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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30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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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8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

 

 

2022년 8월 30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몰아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30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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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4장 31-37절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김종호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2년 8월 30일 (화) 
김종호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8월 30일 (화)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마귀와 대적할 힘

 

마태오, 마르코, 루카, 세 복음서는 공통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첫 번째 기적이 마귀의 추방이라고 말합니다(마태 4,24; 마르 1,23-26; 루카 4,33-35 참조). 예수님께서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오늘 복음처럼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어 그를 해방하십니다. 마귀가 떨어져 나간 사람은 다시 의식을 회복하고 자유를 얻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마귀의 영”이라는 말이 자칫 고리타분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다양한 것들에 사로잡혀 살아갈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를 현혹하는 광고와 황당한 뉴스에 눈과 귀를 빼앗겨 소비주의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소중한 자유를 잃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많은 나쁜 것에 중독될 수 있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신은 그 어떤 것에도 매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조차도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신봉하고 그것에 매여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루카 복음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미리 유산을 받아 멀리 떠난 작은 아들이 세상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방탕한 생활을 하며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한 이야기를 전합니다(15,11-19 참조). 

마귀들은 똑똑하고 교활합니다.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창세 3,1). 

마귀들은 신학에도 밝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들은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선을 거슬러 거세게 저항합니다. 우리 안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조용히 차분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마귀와 대적할 힘을 주님께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의 영은?

 

공교롭게도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영들에 대한 얘기이고, 하느님의 영, 세상의 영,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등장합니다. 

모든 것에 영이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에게도 영이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나의 영은 어떤 영일까? 오늘은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을 영접하는 영일까? 더러운 영 곧 세상의 영에 사로잡힌 영일까? 

저는 주문처럼 이렇게 얘기합니다. 

‘땅에서 하늘을 살자!’ 

또 자주 이렇게 강의합니다. 

흙탕물 속에 피지만 잠기지 않고 아름다움과 향기를 풍기는 연꽃처럼, 세상 한가운데 살지만, 결코, 세속화되지 말고 세상에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곧 세상을 복음화하는 사람이 되자!’ 

이런 지향으로 사니 저는 분명 하느님의 영을 영접하려는 자이고, 적어도 세상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과 다릅니다. 저는 분명 악령처럼 주님과 상관없이 살려고 하지 않고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서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나를 괴롭히거나 멸망시키러 오신 분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더군다나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려고는 하지만 세상에 살다 보니 자주 세상과 하느님 나라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합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 중의 하나가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살자는, 앞서 얘기한 대로 땅에서 하늘을 살자는 것인데 하느님 나라를 내가 세상에서 이루려는 영적 성취욕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좋은 목적인데 더러운 영은 이 좋은 명분으로 저를 유혹합니다. 좋은 목적과 명분 안에 악령의 유혹이 숨어있다는 얘기입니다. 

더러운 영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가 이뤄봐! 

거기서 만족을 누려봐! 

그것은 세상 그 어떤 성취보다 고귀해! 

그러니 하느님과 이웃 사랑 때문이 아니라 이런 성취감을 조금이라도 누리려고 한다면 저는 더러운 영과 영합하는 것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세상과 하늘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생입니다. 

이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한다면 프란치스코가 얘기한 대로 기도와 헌신의 영이 꺼지지 않도록 한편으로는 교만과 방심을 경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깨어 기도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렇게 했더니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유튜브 채널 ‘책그림’에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한 오래된 동영상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다른 방향으로 뜁니다. 어떤 차를 보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이것만 보면 이 사람은 분명 도망자입니다. 옷도 그렇게 입었습니다. 그러다 어떤 신사의 멱살을 잡습니다. 분명히 그 사람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을 벽으로 밀어붙입니다. 이때 하늘에서 건축 자재들이 쏟아집니다. 

이 사람은 사실 지나가다가 건축 자재가 쏟아지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 신사를 구해주려 급히 달려온 것입니다. 

현실은 하나지만 그것 때문에 생기는 판단은 여럿이고 그것 때문에 생기는 감정도 시시각각으로 달라집니다. 처음엔 안 좋은 감정을 가졌던 사람에게 나중엔 감동하게 됩니다. 

우리 감정은 어떻게 생길까요? 바로 ‘믿음’에 의해 생깁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감정이 다릅니다. 

얼굴에 모반을 가지고 태어났고 또 한쪽 얼굴에 암까지 들었던 김희아 씨는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반면 내 안의 자아를 믿으면 그 자아가 하는 말을 믿게 되고 그러면 모든 것에 불만을 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루카 4,34)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어떤 감정으로 소리 지르는 게 옳은 일일까요?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 21,9)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왜 어떤 이들은 같은 예수님을 보고 기뻐 뛰지만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싫어할까요? 분명히 어떤 이들은 좋은 이득을 주시는 분으로 믿고 어떤 이들은 자기가 가진 무언가를 잃게 만드는 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죽이고 당신이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나’를 주인으로 섬기는 이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거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를 버리고 싶은 이들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어려움 속에서 당신께 잘못하는 이들을 죽이고 싶은 심정까지 들 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십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들 곁으로 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

이 말씀으로 어머니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한 분으로 모든 서러움이 날아가고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음은 좋은 감정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감정은 ‘믿음’의 산물입니다. 연인을 태우고 배를 타고 물놀이하는데 다른 배가 내 배를 들이받아서 심하게 흔들렸다고 가정해봅시다. 멍청하게 배를 젓는 상대 때문에 화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그 배는 빈 배였습니다. 그냥 떠내려온 배였습니다. 그러면 ‘아, 내가 부주의해서 저 배를 보지 못했구나!’로 감정이 바뀝니다. 앞에서 화가 날 때의 감정은 ‘분명히 저 배에는 멍청한 놈이 타고 있어!’라는 자기 말을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을 믿으면 나쁜 감정이 솟아납니다. 하지만 자신을 믿지 않으면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믿어 모든 일에 감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어린이가 사람을 톱으로 자르거나 통에 넣고 칼로 찌르는 마술을 본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매우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그 모든 것이 눈속임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저 ‘저걸 어떻게 했지?’라며 신기하기만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감정은 믿음에 의해 생겨납니다. 

나는 내 목소리를 믿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믿을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내 목소리를 믿으면 나쁜 감정에 사로잡혀 결국 남도 죽이고 나도 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것이 은총이 됨을 믿어 나도 살고 이웃도 삽니다. 

기쁘지 않은 성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않고 기쁜 감정으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악령은 ‘나를 믿게 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을 멸망시키러 오신 분으로 믿게 했습니다. 그래서 악령에 들린 사람은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뤄집니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나를 주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악령이 되어갑니다. 

더 늦기 전에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사랑합시다. 그러면 그분이 주인이 되시고 그분의 말씀을 믿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감사한 감정이 생겨나고 그러면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나에게 사로잡힌 이들은 나쁜 감정으로 살면서도 좋은 감정으로 구원해주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감정은 믿음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나를 믿던지, 그리스도를 믿던지. 불만족과 불평으로 살든지, 기쁨과 감사로 살든지. 악령에 사로잡히든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든지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마귀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요?

 

“성사 본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 고백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죄 고백할 것도 없는데 왜 고해소에 들어오셨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사 보신 지 얼마나 되셨는데요?”라고 물으니, 석 달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자기 마음의 불편한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석 달 되었다는 말에, ‘얼마 안 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황님도 보름에 한 번 성사를 보신다고 하는데, 석 달이면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이 아닐까요? 사실 많은 이가(저 역시 여기에 예외가 아닙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갔으면서도 안 넘어간 척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1)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니까 
 
2)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3) 아직 젊으니까 
 
4) 이번 한 번뿐이니까 
 

사실 마귀의 유혹은 우리가 방심하는 잠시의 틈을 타서도 불쑥불쑥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주님의 말씀 따라 항상 깨어 있지 않는다면 죄의 침범을 절대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점령되었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도 마귀는 힘을 잃고 도망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정답입니까? 거짓입니까? 당연히 정답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도 이 고백을 해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마귀가 이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따라서 더러운 영이 걸렸다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하면 사람들이 과연 믿을까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도 마귀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하면서 거리를 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시대에도 마귀를 쫓아내는 예식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예식은 주로 랍비들이 담당했는데, 그 시간이 아주 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 한마디 말로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귀의 유혹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마귀와 타협하지 않고, 주님 말씀만을 따라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소통의 답은 존중하는 마음에 있다.

- 템플 그랜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루카 4, 35)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이 있기 마련이다. 가장 소중하신 분을 알게되는 시간이다. 가장 소중한 기쁨을 만나는 시간이다. 소란스러움이 멈추어야 말씀을 통해 치유가 일어난다. 주님 말씀으로 내면의 소란이 사라지는 은총의 순간이다. 

말씀을 건네시는 예수님이시다. 잘못된 삶을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예수님이시다. 말씀으로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아 주신다. 관계를 어지럽히고 인격을 훼손하는 모든 어두움을 바로잡아 주신다. 

일상의 삶이 건강하길 바라신다. 건강성의 회복은 참됨을 되찾는 일이다. 참됨은 일상과 말씀이 분리되어 있지않다. 고귀한 가치를 실천하는 일이다.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내세우는 실천이다. 

참된 사랑은 말씀에 권위가 있다. 예수님의 권위는 착한 마음 말씀의 올바른 이해 거룩한 실천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시끄럽고 어수선한 삶이 사랑의 질서 고요함을 회복하게 된다. 

언제나 삶의 마지막 버팀목이 되시는 주님께 우리의 어두움을 봉헌한다. 마음과 마음이 새로 열리는 시간이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들 본래 마음으로 돌아갈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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