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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7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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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

 

 

2022년 9월 7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겠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며,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하고 선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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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6장 20-26절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승현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7일 (수)
조승현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 명동성당 매일미사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2022년 9월 7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

 

마태오 복음의 참행복 선언(마태 5,3-12 참조)은 ‘산상 설교’(5─7장)의 첫머리에 놓여, 시나이산에서 주어진 구약 율법을 완성하는 ‘신약의 새 모세’로 예수님을 내세웁니다. 

한편 오늘 루카 복음의 참행복과 불행 선언은(루카 6,20-26 참조) ‘평지 설교’(6,17-49)에 속한 대목으로, 산에서 평지로 내려오시어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백성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각각 네 가지로 구성된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은 대칭을 이루며 서로 그 뜻을 밝혀 줍니다. ‘가난한 이들’이 ‘부유한 이들’과 달리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까닭은, 자신의 미소함을 인정하고 오직 하느님께만 의탁하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그분의 현존과 은총 속에서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특히 저 먼 미래의 무엇이 아닌 “지금”(21.25절)의 삶을 잘 살피고, 하느님 없이 자만자족하는 부자가 되기보다는 그분께 희망을 두기에 당장의 불편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겨 낼 줄 아는 ‘스스로 가난하게 된 사람’, 곧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상속자가 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부유하고 즐겁기만 한 삶에 익숙해진 이는 그것을 잃어버릴까 늘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데 필요하다면 스스로 세상의 가치를 내려놓는 ‘결핍’에 익숙해진 신앙인은(제1독서 참조), 세상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평정심과 확신을 잃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주시는 그 온전한 ‘자유’를 현세에서부터 미리 누리며 살다가,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우리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떤 고통과 어떤 행복을

 

혼인하는 이들은 현세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면하게 하고 싶습니다. 

결혼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얼핏 보기에 상당히 비관적인 관점입니다. 

결혼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권장할 만하지는 않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현세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실로 이런 이유는 연애에 실패한 사람이 중이 된다는 옛날의 시각이나 수도 생활이 현실도피 용이라는 왜곡된 시각에 힘을 실어주는 것밖에 안 됩니다. 

결혼한 저의 친구들을 보며 저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고, 그래서 저만 수도 생활의 행복을 사는 것만 같아 미안해한 적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제가 현세 고통을 친구들만큼 겪지 않고 행복한 것 사실이지만 그럴지라도 제가 현실도피 용으로 수도 생활을 택한 것은 아니지요. 

분명히 말하지만, 현세의 고통을 피해 수도자가 된 사람은 행복하지도 않고, 수도 생활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도 생활이 행복한 것은 현세의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잖습니까? 반대의 시각으로 보면 수도자는 현세의 쾌락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고, 가족 부양의 책임과 같은 고통은 없더라도 고통이 없는 사람이 아니지요. 

사실 수도 생활을 제대로 한다면, 다시 말해서 더 많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감수하고 감당하는 사람이지요.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가 결혼하지 않음으로 현세의 고통을 면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모든 고통의 회피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사람이 정작 감수하고 감당해야 할 고통 대신 현세의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행복을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며 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오히려 이 세상에서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프고, 미움을 받아야 하는 행복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고, 하느님 나라를 위한 고통입니다. 

불교에서 인생은 고해라고 하듯 사는 것이 고생이고 고통스럽지 않은 인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틀어보면 누구나 다 고통을 겪는데 그 고통이 현세의 고통이냐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위한 고통이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어떤 고통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니, 어떤 행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잊는 유일한 행복의 요건

 

금쪽같은 내새끼 112회 ‘부모의 이혼과 재혼을 겪는 금쪽이, 불안과 구토증세의 이유는?’에 심하게 분리불안을 겪는 여자아이가 나옵니다. 집에 들어와 엄마가 없으면 심하게 불안해하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 무조건 들어오라고 떼를 씁니다. 그리고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펑펑 서럽게 웁니다. 러다 먹을 것을 생각하면 금세 울음을 그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폭식합니다. 엄마를 찾는 행위가 분명 생존본능 때문임을 입증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음식이 떨어져 갈 때 아이는 다시 급히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합니다. 결국 음식으로는 엄마를 대체할 수 없음을 몸이 아는 것입니다. 아이는 잠을 혼자 자지 못합니다. 옆에서 엄마가 손을 잡아주고 같이 자야만 잠이 듭니다. 안 그러면 기침하다가 또 구토합니다.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남편이 아닌 아이와 같이 잠을 자야만 합니다. 

금쪽이가 이렇게 엄마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아빠가 자신에게 신체접촉도 안 해주고 놀아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금쪽이가 네 살 때 엄마와 결혼하였습니다. 엄마는 재혼이었지만 아빠는 초혼입니다. 그러니까 아이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남의 자식이라 야단도 칠 수 없고 신체접촉도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아빠를 이상하게 여길까 봐 주저합니다. 

금쪽 처방으로 아빠는 금쪽이를 하루 세 번 안아주어야 하고 자주 놀아주어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빠는 피곤하지만, 아빠의 역할을 다해줍니다. 그러니까 금쪽이가 너무 좋아합니다. 급기야 폭식 성향도 줄어들고 잠도 혼자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잠을 잘 때 부모가 지켜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 압니다. 참 행복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줄 수 있는 부모에게서 온다는 것을.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도 부모가 나의 참 생존을 책임져주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아니면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지나고 어른이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았고 어디서 왔는지도 알게 됩니다. 자신은 인간이며 진화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신과 같은 존재로 믿습니다. 이제 자기 생존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과 먹는 것과 힘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것이 행복이라 믿게 됩니다. 행복이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줄 부모를 믿는 것이 아닌 부모가 알아서 챙겨주어야 할 것들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마태오복음의 진복팔단과는 다르게 루카복음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고 청빈-정결-순명의 덕을 쌓으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곧 세속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육신은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마귀는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로 극복됩니다. 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모욕받고 중상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따르면 불행하고, 청빈-정결-순명을 추구하면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 복음이 아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돈을 행복이라 여기고 배부름을 행복이라 여기고 명예를 행복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믿게 되었을까요? 어린이 때 가졌던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자신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들보다는 부모를 행복으로 여깁니다. 부모가 생존까지 책임져주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부모를 바랍니다. 아기가 음식을 씹어서 식물인간이 된 엄마에게 먹이는 예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자신도 창조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생존을 자신이 책임질 수 있다는 교만함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더는 자신의 출처가 아닌 자기 자신의 신으로서 스스로 생존을 책임지려 합니다. 그래서 행복의 목적이 자신의 출처가 아닌 자기를 생존시켜 줄 대상들로 바뀌게 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아기들은 아는데 어른은 모릅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창조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기 생존을 책임지려 하는 게 고통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일은 고통스럽게 보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부재를 잊기 위해 먹고 토하고 하는 것과 같은 삶을 삽니다. 그렇게 탈진해버립니다. 정 안 되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다행히 저는 어렸을 때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물론 생존에 관련된 것들이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추구하다 보니 더 공허하고 배고프고 행복에서 멀어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결국 그런 것들을 추구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신을 창조자로 믿는 방법뿐입니다. 나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임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의 출처인 창조자 하느님을 찾아냅니다. 그분이 아니면 결코 그 목적이 달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봅시다. 인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은 이 철학적인 작품은 초월의 경지에서 인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갱이 이 작품을 그릴 때,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고갱은 타히티라는 낯선 곳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했지만, 그곳에서의 삶 역시 녹록지 않았습니다. 타히티에 온 지 6년째 되는 해, 딸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 무렵 자신의 건강도 나빠졌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그가 자살 결심 후 그린 대작입니다. 

“저는 용기도 돈도 떨어졌습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 목에다 밧줄을 메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엄습해 옵니다. 저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오직 그림뿐입니다.”

이 작품은 오른쪽의 탄생을 시작으로 왼쪽은 죽음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고갱은 늦은 나이가 되어서 그가 죽고 싶은 이유는 실제로는 돈 때문도, 건강 때문도 아닌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 늦기 전에 우리 존재의 행복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에 있음을 잊지 말고 내 영혼의 창조자를 믿으려 노력합시다. 그래야 세속-육신-마귀의 집착에서 멀어져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집착이 사라져서 그것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기반이 바로 그분이 참 행복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요한복음의 이 문장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13,3-5).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한 사람이란?

 

어렸을 때,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하늘 높이 날던 제비가 땅에 가깝게 비행하는 것을 보게 되면, 곧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제비가 날씨를 예측하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재주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곤충 때문이지요. 
 
제비는 곤충을 잡아 먹기 위해 날아다니는데, 비가 오기 전에 습도가 높아지면 곤충의 날개도 습기 때문에 무거워져 높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낮게 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곤충을 잡으려는 제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곤충이 많은 땅에 가깝게 비행해야 할까요? 아니면 곤충이 전혀 없는 하늘 높이 날아야 할까요? 
 
비가 오기 전, 습한 날에 땅 가깝게 비행하는 이유는 이렇게 ‘곤충’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단지 곤충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아서 제비가 날씨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고 착각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종종 사람의 능력에 대해 과대평가합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우리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다면 그런 능력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자기의 힘만으로 얻었다는 착각 속에,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복과 불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4가지 행복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입니다. 뒤이어 오는 불행은 4가지 행복을 뒤집은 것으로,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이를 듣고 어떻게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할까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무조건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 그리고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 것보다 주님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가난할 수 있고, 굶주릴 수 있고, 울 수 있으며, 세상의 반대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능력과 재주보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덕분에 이루어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서 먼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과 판단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주님의 기준과 판단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를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고, 평안한 사람은 현재에 산다.

- 노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루카 6,21)

 

우리가 찾고 있는 행복이 다시금 무엇인지를 묻게된다. 유년시절 가정의 아픔으로 많이 아팠고 많이 힘들었던 눈물의 시간이 하느님을 간절히 찾았던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살아있기에 울음이 있고 살아있기에 웃음이 있다. 우리의 아픈 울음을 기쁜 웃음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사고방식의 반대편에 있는 참된 행복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앎에 갇혀있다. 안다고 하지만 실상 알지 못한다. 삶의 방식을 다시금 바꾸어 놓으시는 참된 웃음이다. 참된 웃음은 우리의 삶이 선물이 되고 축복이 되게한다. 

행복은 생각 속에 있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고 체험하는 모든 것이 행복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참된 행복은 행복이라는 지식에 갇혀 있지 않다. 

오히려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눈물도 흐르고 세월도 흐르고 행복도 흐르고 기쁨도 흐른다. 모든 것을 맛보며 삶에 감사하게 되는 우리들이다. 우리의 행복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모든 삶이다. 

눈물도 울음도 슬픔도 봉헌한다. 하느님을 찾는 모든 순간이 행복이었다. 행복한 사람이게 하시는 하느님께 오늘을 맡겨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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