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9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3주일 -
2022년 9월 4일 연중 제23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주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면 누가 그분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종이 아닌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 달라고 옥중에서 부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본기도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14장 25-33절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구본국 베난시오 신부 강론
루카 14장 25-33절
2022년 9월 4일 (일)
연중 제23주일
구본국 베난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루카 14장 25-33절
2022년 9월 4일 (일)
연중 제23주일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이유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 당신을 뒤따르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족과 자기 목숨마저 미워하고 모든 소유를 버린 채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가족을 등지고 스스로를 괴롭히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데 머뭇거린 제자나(마태 8,21-22 참조)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여 떠나 버린 부자 청년처럼(마태 19,16-22 참조),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데 방해되는 무엇인가를 마음 한 켠에 쌓아 둔 채 그것에 의지하며 위로를 찾는 이라면 그분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버리라고 하신 “자기 소유”란 우리의 발목을 잡는 온갖 집착, 아집과 교만, 이기심과 재물, 형식적인 신앙생활일 터입니다.
건축물을 짓거나 전투에 나서는, 세속적인 일조차도 매우 치밀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할진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이가 치열한 고뇌와 희생 없이 어찌 그것을 바라겠습니까? 타성에 젖어 허울뿐인 제자의 됨됨이 속에 거저 얻어지는 믿음은 없습니다.
나이 든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옥바라지를 위하여 꼭 곁에 두고 싶어 하였던 오네시모스를 기꺼이 돌려보냈듯이(제2독서 참조), 우리도 자신의 생각과 계획에 갇혀 살지 않도록 늘 경계하며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제1독서 참조).
주님 때문에 무엇인가를 용기 있게 버릴 때 찾아오는 ‘자유’에 맛 들여 갈 때, 비로소 제 십자가를 힘껏 끌어안고 참제자가 되어 그분의 뒤를 따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29-30).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실패하는 자와 성공하는 자
우리 인간에게는 세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1.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
2. 주님을 따르다가 실패하는 자
3. 주님을 끝까지 잘 따르는 자입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왜 따라야 하는지를 모르기에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르다가 실패하는 자는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모르고 출발했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인데 그렇다면 끝까지 잘 따르는 자는 왜 그리고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다 알고 따른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주님을 따라 길을 가는 것으로 얘기가 시작되는데 그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둘째는 자신마저 미워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셋째는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고.
이것은 복음의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하나는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따르는 것.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마저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작은 형제들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하지요.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과 정결 안에 소유 없이 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한 마디로 우리의 삶은 ‘Sequela Christi’, 그리스도를 따라서 하느님께 가는 삶인데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느님께로 가고,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떠나가는 것이기 때문이고, 떠나가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습니까? 버리지 않고 그러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떠날 수 없고, 떠나지 않고서 갈 수 없잖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따르겠다고 하면 나서지도 못하겠지만, 설사 따라나섰다고 해도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날 것입니다.
전부터 산티아고 걷기가 유행인데 그것을 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짐을 많이 줄인다고 줄여서 갔는데도 걷다 보면 너무 무거워서 하나씩 하나씩 거의 다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을 갖고 걷게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삶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고, 헤아려 보라’고 하십니다. ‘앉아서’라는 말씀은 무턱대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이고, 꽃길이 아니라 십자가 길을 갈 각오가 설 때 떠나라는 말씀이지요.
여기서 품게 되는 의문이 당연히 있습니다. 십자가 길을 갈 각오가 서지 않으면 떠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것은 따라도 되고 안 따라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수도자가 되는 것은 돼도 되고 안 돼도 되며,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는 것은 돼도 되고 안 돼도 되지만 주님을 따르는 것은 따라도 되고 안 따라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으니 따를 수도, 안 따를 수도 있지만, 안 따르면 자기 손해이고 그것은 그저 돈 몇 푼 손해가 아니라 ‘행복 손해’이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는 엄청난 불행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라고 한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그도 주님을 따를 생각이 없었지만, 주님 친히 회개를 시작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출세 곧 세상을 향해 나아가던 그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주님이었습니다. 아시시로 돌아가면 당신 뜻을 알려주시겠다는 말에 따라 아시시로 돌아간 그에게 주님께서는 먼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은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줬지만, 나병환자를 사랑하는 것, 곧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을 그렇게 보낸 그에게 주님께서는 용기를 주셨고 껴안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그는 고통을 사랑하고 십자가의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를 각오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도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렇게만 하면 정한 목표에 100% 도달한다.
켈리 최는 2022년 연 매출 6,000억을 기록한 켈리델리라는 대형마트에서 초밥 도시락을 파는 기업의 C.E.O입니다. 켈리델리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11개국 1,200개 프랜차이즈 매장을 지니고 있고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도 이렇게 급속도로 성장한 회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과 10년 전만 해도 최 회장은 첫 사업 실패로 10억 원의 빚더미에 눌려 하루하루 비참하게 살고 있던 노처녀였습니다. 그녀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6남매 중 셋째 딸이었고 가난했던 집을 일으키겠다고 서울로 상경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의류공장에 다니며 ‘세계적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라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목표를 위해 유서까지 써 놓고 일본으로 건너가 돈을 벌면서 대학에 다녔습니다. 다시 패션의 중심인 프랑스로 무작정 건너갔습니다.
학교 졸업 후 친구와 함께 동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40세가 넘었음에도 자신은 빚만 지고 있었고 거울을 보았을 때 흉측한 괴물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꿈을 좇아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마흔이 넘은 최 회장은 인생을 포기하려다 고생하고 계신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다시 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문제점을 발견하였습니다. 바로 자신이 목표만 정했지, 그것을 위한 에너지를 다른 곳에 너무 많이 소비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최 회장은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세 가지 습관을 포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는 부자들이 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부자들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첫 번째로 정한 것은 그 좋아하던 ‘술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사실 저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술을 끊었어요. 제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술을 마시고 실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술을 마시는데 빼앗기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의 직업은 민박집 주인이자 가이드였어요. 게다가 동시에 켈리델리 사업도 준비 중이어서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따져보았습니다. 한 번 술을 마시면 최소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세 번이면 여섯 시간이었어요. 이 시간이 저는 정말로 아까웠습니다. 그 뒤로 저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어요. 제가 잘 따르던 선배 언니는 저를 놀렸습니다. ‘켈리야, 보통 사업을 시작하면 거래처 사람들하고 술 마시고 친분을 쌓기 시작하는데, 너는 반대로 술을 끊네? 그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저는 인맥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직, 실력으로 승부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런 생각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빚만 늘어가고 직원들 월급날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어요. 그때 딱 소주 한 잔만 마시면 살 것 같았죠. 어떤 때는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너무 괴로울 때가 있었습니다. 정말 그럴 때는 술 한 잔이 간절했어요. 하지만 이럴 때도 저는 술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한 잔을 마시면 두 잔이 되고 두 잔을 마시면 세 잔이 되고 제 의지는 사라져 갈 것만 같았죠.
지치고 힘들 때는 다짐했습니다. 나와의 약속을 절대로 번복하지 않겠다고 말이죠. 이렇게 술을 마시지 않자 언니들은 저를 부르지 않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저는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명료한 정신으로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술을 끊은 것은 저에게 신의 한 수였습니다.”
포기했던 습관 두 번째는 ‘드라마와 게임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자기 관리의 기본은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고 스스로 발전시키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시간이 조금만 여유가 있어도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곤 했습니다. 이 두 개의 문제는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아는 성공한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기 시간을 확보했고, 그 시간에 책을 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 시간의 활용법은 저와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었죠. 요즘 사람들에게는 특히 SNS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하는 것 중 하나예요. 이런 것들의 특징은 맺고 끊는 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 번 빠져들면 한두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죠. 자신의 사업이나 개인의 발전과 직결되어 있다면 괜찮아요. 하지만, 오락적인 요소가 크다면 분명 좋은 시간 활용법은 아닐 거예요.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 확보를 위해서라도 SNS 사용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이 자기 계발을 하는 게 좋아요.”
세 번째 끊은 것은 ‘불필요한 모임’입니다.
“한국이나 유럽이나 모임은 매한가지입니다. 모임의 핵심은 인맥 관리예요. 사람이 모이면 새로운 에너지가 창출되고 기회의 장이 열립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저는 모임에 참석하는 게 성공을 방해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생각했던 것이었죠.
사업가인 제가 모임을 포기했다고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럼 인맥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인맥 관리를 하지 않아요. 인맥은 관리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나는 켈리랑 친구가 될 거야,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라고 얘기한다면 당연히 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친구 사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누군가가 저를 인맥 관리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저는 그 사람에게 관리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저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 반대로 인맥으로 이용하려는 사람, 이것을 저는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에요.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맥을 관리하지 않아요. 저는 성공을 위해서 이렇게 세 가지를 끊어냈습니다.”
[출처: ‘바닥에서 6,000억 부자가 되기까지 ‘가장 먼저 갖다버린 습관 3가지’, 유튜브 채널 ‘동기부여학과’]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투자개발 회사의 대표이자 전미 13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의 저자 게리 캘러가 쓴 자기계발서인 『원씽』(The One Thing)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가치, 단 한 명의 사람, 단 하나의 아이디어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원씽 The One Thing’을 찾아라. 그것이 당신의 커리어가 됐든, 비즈니스가 됐든 가정생활이든, 인간관계이든 삶의 각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아 몰두할 때, 일에서의 성공과 삶에서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켈리 최 회장도 이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위 세 가지를 끊고 에너지를 모으기 전까지는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27)
공사를 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돈은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흥청망청 살아서 돈도 없으면서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면 결국 있는 돈도 날려버리게 될 것입니다. 혹은 전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질 것 같으면 싸움을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목표입니다. 이 목표에 도달하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를 끊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소유한 재물이나 애정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의 저자 아른힐 레우뱅은 ‘선장’이라고 부른 자아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믿음, 의사가 준 희망, 경찰관이 준 사랑 등으로 선장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0년 만에 조현병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공부하여 최고의 정신과 의사가 됩니다.
두 대의 버스에 동시에 탈 수는 없습니다. 다른 것을 타려면 지금 탄 것은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아라는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뜻으로 내 뜻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시지프스 신화가 있습니다. 시지프스는 신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영원히 돌을 산꼭대기로 굴려야 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명에 불복종하게 만드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을 가지고 목표를 이루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 돌을 버려야 합니다. 나 자신을 죽이게 하지 못하는 목표는 그것이 어떤 목표이건 가짜 목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천주교인이요.
복음을 읽다 보면,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나자렛 사람’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 ‘노쯔리’와 아람어 ‘나즈란’로 쓰는데, 사실 이 단어는 예수님을 비하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즉, ‘나자렛 것’, ‘나자렛 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비하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판에 예수님께서 활동을 멈추셨을까요? 이런 비판이 늘어남에 따라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현대의 정치인들도 자기의 지지도가 떨어지게 되면, 활동에 제약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활동을 전혀 멈추시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위협까지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판단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윤공희 대주교님의 ‘북한교회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공산 치하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 죽음의 위험에서도 신자들과 함께하기 위해 피난 가지 않는 신부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순교자들이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고백했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의 지금 삶 안에서는 분명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인답지 않게 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랑스럽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모습입니까?
많은 사람이 주님을 따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제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곧 올 것이고,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수난과 죽음을 겪은 다음에야 돌아올 영광이었습니다. 즉,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이 어렵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지요.
사실 자기 부모,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그리고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에 정말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에 ‘부모에게 효도하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유교 사회 뿌리가 깊은 우리만큼 조상의 핏줄을 귀하게 여기는 유다인에게 효도는 중요한 사상이었습니다.
‘미워하다’라는 표현은 ‘뒤로 돌리다, 2차적으로 생각하다’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결국 극한 상황에서 필요하다면 부모까지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 다음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고, 궁극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탑과 전쟁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맡은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심사숙고를 요구하는 진지함과 어떤 난관도 참고 견디어야 하는 인내심이 요구됨을 전해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데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지혜로움과 주님께 대한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를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
- 톨스토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33)
삶의 목적과 의미를 다시 묻게된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이다. 많이 수유할수록 가야 할 방향을 잃게 된다.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는 우리들 삶임에도 소유의 늪에 허덕이는 우리들이다.
소유가 우리 삶을 구원하지 못한다. 가져야 할 것은 건강한 믿음의 여정이다. 소유속에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 복음의 실천은 소유를 버리고 나누는 기쁨이다. 가장 좋으신 기쁨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이시다.
새로운 탄생은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다. 삶을 가로막는 소유이다. 영원한 삶을 위한 버림이다. 오히려 소유를 버릴 때 지켜지는 따름의 성숙한 관계이다.
인격의 완성은 소유를 버리고 십자가를 사랑하는 십자가의 여정이다. 이 십자가 마저 놓아버리고 하느님께로 가야 할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새로운 삶을 위한 버림이며 따름이다.
우리의 삶이란 하느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게되는 하느님을 향한 생명이다. 삶의 목적과 삶의 의미는 소유를 버릴 때 깨닫게되는 은총이다. 소유를 버리는 것이 삶의 은총이다. 하느님을 위해 포기하고 버리는 것이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년 9월 7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7 |
---|---|
22년 9월 6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6 |
22년 9월 5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5 |
22년 9월 3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3 |
22년 9월 2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2 |
22년 9월 1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9.01 |
22년 8월 31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2.08.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