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9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
2022년 9월 1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된다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본기도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5장 1-11절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최영진 그레고리오 신부 강론
2022년 9월 1일 (목)
최영진 그레고리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9월 1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주님을 바라보는 지혜
첫 제자들을 부르신 그날, 당신께 몰려든 군중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의 시선은 호숫가에 배를 대어 놓고 그물을 씻는 어부들을 향하여 있습니다. 밤새워 일하고도 허탕 치기 일쑤인 팍팍한 삶 속에서 여느 사람들처럼 예수님께 귀를 기울일 여유가 좀처럼 나지 않는 어부들을, 예수님께서는 유심히 바라보시고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군중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그분 곁에서 말씀을 듣게 되었을 터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불렀던 베드로는, 얼마 전 열을 꾸짖어 자신의 장모를 곧바로 치유하시고(루카 4,38-39 참조), 밤새 허탕 친 그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를 낚게 하신 대자연의 주인 앞에 엎드려 이제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의 부당함을 고백하던 구약 시대 예언자들의 모습을 많이도 닮았습니다(탈출 4,10.13; 이사 6,5; 예레 1,6 참조).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을 당신의 첫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나섬으로써 ‘지혜롭게 되고자 어리석음을 택한 이’가 되어 오롯이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제1독서 참조).
우리의 시선을 온통 앗아 가는 요즘의 일상에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풀에 지친 나의 하루라는 배에 주님을 모셔 들이고, 그분과 함께 더 깊은 곳으로 저어 들어가 구원을 낚는 복된 삶을 새롭게 시작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진정한 자유인, 진정한 주인인 나.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놀라운 얘기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우리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모든 것을 다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욕심 부려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데 옥심을 부리는 것은 우리가 그것들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는 거지요.
우리말에 돈이 사람을 쫓아야지 사람이 돈을 쫓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씀은 그런 뜻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나를 위해 있어야지 내가 돈을 위해 있으면 안 되지요. 돈의 진정한 주인은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돈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이어야지 없으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은 돈의 진정한 주인도 아니고 자유인도 아닌 종입니다.
돈뿐이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고 자유인도 아니며 그에게 매여 있는 사람이며 그의 종입니다.
하느님 이외에 그 어떤 존재도 나의 주인이어서는 안 되고 어떻게 보면 하느님도 나의 주인이 아니고 실은 나를 위해 계시는 겁니다.
사실 내가 없으면 있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기에 나는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고 하느님도 이런 뜻에서 나를 위해 계시는 분이니 인간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인간에게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말아야겠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어제 우리가 하느님의 밭이요 건물이며 성전이라고 하며, 이런 우리를 가꾸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자신도 아폴로도 케파도 당신 협력자로 주셨는데 어째서 나는 바오로 파다, 아폴로 파다 하느냐 나무랐지요.
바오로 파라는 것은 바오로 파에 속해 있다는 뜻이고, 바오로에게 매여 있고 구속을 받는다는 뜻이잖습니까?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고 자신도 아폴로도 케파도 우리의 것이라고 하며 어디에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아폴로에게도 케파에게도 구속받지 말라 합니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이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하느님의 성전인지를 인식하며 함부로 성전인 자기를 악령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느님 이외에 누구에게도 내주지 말아야 한다고 오늘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하느님 이외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 욕심 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누리는 진정한 주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은 이런 때 얼굴에서 빛이 난다.
제 유튜브 채널 구독자 중 ‘사랑합니다, 하느님’ 이라는 아이디를 가지신 분의 댓글입니다.
제가 신앙생활 초기에 체험한 작은 기적이 있어요. 어느 날 성당에 가려는데 갑자기 하느님께 마음속으로 여쭙게 됐어요.
“하느님 오늘은 제가 어떤 옷을 입고 가면 좋으시겠어요? 하느님 뵈러 성당 가니까요. 하느님이 원하시는 옷을 입고 싶어요.”
그러고 옷장을 보니 그동안 한 번도 마음에 안 갔던 옷이 눈에 띄었고 그걸 입고 성당에 걸어갔어요. 그런데 신기한 일이 미사 중에도 미사 후에도 집으로 걸어올 때도 사람들이 얼굴까지 돌려가며 저를 다 쳐다보는 거예요. 정말 거의 모든 사람이요. 입이 떡 벌어지고 눈이 동그래져서요. 무슨 김태희도 아니고….
저는 그런 외모도 아니고 태어나서 이런 경우가 한 번도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요. 집에 와서 보니 진짜 제 얼굴이, 몸이 엄청나게 빛나고 있었어요. 너무 웃기시겠지만 진짜 살 속에서 빛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요. 저도 너무 신기하고 아름다워서 거울을 한참 쳐다봤어요. 그러고 싹 사라졌어요. 그 빛이요.
그때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지나갔는데 최근에 신부님 강의 듣고 묵상하다가 너무 오랜만에 딱 생각난 거예요. 하느님의 뜻을 원한 거. 물론 이게 아주 작은 무슨 옷을 입느냐 하는 거였지만요. 그게 하느님께서 마음에 드셨나 봐요. 저는 초신자이고 그리고 주변에 신앙인도 없어서 아무도 저를 이끌어줄 수도 없고…. 그런 상황이니까 하느님께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작은 기적을 선물처럼 주셨던 거 같아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저도 더더욱 믿고 더더욱 하느님의 뜻을 원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정말 얼굴에서 빛이 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도 아주 가끔 빛이 난다는 말을 들어보기는 하였습니다. 그때는 사실 잠을 많이 자서 피부가 좋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잠을 못 자고 지쳐있지만 그래도 신자분들을 위해 무언가 할 때입니다. 그렇게 지쳐있어서 사람들이 나를 피곤하게 보지 않을까 생각할 때 신자들은 빛이 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빛’이 나는 일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도 우영우가 고래들로부터 새로운 영감을 받을 때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빛이 나는 장면이 많습니다. 여기서 고래는 바다의 고래가 아닙니다. 하늘을 나는 고래들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하는 깨달음을 주는 거의 신적인 존재의 상징입니다. 신적인 존재의 뜻이 들어올 때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모세도 하느님과 40일간 대화하고 나서 얼굴에 빛이 나서 수건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우리 신자들은 얼굴에 빛이 나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뽑을 때 먼저 오른쪽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시키십니다. 베드로는 어부이고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생님이기는 하지만 목수이고 고기 잡는 법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그리고는 엄청난 물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하도 겁이 나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께 처음부터 “물고기가 많이 잡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고 그 기도가 들어졌다면 이만큼 충격을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량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내가 기도한 것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것보다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분의 뜻을 물어보고 그분의 뜻을 실현하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체험이 훨씬 큰 은총을 선사합니다.
내 안에 성체로 들어오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가로막아 나를 어둡게 만드는 것은 자기 뜻입니다. 기도도 나의 뜻이 이루어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청해서 받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은총을 받습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면 믿겠다는 말은 얼마나 어리석고 어두운 마음입니까?
저도 며칠 전에 피곤하여 가기 귀찮은 곳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주님께서 가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외모에 대한 특별히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저에게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제 외모에 대해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한 수녀님이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는 것이 힘들어서 알프스에서 에델바이스를 보면 견뎌보라는 뜻으로 알겠다고 기도했는데, 결국엔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고 석사까지 버틸 힘을 얻었습니다. 에델바이스는 알프스의 별이라는 꽃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청해 봐야 작은 꽃 한 송이 보게 해 달라는 것이지만 하느님은 비 오는 중에 하늘을 열어 알프스에 별이 쏟아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얼굴이 빛날 수 있습니다. 빛이 은총과 진리로 내 안에 들어와 사시기 전까지 나는 어둠이었습니다. 자아는 어둠입니다. 자아의 뜻이 하느님의 뜻을 가로막지 않도록 합시다. 자주 주님의 뜻을 물어봅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매력을 풍겨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겸손이 필요한 이유
“자동차 주행 중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복잡한 결정을 내리는 일을 컴퓨터는 절대 할 수 없다.”
“복잡하고, 감성적이며, 모호한 의미가 담긴 말을 컴퓨터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이 글을 보는 사람은 컴퓨터를 이렇게 과소평가할 수 있냐면서 이 글을 쓴 사람의 무지를 탓하며 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2000년 초에 나왔던, 지금으로부터 불과 20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한 사람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프랭크 레비 MIT 교수와 리처드 머네인 하버드 교수가 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사람들이 공감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의 말이었지만 분명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연구도 하지 않았고, 또 깊은 고민도 하지 않은 사람의 말이 사실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계속된 변화의 속도를 우리 인간은 절대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스스로 잘난 체한다고 남이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남이 알아주고, 남이 알아서 그 사람을 높여줍니다. 그래서 나의 말과 행동이 무조건 옳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어느 순간에서도 겸손할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특히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려고 한다면 무조건 겸손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밤새도록 고기잡이가 시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베드로도 어젯밤에 다 해 본 일이었지요. 그러나 존경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순명합니다.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물고기도 복종시키는 이 분 앞에서 형편없는 자기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베드로에게 보이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합당한 자격은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격이 없음을 또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라고 바오로 사도께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은 겸손의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별것 없어 보이는 일상이야말로 살아가는 의미를 느끼는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 이즈미야 간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루카 5, 10)
초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순교자의 삶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순교자 성월의 첫날이다. 이 땅의 가톨릭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로 세워진 믿음의 교회이다. 물이 깊으면 큰 물고기가 많고 고통이 크면 믿음 또한 크다. 우리가 건강하지 않기에 의사이신 예수님이 필요한 우리들 관계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며 놓아 버린다는 것이다. 집착하고 있는 것마저도 놓아 버리고 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의 자리가 출발점이며 해결점의 자리이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삶과 죽음의 깊은 의미를 알게된다.
구원의 방식은 집착하고 있는 것을 버리고 따르는 방식이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다시 우리가 누군지를 묻는 시간이다. 버리고 따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버릴 것을 버리고 지킬 것은 지키며 따르는 이들의 기쁨이다.
따르지 않고서는 사람을 낚는 감동과 감사를 알 수 없다. 순교의 가치는 버림의 가치이다.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끄시는 주님이시다. 빛나는 삶의 가치는 영원하신 하느님을 따르는 영원한 기쁨이다. 사람을 낚는 복음의 실천이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년 9월 4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4 |
---|---|
22년 9월 3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3 |
22년 9월 2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2 |
22년 8월 31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8.31 |
22년 8월 30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8.30 |
22년 8월 29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8.29 |
22년 8월 28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8.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