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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29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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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2022년 8월 29일 (월)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당신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유다인들에게 말하라시며, 그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생일에 아내 헤로디아의 딸이 청한 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선물로 줍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29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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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복된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성자의 탄생과 죽음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를 본받아 저희도 끝까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르코 6장 17-29절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에 

17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유상혁 세례자 요한 신부 강론

 

 

2022년 8월 29일 (월)
유상혁 세례자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8월 29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우리가 머물러 살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인 요한은 부당한 죽음을 변호할 어떤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증언의 삶을 살아온 요한의 사명의 끝은 순교였습니다. 순교는 가장 완전한 증언입니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증언하다’는 곧 ‘순교하다’입니다. 

어제 주일 복음 말씀은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끝자리에 가서 앉고, 또 우리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려거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과 같이 우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루카 14,7-14 참조).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공교롭게도 첫자리에 앉으려는 이들이 벌이는 잔치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 잔치는 임금인 헤로데가 베푼 잔치였고, 여기에 초대된 이들은 저마다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궁궐에서 벌어진 헤로데 임금의 잔치 이야기 다음에 곧바로 광야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잔치를 소개합니다(6,30-44 참조). 이렇게 하여 두 잔치를 대비시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세례자 요한의 잘린 머리로 끝나는 죽음의 식사라면, 이어지는 이야기는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배불리 먹은 예수님과 군중의 생명의 잔치입니다. 이는 삶의 기준에 따라 그 결과가 정반대로 나올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곧 우리의 본보기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우리가 누구를 본받아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헤로데의 궁전에는 부와 권력, 교만과 허영, 음모와 계략, 증오와 원한, 불의 그리고 쟁반 위의 잘린 머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광야에는 동정과 연민, 사랑과 친교 그리고 배불리 먹고 남은 빵과 물고기로 가득 찬 열두 광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머물러 살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에게는 추종자 누구에게는 선구자

 

오늘 죽일 감사송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이렇게 칭송합니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그러니까 6월 24일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이 이 감사송 내용 가운데에서 선구자 요한이 태어날 때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음을 기념하는 축일이라면 오늘 축일은 이 감사송의 내용 중에서도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선구자로서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음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세례자의 죽음은 주님을 증언하다 죽은 것 같이 보이지 않고, 헤로데의 불륜을 고발하다가 헤로디아에 의해 허망하게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는 주님을 증언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저 인간적으로 한 인간을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듯 하느님과 전혀 상관없이 그러니까 인간적인 사랑으로 충고도 하고 인간적인 정의감으로 질책하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에게 바른 소리를 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과 전혀 상관없이 그저 인간적으로 입바른 소리를 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오늘 축일의 의미이고 감사송의 의미입니다. 주님의 선구자가 아니었다면 요한은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면 똑같은 바른 소리인데 그것이 사랑 때문에 하는 것과 정의감 때문에 하는 것의 차이가 있듯이 하느님 생각하며 하는 것과 그저 인간적으로 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나를 위해서는, 나에 대한 불의가 아닌 한, 반대할 이유가 없고, 불이익과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반대할 이유는 더더욱 없으며 실제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내게 저촉되지 않는 한 침묵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죽음은 주님 때문에 그리고 진리이신 주님을 위해 불의를 고발하다가 박해를 받아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구자의 평행 이론과 같습니다. 요한이 주님의 선구자라면 주님의 운명과 다를 수 없고, 주님보다 앞서 박해와 수난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한이 우리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축일을 지내는 것도 불편하며 우리는 요한처럼 주님의 선구자가 아니니,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강변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처럼 주님을 위해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강변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요한처럼 주님의 선구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선구자가 아니라고 발뺌은 할지라도 주님의 추종자인 것에서 발뺌할 수는 없고, 주님의 선구자는 아닐지라도 다른 누구의 선구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라면 이 축일을 지내며 차라리 사랑이 없다고 고백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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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 나의 행복감을 상승시킬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방법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라면 어떨까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어떤 도구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를 행동 과학 교수인 폴 둘런이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뺄셈’이었습니다. 즉, 내가 없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의 아쉬움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고, 아직 갖지 못해서 행복하지 못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있어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게 된 것은 20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미사를 봉헌할 수 있어서 주님을 통해 얻게 되는 위로와 힘을 공적으로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어떨까요? 편하게 신앙 생활하는 지금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신앙의 차원만이 아닌, 일상 안에서도 ‘마음의 뺄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 가족, 친구, 직장과 일, 삶의 단편 모두가 나의 행복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임금은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의 덧셈’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것만을 떠올렸기 때문에 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떵떵거릴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여기서 조금만 더 가지면 가졌지, 잃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었지만, 결국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서 헤로디아의 딸에게 주게 되게 되지요. ‘마음의 뺄셈’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일 잔칫날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서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한 것입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헛된 맹세를 합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이때 세례자 요한의 목을 청하지요.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 앞에서 한 말 때문에, 그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서 헤로디아의 딸에게 줍니다. 헛된 맹세나 하는 임금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었을테고, 계속 싫은 말을 하는 세례자 요한을 제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계속 더하고만 싶었기에 후회할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 것은 빼고, 하늘 나라의 것은 더하는 데에서 행복이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결국 당신이 받은 사랑은 당신이 베푼 사랑과 같아요.

- 폴 메카트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마르 6, 24)

 

먹먹한 세례자 요한의 아픈 죽음이다. 꿈틀거리는 욕망이 의기투합하여 가혹한 상황을 만든다. 모두가 소중한 생명의 주인공들이다. 성 요한 세례자의 삶을 기억해야 한다.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생명이다. 아름다운 만남이길 기도드린다. 서로의 의미를 묻는 시간이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이 우리의 죄를 안고 간다. 얼마나 많은 속죄양들이 필요한 것인가! 

하느님의 생명에 대한 예의가 참으로 필요하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우리들이 될 것이다. 잘라버릴 수 없는 성 요한 세례자의 맑디맑은 정신이다. 멈추게 할 수 없고 허물어 버릴 수 없는 수난과 사랑이다. 

수난을 통해 맑아지고 죽음을 통해 깊어지는 삶의 의미이다. 요구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회개이다. 의로운 이들의 수난이 우리의 더러운 욕망을 깨끗이 씻어주고 있다. 사랑 안에서 서로의 의미를 다시 묻는 하느님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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