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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28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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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2주일

 

 

2022년 8월 28일 연중 제22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집회서의 저자는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을 것이라 합니다.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가 나아간 곳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28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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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14장 1절, 7-14절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22주일
최용진 레미지오 신부 강론

 

 

2022년 8월 28일 (일)
최용진 레미지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22주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8월 28일 (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당신 삶의 중심은 누구인가요?

 

기원후 2세기 무렵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태양계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른바 천동설입니다. 그리고 약 1400년 뒤에 또 다른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을 뒤집습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지동설입니다. 코페르니쿠스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관념을 뒤집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당신 삶의 중심이 누구인가? 당신인가 아니면 하느님인가?’ 또는 ‘당신은 다른 이들을 다스리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당신이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에 살고 싶은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따르는 이들은 “내가 우주의 중심이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자 합니다. 자신은 선하고 자신의 판단은 올바르다고 여기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합니다. 반면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따르는 이들은 이와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주의 중심’이시고, ‘예수님께서 나의 중심’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삶의 식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시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의 자리는 끝자리입니다.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곳에서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만나며 하느님과 같은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살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은 “초대”라는 단어입니다. 무려 아홉 번이나 되풀이됩니다. 이 단어의 성경 원어는 ‘칼레오’, 곧 ‘부르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부름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첫자리가 아니라 끝자리로 부르셨음을 기억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이 높여주시도록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 1 독서와 복음은 모두 자신을 낮추라고 합니다. 그러니 연중 제22주일은 자신을 낮춤이 주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신을 낮추라고 하시지만 낮춤이 굴욕이면 억지로 낮추거나 시늉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낮춤이 아니고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낮춤이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낮춤은 어떤 것입니까? 크게 두 가지, 겸손의 낮춤과 사랑의 낮춤입니다. 

먼저 겸손의 낮춤을 보겠습니다. 겸손을 좁은 의미로 이해하면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자기 꼬라지를 잘 아는 것입니다. 

내가 뭐 대단한 것 같지만 75억 명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고, 공간으로 치면 어마어마한 우주의 수많은 별 가운데 지구라는 곳에, 그리고 지구 안에서도 대한민국에, 대한민국 안에서도 서울이라는 곳에 사는, 시간적으로는 영원과 비교하면 찰나에 불과한 7-80 년 밖에 못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누구누구보다 높다고 해도 나보다 높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기 꼬라지를 잘 알면 누구도 높이려고 들 수 없으며 그래서 높아지려는 마음을 스스로 경계하여 낮추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원하시는 낮춤은 이런 인간적인 겸손이 아니라 당연히 영적인 의미의 겸손, 곧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이에 딱 맞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이 바로 권고 19번의 말씀입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높일 수 없음은 말할 것 없고, 낮출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처럼 은총도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바다에 물이 다 모여들고 가장 많은 물을 담고 있듯이 사람도 낮으면 낮을수록 많은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높은 곳일수록 흘려버려 물이 고이지 않듯이 높이 오르려는 자는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과 경쟁하지 은총을 구하지 않지요. 

이제 사랑의 낮춤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을 낮춥니다. 

엄마는 기꺼이 아이의 눈높이까지 낮추고, 밑으로까지 낮춰 순종합니다. 사랑하는 남자는 사랑하기 때문에 애인에게 무릎을 꿇고 꽃을 바칩니다. 

그러니 겸손의 낮춤보다 더 자발적이고 더 숭고하게 낮추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 누구의 사랑보다 크기에 가장 낮추십니다. 그것이 필리피 서의 그리스도 찬가의 내용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겸손과 낮춤에 프란치스코는 감격하여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 (형제회에 보낸 편지) 

높은 사람은 혹 인간의 존경은 받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받지 못합니다;. 낮은 사람이 혹 인간의 멸시를 받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반드시 받습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 있느냐, 사람 앞에 있느냐의 문제인데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도록 오늘부터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 사람 때문에 나를 잊어버리니 겸손하다 하더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식사 초대받았는데 그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며 겸손에 대해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문제는 자기가 자신을 낮추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겸손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교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해지는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을 식사에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자신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늙은 마귀가 자기 조카 젊은 마귀에게 사람을 유혹하는 방법을 편지로 쓴 내용입니다. 이 중에서 겸손과 교만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겸손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곧 교만의 유혹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웜우드에게

지난번 네 보고를 받고 제일 걱정되는 건, 환자가 처음 회심했을 때처럼 자신만만한 결심들을 남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듣자 하니 앞으로는 계속 선한 일만 하겠다는 약속도 펑펑 하지 않았더구나. 심지어 한 번 받은 은혜가 평생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매일 매시간 닥치는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매일 매순간에 해당되는 은혜만 바란다니! 상황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야, 네 환자는 겸손해졌다. 미덕이란 인간 스스로 그것을 가졌다고 의식하는 순간에 위력이 떨어지는 법인데, 겸손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지. 환자의 심령이 진짜 가난해진 순간을 잘 포착해서 ‘세상에, 내가 이렇게 겸손해지다니!’ 하는 식의 만족감을 슬쩍 밀어 넣거라. 그러면 거의 그 즉시 교만-자신이 겸손해졌다는 교만-이 고개를 들 게야. 

혹시라도 환자가 위험을 눈치채고 이 새로운 형태의 교만을 다잡으려 들거든, 이번엔 그런 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들라구! 이런 식으로 하면 네가 원하는 많은 단계들로 나아갈 수가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써먹지는 마라. 혹시라도 환자의 유머감각과 균형감각이 깨어날 시에는, 너를 간단히 비웃고 잠자리에 들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너는 환자가 겸손의 진정한 목적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단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성격에 대해 특정한 형태의 의견(즉, 낮은 평가)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라고. ‘겸손이란 내 재능의 가치를 내가 실제로 믿고 있는 수준보다 낮게 보려고 애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꼭꼭 박아주거라.

실제로도 인간의 재능은 저들의 생각만큼 가치 있는 게 못 되지만, 그것은 중요한 점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어떤 자질에 대한 진실보다 평가를 더 중요시하게 함으로써, 미덕의 싹이 나타나는 족족 거짓과 가식의 요소를 그 중심에 주입하는 것이지. 이 방법을 통해 수천 명에 이르는 인간들이 ‘겸손이란 아름다운 여자가 스스로 못난이라고 믿으려고 애쓰며, 명석한 남자가 스스로 멍청이라고 믿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겸손은 낮은 위치에서 나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KBS 2000년 9월 5일에 방영된 ‘내 남편은 두 살 – 정신연령 2세 남편과 결혼하여 살게 된 김영숙 씨 사랑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김영숙 씨(42)는 30대 중반의 요셉이라는 남편과 함께 반지하 월세방에서 삽니다. 그런데 남편이 정신연령이 2세 수준이기에 텔레토비 인형을 좋아하고 밥을 제일 좋아합니다. 한 시도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 씨는 몸은 성인이지만 말 그대로 아기이기 때문입니다.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김영숙 씨는 공부 잘하는 오빠만 챙기는 집안 분위기에서 항상 소외되고 매 맞는 아이였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오셔서 아랫목을 차지해 윗목 추운 곳에서 쭈그리고 잠을 자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입이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그런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남자아이들은 괴롭힘 감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영숙 씨는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부모님께 선언합니다. 아버지가 그것에 스트레스받아 중풍이 왔습니다. 몸 한쪽이 마비된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허락해 주어서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녀원에서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수녀님을 보고 얼굴 이상하다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영숙 씨는 수녀원을 나와서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소외되고 매 맞아 항상 얼굴에 상처가 있는 요셉에게 관심을 둡니다. 자기 처지와 같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요셉을 때리는 원장 때문에 김영숙 씨는 그냥 요셉이를 데리고 나와버립니다. 

하지만 갈 데가 없었습니다. 직장을 얻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지만 두 살 어른을 데리고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이가 배고프다며 발작을 일으켰고 도움을 청하러 간 사이에 요셉이는 사라졌습니다. 김영숙 씨는 사방팔방으로 요셉이를 찾아다녔고 한 시설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되돌아 나오는데 요셉이가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매달립니다. 마음이 약해진 김영숙 씨는 요셉 씨를 데리고 다시 나옵니다.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조금이라도 얻으려면 혼인신고를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혼인신고를 하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또 쓰러지셨습니다. 하지만 김영숙 씨는 굳건히 요셉 씨와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요셉 씨는 얼굴이 많이 밝아졌고 이젠 장인어른을 업고 병원에 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김영숙 씨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겸손하여지려고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가장 가난한 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잊게 되어 겸손해진 것입니다. 아무리 겸손해지려고 노력한다고 두 살 지능밖에 안 되는 사람과 혼인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주위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합시다. 그들이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없기에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신데도 인간을 당신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란 생각을 잊으셨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담가버려야 합니다. 내가 죽고 사라질 때,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이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돈과 사치품, 외모, 권력 등 달성하기 어려운 욕망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을 이룬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질투심도 생기고 또 좌절감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행복해지려는 생각이었지만 전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에 답해보십시오. 
 
“하루 중 언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하나같이 소소한 일상을 언급합니다. 성당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시간, 자녀와 함께 있는 시간, 산책, 음악감상, 맛있는 음식 먹기, 독서 등등…. 이때의 놀라운 점은 남과 전혀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행복할까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묻는 말이 자신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커다랗고 대단한 곳에 행복이 있지 않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우리의 겸손함에서 행복 찾기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고, 겸손한 삶을 강조하셨으며, 마지막 순간에서도 가장 겸손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는데,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따라 얼마나 겸손한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생활에서 식사 예절은 상당 엄격했습니다. 잔치가 크면 클수록 예절은 더 엄격해져서 식탁에 앉는 순서는 손님들의 지위나 신분에 따라 상하가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보고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정해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과시에 몹시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초대되면 최대한 윗자리에 앉고자 했습니다. 윗자리에 앉으면 많은 사람이 와서 인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품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발버둥 치며 탐욕을 부린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을 낮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위를 통해 순간의 만족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서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릴 수 있도록, 일상 안에서의 작은 행복에 감사하는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겸손함에서 나오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하느님으로부터 보답받을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 모든 물이 바다로 향하는 건 바다가 낭만적이거나 고향 같아서가 아니라 그저 낮아서다. 정을 느끼며 살고 싶다면 그대 바다처럼 낮아져라.

- 이수동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루카 14, 13)

 

가난한 이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주님이시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하느님께 하느님의 자리를 돌려드리는 것이 우리들의 겸손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은 언제나 자리해야 할 곳에 저마다 자리하고 있다. 계곡물도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린다. 사랑을 위해 낮은 자리로 오신 예수님이시다. 
사랑의 가치는 낮아짐의 가치이다. 낮아짐의 기쁨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행복이다. 우리자신을 돌아보고 낮추면 모든 것은 행복이 된다. 윗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행복이 아닌 거꾸로 끝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참된 행복이다. 끝자리의 행복 끝자리의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함께하기에 행복하고 다르지 않기에 기쁜 것이다. 

삶이란 낮아지는 행복을 깨닫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겸손의 자리이며 사랑의 자리이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가까이 있다. 낮아지기에 가까이 있다.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길은 낮아지고 낮추는 사랑의 기쁨이다. 하느님께서 위로해주시고 하느님께서 충만하게 하신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먼저 낮아지시는 행복의 잔치로 우리를 살게하신다. 낮아짐이 거품을 빼는 사람의 참된 길이기 때문이다. 낮아지는 삶이 새로워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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