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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2022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유하시며,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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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25장 1-13절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장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 강론
2022년 8월 26일 (금)
장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파비아노 레베쟈니 파비아노 신부 강론
2022년 8월 26일 (금)
파비아노 레베쟈니 파비아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꺼지지 않는 등잔의 불
오늘 복음은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신랑은 그리스도이시고, 열 처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저마다 그리스도의 신부고 교회입니다(에페 5,22-32 참조). 슬기로운 처녀들은 모범적인 신앙인들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언뜻 보기에 착하기는 커녕, 약고 야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슬기로운 처녀들의 지인이고 친구였을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에 기름이 떨어지자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그것을 좀 나누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 요청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이 기름은 다른 이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뜻합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의 깨어 있음을 대신해 줄 수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한결같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등잔의 불은 어두운 밤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충실히 사는 삶을 상징합니다. 등불의 기름은 행실이 동반되는 지속적인 믿음의 삶입니다. 이 기름은 뒤늦게 급히 마련될 수 없습니다. 날마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가난한 형제들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 목표인 우리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파견되어서 해야 할 일이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오늘 독서의 말씀은 좋은 가르침이고 지금의 저에게는 걱정을 덜어주고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음 선포와 세례 주는 것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복음 선포보다 세례에 집착하기 쉬운데 바오로 사도는 오늘 세례의 욕심을 부리지 말고 그저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내 복음 선포의 마침표로 세례를 받게 하고픈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복음 선포로 누군가 세례를 받았다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싶고, 내가 이룬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싶은데 이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지역 사회 복음화를 목표로 <여기 선교 협동조합>을 하고, 협동조합 사업의 하나로 식당도 하는데 세례 주는 것이 식당의 가시적인 성과의 하나라면 그런 면에서는 아무 성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고 헛발짓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매스컴을 타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신부가 하는 식당이 매스컴을 타서 후원도 받고, 그 좋은 일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라는 제안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이 매스컴을 탈만큼 그만큼 훌륭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설사 그만큼 훌륭한 일이고 그래서 매스컴을 탈 수 있을지라도 저는 그러고 싶지 않고 과거 북한 일을 할 때도 그런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좋은 일을 널리 알리고 그럼으로써 좋은 영향력을 세상에 주라는, 주님께서도 등불을 됫박에 덮어두지 말고 등경 위에 올려놓아 세상을 비추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하라는 설득을 받지만 저는 그 좋은 명분 뒤에 숨어있는 유혹을 경계합니다.
저는 매스컴을 탈 때 그것을 제 영광 삼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저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때 저는 성공의 유혹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기에 하는 하느님의 사업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때 은근슬쩍 그 사업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북한 평양에 평화 봉사소를 위한 우리 계약 조건을 북한이 수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너무 기뻐 경당으로 달려가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때 문득 깨달음이 왔습니다.
내가 왜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가? 내 뜻을 그리고 내 사업을 주님께서 이루어주셨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당신 사업을 내가 도구가 되어 이루어드린 거라면 주님께서 오히려 내게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 사업을 내 것이라고 순간 착각하고 감사를 드린 것 아닌가?
이처럼 어떤 일이 가시적인 성과와 성공을 거둘 때 그것이 하느님을 위한 것도 이웃을 위한 것도 아닌,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되기 쉬운데 세례 주는 것도 그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우리에게는 사랑이지만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따름은 그들이 볼 때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의 목표라면 세상이 볼 때 어리석을지라도 십자가라는 사랑을 목표로 삼고 그것이 우리의 복음이라고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3개월 시한부 선고받고 바뀐 인생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티는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안효정 간호사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러 경우를 보았다고 합니다.
한 어르신은 폐렴으로 오랜 병상 생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분에게 다녀가시는 분이 없었다고 합니다. 젊으셨을 때 가족에게 그렇게 못되게 해서입니다. 상태는 돌아가실 수밖에 없는데 버티고 계시는 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안 간호사는 청력은 살아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귀에 대고 크게 “할아버지, 부인이 보고 싶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눈을 뜨시더니 두 번 깜빡이더라는 것입니다.
안 간호사는 수소문하여 부인과 자녀들을 찾아 다녀가게 하였습니다. 부인이 그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내가 다 용서할 테니 편안히 가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고는 바로 임종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분은 90세가 넘은 할아버지셨습니다. 가끔 친지들과 지인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거의 산 송장처럼 30년을 병원에서 지내고 계셨다고 합니다. 간호사들은 자녀들이 안 다녀간 것을 알고는 연락이 끊긴 미국에 사는 아들이 다녀가게 하였습니다. 2주 만에 아들이 다녀갔고 한 시간도 채 안 되어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죽음 직전에야 무엇이 부족한지 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리 준비되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끝까지 그런 준비가 필요 없다고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불교 신자였던 이지은 씨는 말기암으로 투병하는 남편을 보살피며 병원에서 함께 입원하였던 다른 암환자들의 임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언가를 목격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남편과 함께 입원하고 있던 그 환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의 이름은 정자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눈의 실핏줄이 더 터져서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고 있었고 몸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있어서 천만 하나 덮어놓은 상태였으며 온몸의 땀구멍에서 소변이 빠져나와 주위에서 소변 냄새가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분의 아내와 밖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도 못 하던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정자야, 정자야! 무서워, 정자야!”
그리고 그 아내의 목을 팔로 두르더니 “나 무서워서 혼자 못 가, 함께 가자!”라고 하며 놓아주지 않더랍니다.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이지은 씨는 갖은 방법을 써서 아내를 그 남편으로부터 떼어놓았습니다. 계속 그런 두려움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자기 남편의 귀를 막아주어야 했습니다. 보통 심박이 30이하로 떨어지면 사망하는데 그분은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사흘이나 버텼다고 합니다.
이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지은 씨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사람처럼만 죽지 않으려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남편은 도박과 외도 등으로 빚을 잔뜩 지고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환자처럼 남편도 아내를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위에 무서운 사람들이 둘러섰다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남편의 눈은 처음 보는 공포에 질린 눈이었습니다. 이지은 씨는 불교 신자였음에도 ‘이 사람 지옥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병원이기에 무조건 사람들을 불러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언니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가시기 2주 전에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반을 굶어 뼈만 남았고 온몸이 돌처럼 굳어있었는데도 맥박 30이 되었을 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셨습니다.
[출처: ‘말기암 임종 환자들의 죽음을 보며 겪은 충격적인 사실’, 유튜브 채널, ‘아빠품안에’]
오늘 복음에는 현명한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이 나옵니다.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무언가를 준비했다면 현명한 처녀들이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미련한 처녀들입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이 죽음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죽음 앞에 가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저는 할머니의 죽음으로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묵상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본 장례미사 중 가장 많은 신자가 참석한 미사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유학하며 한 동네에서 행해진 장례식입니다. 마체라타라는 곳의 500년 된 커다란 성당에서 행해진 장례미사였습니다. 보통 주일 교중미사보다 그 장례미사에 다섯 배 정도의 하객이 들어찼습니다. 당시 한여름이었고 기온이 40도 정도였습니다. 성당에는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시장님부터 시작하여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이 미사에 참례한 느낌이었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성당에 빼곡히 사람들이 서 있었고 문을 열어 밖의 뙤약볕 아래도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공동묘지까지 행렬을 하는데 그 더운 날씨에도 아무도 떠나지 않고 마을을 가로질러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날 장례를 치르는 분은 성직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여자 신자였습니다. 3년 전에 암으로 시한부 3개월을 선고받은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도 평소에 하.사.시.를 읽었다고 합니다. 시한부 선고받고는 자신의 집에 신자들을 초대하여 성경을 읽고 생활 나누기하였고 늘 하던 대로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 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자매는 길을 지나가다 마주치면 언제나 먼저 달려와 인사하였고 신앙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저도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찾아가 인사를 드렸는데,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그분은 저를 알아보고 찾아와주어서 고맙다며 천사의 미소를 보내셨습니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아내가 돌아가시기 2~3일을 제외하곤 3년 동안 기적적으로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렇게 3년 동안 가진 것을 다 주며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은인이 되었기에 마을 사람들이 다 그 장례미사에 참례하여 그분이 가는 길에 함께 한 것입니다.
그 자매가 특별한 삶을 산 것도 아닌데 시한부 선고받고는 더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 안에서 탐욕과 무절제와 같은 안 좋은 욕망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며 방탕한 삶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 데 기름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자매는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일 수 있고 죽고 나면 그리스도를 심판관으로 만나야 함을 되새긴다면 내 마음 안의 기름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아쉬움 없이 행복하게 살았노라 말할 수 있습니까? 미소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기름이 가득 찬 등잔을 들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도박하는 사람의 승률은 얼마나 될까요?
실력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아마 도박에서 이기는 사람보다 지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 도박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본전 생각과 막연한 희망 때문입니다. 본전까지만 찾으면 그만하겠다고 하지만, 본전 찾기 전에 패가망신 당하고 말지요. 또 본전을 찾아도 더 딸 것이라는 잘못된 희망에 매달려서 쫄딱 망하고 맙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분은 절대로 도박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이런 도박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돈이 아닌 시간을 가지고 하는 도박입니다.
“돈에 여유가 생기면 봉사할 거야.”, “시간이 나면 성당에 열심히 다닐 거야.” “은퇴하면 가족과 열심히 함께할 거야.” 등등 우리는 막연히 시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지금 하지 않고 뒤로 미룹니다. 시간을 가지고 도박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되찾을 수 없는 돈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거의 100%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에 대해서 도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 나중에’라는 말로 지금을 소홀히 한다면, 큰 후회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미루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자주 말씀하셨지요. 특히 깨어 기다리라는 교훈을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확실한 이해를 위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열 처녀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는 야단스러울 만치 온 동네가 함께 기뻐합니다. 혼인 며칠 전부터 밤에 횃불을 밝히고 춤과 노래로 밤을 지새웁니다. 신랑이 자기 집에서 친구들과 잔치를 벌이고 혼인날 저녁에 신부 집을 찾아가 결혼합니다. 그래서 언제 올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신랑 집의 잔치가 끝나야만 신부 집에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신랑이 제때 오지 못하고 꽤 늦어졌다는 것입니다. 신부 측 들러리들은 신랑 측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들고 기다리는데, 이 등은 약 15분가량 있으면 꺼집니다. 그래서 신랑이 올 때를 잘 맞추든가 여유의 기름을 준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할 일에 늘 대비하는 성실한 사람과 그저 그때를 안일하게 넘기는 게으른 사람으로 나뉩니다.
성실한 사람은 잔치에 들어가고 게으른 사람은 문을 두드리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성실히 주님의 나라를 준비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나라가 아직 오려면 멀었다면 게으르고 불성실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역경은 당신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할 용기를 준다.
- 앤디 그로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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