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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2022년 9월 9일 (금)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유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며, 복음을 위하여 이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인도하는 사람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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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본기도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6장 39-42절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박효진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2년 9월 9일 (금)
박효진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이길재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9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저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지붕을 만들 때, 삼나무나 돌무화과나무로 만든 대들보를 올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얹은 다음 거기에 진흙을 발랐습니다.
옥상은 작은 방을 만들거나 작물을 널어 말리는 장소였고, 지붕 위에 누가 올라가면 천장의 대들보 사이에서 바싹 마른 나뭇가지 부스러기나 티가 떨어져 집 안에 있는 사람의 눈에 들어가기 일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군중에게 친숙한 소재인 들보와 티를 예로 들어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남을 심판하지 마라.”(루카 6,37) 하신 말씀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다고, 잘못된 스승이 자신을 넘어서는 제자를 키워 낼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정작 자신이 눈먼 이요 부족한 스승임을 외면한 채, 한 줌도 채 되지 않는 지식과 소유를 내세워 형제와 이웃을 단죄하고 가르치려고만 드는 이를 가리켜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눈이 먼 줄 알면서 눈을 뜨려고 노력하지 않는 나태함도, 앞이 보이는 척하며 자신을 과시하는 위선도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사람의 눈에는 티가 오래 머무르지 못합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스승임을 자처하거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고, 복음을 전하고도 스스로 실격자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자신을 단련하였던 바오로 사도의 모범을 기억합니다(제1독서 참조). 내 눈 속의 들보는 빼내고 가족과 형제의 눈에 든 티를 사랑으로 발견하여 조심히 꺼내 줄 수 있는 혜안을 하느님께 청합시다.
“주님, 저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마태 20,33).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의 행복을 위해 너에게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오늘의 바오로 사도 말씀에 비춰서 저를 봤습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제가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더 행복해지고,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표시가 바로 선교입니다.
바꿔 말하면 신앙적으로 미성숙하고 그래서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 때, 사랑을 했어도 거친 사랑밖에 할 수 없을 때는 선교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미성숙했던 때는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라 저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찾는 데 급급했고, 나의 고통과 불행과 씨름하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는커녕 돌아볼 여유도 없었는데 20대 중반까지의 저는 이러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왜 살아야 하는지 복음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했고, 복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찾았으며, 그래서 복음에서 나의 행복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30대 중반이었고 이때부터 이웃을 사랑해야겠다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이런 제가 저만 이렇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 너무 미안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렇지 않은 사람 특히 북녘의 동포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 30대 후반부터이고 지금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제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 더 나아가 불행한 사람, 사랑이 자기 사랑이나 가족 사랑에 머무는 사람은 선교할 수 없고, 행복하고 이웃 사랑이 있더라도 그 행복과 사랑이 복음 때문이 아니면 인도적인 실천을 할망정 복음 선포는 못할 거라는 점을 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선포는 복음으로 행복한 사람만 할 수 있고, 기도로 사랑이 충만해야지만 복음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봉사자들과 매일 식당을 여는 기도를 봉헌하면서
“주님, 오늘도 당신 사랑을 저희에게 부어주시어 저희가 당신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그 사랑을 이 식당을 통해 나눔으로써 당신 복음이 이 지역 사회에 널리 전파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게 복음 선포는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라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저는 불행할 겁니다.
그러니 저는 제가 행복하기에 복음을 선포할 뿐 아니라 저의 행복을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요, 너의 행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저의 행복을 위해서 선포하는 겁니다.
너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너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나를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갈수록 더 느끼는 저이고,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저인데, 아직도 아쉬운 것은 바오로 사도처럼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 ‘Omnibus, Omnia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지는 못하는 점입니다.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지적질로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금쪽같은 내 새끼, 78회 ‘가족 앞에 서면 숨이 턱 막히는 아들’에게서는 내가 통제하고 지적하고 잔소리하면 상대가 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십니다. 60년간 오직 자녀교육 잘 시키려 갖은 고생하신 할머니에게는 죄송하지만, 아들조차도 엄마에게 “엄마는 항상 강압적, 지시적, 명령적이었어요, 항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아들도 어머니를 비난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금쪽이는 아빠, 할머니의 지나친 통제와 지적질에 숨이 막히고 그래서 가끔은 소변을 지리기도 합니다. 엄마가 이혼한 상태라 빈자리가 큰 금쪽이는 할머니와 아빠를 화해시키려 노력하다가 혼자 방에 들어와 숨죽여 웁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 6,40)라고 하십니다. 스승은 제자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성장시켜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방식과 다르게 하려는 제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눈먼 인도자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눈먼 인도자들이 하는 행태를 나무라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41-42)
곧 눈먼 인도자들은 자신들 제자들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 그들 눈의 티를 빼내려는 이들입니다. 이것은 비난, 지적질, 혹은 나무람, 잔소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것으로 자신을 고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발합니다. 자유가 있어서 통제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이를 오히려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데모가 한창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떠한 이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이슈보다는 감정싸움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전경에게 매 맞고 돌아온 선후배들을 볼 때 화가 나고 전경들은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과 돌에 맞아 상처를 입은 동료를 보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할 때 그 사람은 그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그래서 너는 뭐가 잘났는데?”로 나옵니다. 방어기제가 작동되는 것입니다. 방어기제는 자아가 양심 때문에 알게 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려는 시도입니다. 그렇게 죄는 사라지고 서로 간의 비방만 남습니다.
미국에서 한 아버지가 아들이 마약을 한다며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의사는 역할극을 시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뭘 못 해줘서 그렇게까지 아이가 망가졌는지 답답해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주눅 들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이제 역할을 바꿔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가 “내가 마약 중독자입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식의 비난을 감당할 수 없었고 감당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하면 자기 잘못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진짜 죄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잘못을 드러내는 방식은 당신이 우리 죄 때문에 칼에 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죄를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
한 소매치기 청년이 어떤 병원 앞에서 담배만 피우다 지하철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한 여인의 가방에서 돈 냄새를 맡아 소매치기하여 달아납니다. 얼마 뒤 그 소매치기의 남동생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전화가 옵니다. 형은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보려고 병원에 왔었던 것입니다.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동생의 말에 형은 돈 없으면 다 죽어야 하느냐고 분개합니다. 이 모양이니 자신이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한탄합니다. 동생은 어머니 수술비로 자신의 결혼자금까지 찾아오던 애인이 소매치기만 당하지 않았어도 어머니는 살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소매치기당한 시간과 장소는 정확히 자신이 소매치기 한 시간과 장소와 일치했습니다. 소매치기 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유리조각’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일화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우리 죄의 칼에 찔리심을 통해 우리 죄를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가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고치려 할 때는 그들의 죄를 들추어내고 지적질하고 나무라면서 고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실까요? 하십니다. 그러나 당신 들보, 곧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하십니다. 베드로의 예를 봅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적받은 베드로는 변했을까요? 안 변합니다. 언제 변했을까요? 정말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 찌르면서 변합니다. 어떤 죄도 그 죄 때문에 찔려 피를 흘린 누군가를 보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코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스승이 되려면 제자들의 죄 때문에 칼에 찔리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면 들보가 사라집니다. 그제야 그들의 티를 빼내 줄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위선자.
침묵을 강조하는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수도원에 들어온 수도자들은 평상시에는 말 한마디 할 수 없고, 1년에 한 번 수도원장과의 면담 때에야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께서 수도자로 이 수도원에 들어왔습니다. 침묵을 지키면서 열심히 수도 생활을 했지요. 그리고 드디어 1년이 지났고, 수도원장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침대가 너무 딱딱해서 큰 고생을 했습니다. 침대를 바꿔주세요.”
수도원장은 곧바로 침대를 바꿔주었습니다. 다시 1년이 지나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수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식이 부실해서 식사 때마다 고역입니다. 음식에 신경을 써주세요.”
수도원장은 최대한 그가 원하는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또다시 1년이 지나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제가 지내는 방이 열악합니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방으로 바꿔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은 그가 원하는 방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네 번째 면담 시간이 되었습니다. 수도자는 “말 한마디 못 하니 너무 답답하고 바보가 된 느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 당신이 바꿔 달라는 대로 다 바꿔주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바꾸어 보세요.”
우리는 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대가 바뀌길 원합니다. 남편이 바뀌길, 아내가 바뀌길, 자식이 바뀌길, 세상이 바뀌길…. 그러나 여기서 늘 빠지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점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듯이, 자신을 먼저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들보를 빼내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남의 변화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는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외적인 행동과 마음속 생각의 불일치를 이루면서 결국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선자’라는 호칭이 지금을 사는 우리가 계속 듣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남만 바꾸라고 성을 내면서 말하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 자신이 바뀌면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선의 삶이 아닌, 진실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간 속에서 나의 주체성을 찾는 최고의 방법은 사랑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한 사랑해라. 행복한 순간은 늘 ‘앙코르’를 원한다.
- 파스칼 브뤼크네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카 6, 42)
우리 민족의 명절 추석이 시작되었다.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하는 기쁜 추석이길 기도드린다.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 삶의 원인을 정확히 찾아야 할 때이다. 정확한 원인을 알아야 정확한 치유책이 따라 나올 수 있다.
하느님 앞에서 철저히 반성하고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치유의 참된 걸음걸이이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가장 중요한 점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다. 먼저 우리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하느님을 드러내는 변화된 우리들 삶이 바로 복음의 삶이다.
내가 먼저 들보를 빼낼 때 내가 보고 있는 세상도 새롭게 따라 변화될 수 있다. 우리 존재의 참된 모습을 보는 것이 들보를 빼내는 아름답고 맑은 모습이다. 들보를 빼내는 본질적인 문제를 빠뜨리고서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강력한 생명력은 우리자신이 먼저 변화되는 건강한 실천력에 있다. 건강한 실천은 우리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신앙인들의 모습이다. 들보 하나를 빼내면 또 하나의 들보가 기다리고 있다. 깨끗해지는 믿음은 우리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들보를 빼내는 믿음이다. 믿음은 그냥 자라지 않는다. 반성과 쇄신 변화와 실천으로 우리는 건강하지 못한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복하여 빠져드는 우리 삶의 구덩이에서 이제는 벗어나 건강한 삶을 나누고 건강한 마음을 나누는 우리들이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제대로 보는 것이 바르게 볼 수 있는 것이 겸손한 믿음이다. 겸손은 내가 먼저 올바르게 변화되는 삶이며 실천이다.
이제 해묵은 구덩이와 해묵은 만성 대들보에서 벗어날 때이다. 빼내어야 살 수 있고 벗어나야 제대로 볼 수 있는 삶의 소중한 기쁨을 더는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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