니다. 육교 계단이 꽁꽁 얼어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계단 중간쯤에서 어떤 노인이 눈을 치우고 있습니다. 삽질하는 노인은 힘이 달리는 듯 손을 떨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연세도 많으신 것 같은데, 이런 일은 저 같은 젊은 사람이 해야 하는데요….”

“젊은이들은 회사 나가야지요. 이런 일 할 시간이 있나? 이런 일은 나 같은 노인들이 해도 충분해요.”

영주씨는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더욱 미안했습니다.

“할아버지, 댁이 이 근처세요?”

“요 앞 동네에 산다오. 사실은 내 아들이 이 육교에서 넘어졌거든. 그때 머리를 다쳐서 지금까지 삼 년째 방 안에만 누워 있다오. 아들놈 때문에 이 늙은이 가슴이 새까맣게 타 버렸지.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내 아들처럼 될까 봐, 눈 오는 날이면 이렇게 나와 눈을 치우는 거지요.”

“할아버지, 저도 좀 도와 드릴게요.”

“아니오, 하나도 힘들지 않아. 이것마저 할 수 없다면 아마 더 힘들었을게요. 나는 삽으로 눈덩이를 떼어 내며 자식에 대한 아픔까지 떼어 내는 거라오. 이 일을 하고 나면 응어리진 마음이 많이 풀려. 이 일을 하는 건 아들놈 빨리 일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하니까요.”

현시대를 ‘무감각’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세계에서 5초에 한 명씩 굶어 죽어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니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해야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고통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행복해야 불행한 이가 불쌍하게 보이고 관심이 갑니다. 

‘우분투’란 아프리카 말은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란 뜻이라고 합니다. ‘네가 살아있으니, 나도 살아있다’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이웃의 행복과 생존이 곧 나의 행복과 생존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나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을 살아있는 나와 같은 존재로 대해주는 것입니다. 이웃이 하느님을 떠나면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파합시다. 이웃이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면 천국 모든 이들과 함께 뛰며 기뻐합시다. 그래야 천국의 행복을 누리는 천국 시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굶어 죽지 않는 방법

 

끊임없이 죄를 범하는 자기 모습에 크게 실망하는 어느 수사님께서 원로 수사님을 찾아가 고민을 이야기합니다. 열심히 살고자 했지만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고민이었습니다. 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계속 죄를 범하는 자신이 너무 밉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원로 수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농부 두 사람이 한마을에 살고 있었다네. 그들 중 한 사람은 잡초가 뒤섞인 씨앗은 조금 뿌렸고, 다른 한 사람은 이런 씨앗을 뿌려봐야 무엇하냐면서 아무것도 않았지. 얼마 뒤에 큰 기근이 닥쳐왔네. 이들 중 누가 살았겠나?” 
 
수사님은 “잡초가 섞였을지라도 씨앗을 뿌린 사람입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래서 원로 수사님께서는 이렇게 정리하셨습니다. 
 
“미처 골라내지 못한 씨앗이라도 뿌려야 하네. 그래야 굶어 죽지 않아.” 
 
금방 또 배고파질 것이라면서 밥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범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죄를 무조건 범할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하니까 이 세상 삶을 포기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회개해서 주님 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굶어 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상당히 깁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연달아서 나옵니다. 이 비유 말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바로 보잘것없는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돌아오는 사람을 하늘에서는 무척 반긴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1티모 1,15) 
 
잃어버린 양과 은전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상태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회심해서 주님 곁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모두 잃더라도 반드시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해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로 돌아갈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의 꽃이 다 피고 또 지고 난 후라 더 이상 꽃구경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니 지금이 가장 찬란한 때구나.

- 양희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 7)

 

작심삼일의 흔들리는 마음을 치유하는 은총의 주일이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기쁨은 언제나 눈물겨운 회개의 기쁨이다. 회개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자신의 본질적인 일이다. 

우리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 또한 회개의 길이다. 하느님께서는 회개로 우리를 지극히 키우신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며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회개이다. 

회개의 기쁨은 이 모든 것을 행복하게 만드는 참된 진리이다. 두 마음으로는 회개의 기쁨으로 나아갈 수 없다. 회개가 곧 영원한 기쁨이다.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생활 속에서 기쁨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다. 

회개가 깊어지면 사랑도 삶도 깊어진다. 참된 회개 참된 행복이다. 회개의 빛이 나와 너 우리모두를 비추며 존귀함으로 바꾸어 준다.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회개가 있다. 

우리의 몸과 우리의 말과 우리의 뜻을 회개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치유하며 다시 복음의 기쁨으로 우리를 성장시키는 회개를 통해 모두 더 많이 기쁘고 모두 더 많이 행복하시길 기도드린다. 회개는 참된 생활의 변화이다. 

생활이 회개이다. 생활을 변화시켜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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