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9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
2022년 9월 5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악의와 사악이라는 묵은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내자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으시고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본기도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6장 6-11절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승현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5일 (월)
조승현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5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손을 뻗어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사이에 일어난 단식 논쟁(루카 5,33-39 참조)은 안식일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유다인들의 구전 율법 미쉬나는 ‘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운 모든 경우는 안식일 법에 우선한다.’라고 가르치는데, 이는 시대가 지나면서 유다인들도 율법의 예외적 적용의 필요성을 점차 깊이 인식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논쟁을 벌였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경우, 그들의 의도는 처음부터 악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만을 찾을 뿐, 안식일에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끌어낼 수 있었던 당시의 통념마저 거슬러(마태 12,11 참조), 정작 장애를 지닌 동족의 고통은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는 이때 예수님께서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마르 3,5)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의미를 인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통하여 밝히셨습니다. 안식일이 ‘좋은 일을 하는 날’이며 ‘목숨을 구하는 날’이라 하신 것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창조의 일곱째 날로서 하느님께서 ‘완성이라는 일을 하신 날’이며(“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창세 2,2].) 당신 백성을 ‘억압에서 해방시키신 날’임을 기억하고(신명 5,15 참조) 그 뜻을 실천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손을 뻗어라.”라는 주님의 말씀이, 편협한 마음과 잔뜩 오그라든 손으로 때때로 누군가를 가리켰던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이 구워 낸 새 빵이 되어’(제1독서 참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새 삶을 시작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의 공동체는?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를 크게 꾸짖습니다.
이교인들도 저지르지 않는 불륜을 코린토 교회 구성원 중의 하나가 저질렀는데 그를 회개시키지도, 제거하지도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는 꾸짖음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묵상하면서 공동체의 역동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소신학생이었을 때 저희는 학급 회의를 통해 무감독 시험을 하기로 했는데, 신학생이라면 감독이 있건 없건 정직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에서였지요. 대단한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래서 이 결정은 자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잘 지키다가 얼마 지나서부터 부정행위를 하는 친구들이 생겨났고 그래서 그것을 놓고 저희는 다시 학급 회의를 하게 되었는데 저희는 괴로웠지만 그 친구들이 신학교를 떠나는 것으로 결정하였고, 그들은 신부가 되지 못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다음서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한 번은 기회를 주는 쪽으로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튼, 그때는 저희가 그렇게 결정했는데 오늘 코린토 교회의 문제를 생각하면 저희는 아주 훌륭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과 하나가 썩었는데 그것을 그대로 놔두면 차츰 전체가 썩기 때문입니다.
한 상자 안에 있지 않으면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한 상자 안에 있으면 문제입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공동체 안의 악행은 한 사람의 악행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의 악행이 개인의 악행이 아닌 것은 악행의 전염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하나는 공동체가 그것을 용인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행의 전염력을 오늘 서간에서는 누룩으로 비유합니다. 누룩은 아무리 작아도 전체를 부풀게 하기에 그 누룩은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 용인하는 한 공동체를 급속히 병들게 합니다.
그런데 누룩은 악행의 누룩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에게서 성인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거룩한 누룩도 있잖습니까?
저는 성녀 클라라 공동체를 생각할 때마다 이 점을 생각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있었기에 클라라가 성인이 된 측면도 있지만 프란치스코와 만나기 전에 클라라의 가정은 이미 거룩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클라라에 이어 동생 둘이 다 수녀원에 입회하였고 나중에 어머니마저 입회하였으며 자매들 모두 성인 또는 복녀가 되었지요.
공동체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공동체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인데 ‘더불어’라는 말이 아마 ‘더 불다’ 또는 ‘더 불어나다’의 준말일 것입니다.
작은 불씨 하나로는 꺼지기 쉽고 아무런 빛이 되지 못하지만 작은 불씨들이 하나둘 모이면 몇 년 전 광화문 촛불처럼 엄청난 불이 됩니다.
불이 불을 붙이고, 서로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고, 서로의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고, 하나의 불로 밝힐 수 없는 어둠을 밝힐 수 있게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협동조합을 통해서도 저는 이런 체험을 합니다. 저 혼자라면 열정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타오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저와 함께하는 분들이 있어서 저는 다행이고 행복합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분들이 어떻게든 함께하겠다고 하시고, 그만큼 이 협동조합에서 하는 좋은 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지 돌아보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홉을 주고도 미처 주지 못한 하나를 안타까워하는 것이 사랑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봅니다. 이에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부족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그보다는 나 자신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이해를 위해, 사람들 간의 사랑을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내가 받는 사랑의 크기에 따라서 기쁨의 강도가 바뀔까요? 그보다는 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기쁨이 더 커졌던 기억이 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에 크게 기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받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늘 주는 것이 먼저였고, 이런 사랑을 통해 우리는 큰 기쁨과 행복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주는 것이 아닌, 받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게 되면 여기서 사랑의 결핍이 나타나고, 형식적인 사랑의 실천만을 입으로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주는 사랑에 집중하고, 이 사랑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충만하게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논쟁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냐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이 우선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유다인에게 율법은 그 어느 것보다도 귀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율법이 곧 하느님이 되었습니다.
성경 외경인 ‘나자렛인들의 복음서’라는 책에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오른손으로 밥벌이하는 장인이었습니다. 이 오른손이 가족의 밥줄일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고쳐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병자를 앞에 놓고 치유의 합법성 문제를 따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가장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이었고, 하느님께서 전해주신 율법 역시 그 사랑에 기초해야 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따라서 법 중의 법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법이 됩니다. 그런데 알맹이는 빼고 법조문 글자에만 집착하면서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형식적인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자신이 받을 사랑에만 집중해서도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지워버리고, 자신이 주는 사랑만을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게 됨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이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바라는 것이 아니며, 둘을 주고 하나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아홉을 주고도 미처 주지 못한 하나를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 브라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년 9월 8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8 |
---|---|
22년 9월 7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7 |
22년 9월 6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6 |
22년 9월 4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4 |
22년 9월 3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3 |
22년 9월 2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2 |
22년 9월 1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