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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
2022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겠냐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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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5장 33-39절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양지훈 F.살레시오 신부 강론
2022년 9월 2일 (금)
양지훈 F.살레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이길재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2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과 전통에 따라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금식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회개와 속죄의 의미로 단식하는 ‘속죄일’이나, 예루살렘과 성전이 바빌론에 파괴된 일을 애도하는 ‘성전 파괴 애도일’ 같은 몇몇 기념일 정도였습니다. 다만 바리사이들은 이 밖에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희생과 극기의 의미로 더 단식하였습니다(루카 18,12; 디다케 8,1 참조).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모습이 영 불편하였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루카 5,27-32 참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하며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언젠가 예수님을 반대하던 자들이 그분마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7,34)라 조롱하였듯 말이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나누는 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혼인에 비유하였듯(이사 62,4-5; 예레 2,2; 호세 2,18.21-22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자주 비유하셨습니다. 누군가와 음식을 함께 나눌 때 생명을 공유한다고 여겼던 그 시대에, 단죄받고 소외된 세리들과 죄인들이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가진 그 가슴 벅찬 구원의 확신을 바리사이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는 완고한 잣대와 사랑이 메마른 일상이라는 ‘헌 가죽 부대’에는, 주님과 이루는 친교와 구원이라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단식은, 결핍 가운데 있는 형제를 향한 선행과 자선임을 기억합시다(이사 58,5-7 참조).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의 정체성은?
“형제 여러분,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비롯하여 그리스도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그리고 하느님이 신비를 관리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리스도도 신자들을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종이요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으로 여기게끔 처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처신이 세상 사람과 똑같기에 말하지 않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하느님 신비를 관리하는 사람인지 몰라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겠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정체성이자 신원 의식입니다. 자신들은 시시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종이지 죄의 종이 아니라는.
그리스도의 종이지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그리스도의 종이지 누구의 하수인도 아니라는.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이지 세상사의 관리인이 아니라는.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이기에 세상의 어떤 시비에도 말려들지 않는다는.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이기에 세상으로부터 어떤 판단도 받지 않겠다는.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이기에 하느님으로부터만 판단을 받겠다는.
이런 바오로 사도의 말은 즉시 프란치스코를 떠올립니다.
프란치스코가 복음 말씀대로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그의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는 프란치스코가 자기의 재산을 거덜낼 것을 염려하여 프란치스코의 소유권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세속 법정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니 그는 자기가 하느님의 사람이기에 세속 법정에서 판결받지 않고, 교회 법정에서 판결받겠다고 하여 주교님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주교님과 사람들 앞에서 그 유명한 행동을 합니다. 바로 옷을 홀라당 벗어서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행동 말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은, 다 돌려주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옷을 홀라당 벗은 것도, 아버지 것을 아버지에게 다 돌려준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면서 그가 한 선언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하늘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부르게 되었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더 이상 육신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선언이고, 그래서 전기 작가인 첼라노는 프란치스코를 내내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칭하지요.
비참하게 죄의 종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시시하게 세상에 속한 사람도 아닌 그리스도의 종이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그 정체성을 우리도 가지라고 가르침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렇게 하면 죽을 때까지 속 좁은 노인이란 소리 안 듣는다.
“라떼는 말이야….”
“요즘 애들 이해를 못 하겠어!”
등의 이런 말을 자주 한다면 그 사람은 속 좁은 노인일 확률이 다분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노인을 ‘꼰대’라는 용어로 비하합니다. 꼰대는 자신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만약 자녀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은 또 어린 꼰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자기 생각만이 다 맞는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그때그때 받아들여야 할 시대의 표징, 혹은 하느님의 뜻에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꽉 막힌 어른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모가 되어보아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유튜브 채널 ‘달빛 부부’의 ‘12년 동안 가면을 쓰고 생활한 스티븐 연’의 내용입니다.
스티븐 연은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까지 오른 미국 영화계의 큰 인물이 된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하지만 그도 삶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너는 한국인답지 않다”라는 말을 듣고, 나가서는 미국인들에게 “너는 미국인답지 않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동양인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 좋을 때여서 어쩔 수 없이 그는 밖에서는 미국인답게, 집에서는 한국인답게 생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워킹 데드’라고 하는 시리즈에 거의 주연급으로 많은 인기를 얻기까지는 동양인으로서 많은 차별을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나리’를 찍으면서 당시 이민 1세대의 고통을 그대로 연기에 녹아내며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되었습니다. 왜 그리 힘들게 일해야 했는지, 싸워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영화 시사회를 마치고 아버지는 스티브 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아들은 그동안 아버지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버지 품에 안겨 흐느꼈습니다. 아버지도 그러한 아들을 안고 울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꽉 막힌 근성을 나무라십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틀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추려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 5,33)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으면 부대가 터져서 헌 부대인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치 않는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8-39)
그렇다면 옛것은 다 나쁘다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것도 있고 변해야 할 것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변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은 변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입니다.
수십조 개에 이르는 인간의 세포는 7년이면 모두 새것으로 교체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이 변하면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죽어야 하는 세포가 죽지 않으면 암 덩이가 되어 인간이 죽습니다. 변할 것은 변해야 하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고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변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현재 지옥에 관하여, 혹은 십일조에 관하여 말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선악과는 꼭 바쳐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런 것들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변하고 있습니다. 성당에서 장궤틀도 사라지고 십자가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반면 너무 엄숙한 분위기의 미사는 변해야 합니다. 미사는 하느님을 만나는 혼인 잔치입니다. 그런데 너무 제사 분위기이고 형식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으로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형식은 철저히 지켜지지만 실상 미사 안에서 얻어야 하는 열매, 곧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믿음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가 죽어갑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임은 스티브 연처럼 그 역할을 수행해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입니다. 이 캐릭터를 소화하면 모든 인간을 이해해서 꼰대라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배역을 있는 그대로 연기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새로운 포도주이십니다. 그분은 유연성 없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인류의 모델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삶이 그분 안에 스며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안은 성모 마리아께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 아드님을 팔아넘긴 가리옷 유다도 이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안으신 십자가의 예수님 안에는 가리옷 유다의 수많은 죄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은 곧 모든 인류를 받아들임이고 이해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살게 됨으로써 우리는 내가 만날 모든 이들의 모습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누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루한 어른이 아닌 익어가는 어른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과의 비교는 절대 금지
미사를 하는데, 누군가가 저만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빤히 보시는 것입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사 후, 곧바로 제의방 거울을 봤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더군요. 성당 입구에서 인사하는데, 저만 바라봤던 자매님이 제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15년 전 갑곶성지에서 신부님을 처음 봤었는데, 어떻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으세요? 저는 이렇게 많이 늙었는데, 신부님은 하나도 늙지 않으셨어요.”
늙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 역시 늙고 있습니다. 주름의 깊이는 더 깊어졌고, 피부의 탄력도 없어졌으며, 검버섯도 보입니다. 젊어 보이는 부분은 제 또래보다 검은 머리가 더 많다는 것뿐입니다. 그밖에도 늙음의 징후는 많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매님은 저를 예전과 똑같다고 생각하실까요? 자기 자신과 저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은 많이 늙었는데, 저는 늙고 있지 않고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비교는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게 합니다. 비교하지 않는 곳에서만 제대로 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이렇게 물으면서 그들은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몰아붙였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신심 행위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열심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노력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하지 못한 사람을 신심 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 자기는 맞고 남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신앙생활은 인간생활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영성적인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러 오셨지 빼앗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새 옷과 새 부대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새 세대에는 새 기분으로,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심정은 예수님께서 새 세대를 열면서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헌 옷에 새 천을 대고 기워보아도 옷은 더 찢어지기만 할 뿐, 헌 것(율법 시대)은 폐기할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로이 임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율법을 빌미로 각종 외부적인 형식으로 경직된 종교가 아니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풀어 나아가는 개방의 종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비교하는 마음으로 인해 새로운 나라를 보여주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특히 남과의 비교는 절대 금지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남의 좋은 점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남을 칭찬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남을 자기와 동등한 인격으로 생각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 괴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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