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6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6.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9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

 

 

2022년 9월 6일 (화)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거는 이들을 꾸짖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밤새워 기도하시고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 열둘을 뽑으시고 사도라고 부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9월 6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6장 12-19절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승현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6일 (화)
조승현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9월 6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밤새워 성부께 기도하여 뽑으신 사도들이 이처럼 보잘것없는 이유.

 

예수님께서는 자주 산에 오르시어 따로 기도하셨는데(마태 14,23; 마르 6,46; 루카 9,28 참조), 특히 밤새워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하셨다는 언급은 오늘 복음에만 나옵니다.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뽑아 사도로 세우신 일은 그분께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도’(apostolos)라는 그리스 말은 ‘파견하다’라는 뜻의 동사(apostello)에서 온 것으로 ‘파견된 자’를 뜻합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제자’라고 부른다면, 사도는 복음 선포와 치유와 구마를 위하여 파견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동참하는 특별한 이들입니다(마태 10,1-4; 마르 3,13-15 참조).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사도들 가운데에는 소박한 어부들은 물론, 동족에게서 외면당하던 세리, 무력으로 저항하던 열혈당원, 심지어 뒷날 그분을 팔아넘길 배신자도 있었습니다. 

밤새워 성부께 기도하여 뽑으신 사도들이 이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인 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당신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며(루카 10,21 참조), 언제나 가장 작은 이들을 통하여 크신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 보이시는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로마에 협조하던 세리와 저항하던 열혈당원, 예수님 앞을 막아섰던 자와 그분과 함께 죽기를 독려하던 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자와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켰던 이, 이토록 서로 다른 이들이 모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 거룩하고 의롭게 된’ 우리도(제1독서 참조), 복음을 증언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치유를 전하는 주님의 사도로서 충실히 살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바다가 돌 하나에 출렁이지 않듯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어찌 성도들에게 가지 않고 이교도들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오늘 독서도 코린토 교회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꾸짖음입니다. 성도들 간에 문제가 있을 때 왜 세속 법정에서 심판받으려 하느냐는 지적입니다. 세상을 심판하고 복음화해야 할 성도들이 세상에서 심판받으려 한다는 말입니다. 

한때, 아니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보수적인 성직자와 신자들이 자기들은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사람들이고 반대로 정의 구현 사제단은 대한민국을 망치고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발언과 활동을 하는 것이라며 사제단을 비판하고 반대합니다. 

이들이 이런 비판을 하게끔 일부 사제들은 정치 편향적인 그러니까 마치 어느 정당의 정당원인 것처럼 그 정당의 잘못은 볼 줄 모르고 무조건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사제나 수도자가 있긴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제는 복음에 비추어 세상을 심판 또는 비판하는 것인데 실로 신앙인인 우리는 그리고 진정 복음을 사는 사람이라면 세상 가운데서 그저 복음을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비 복음적이고 불의한 세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심판 또는 비판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같은 뜻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제가 거듭 얘기하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하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주님께서 산 위로 가시어 제자들을 뽑으신 다음, 제자들과 함께 평지로 내려오셨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산에 오르지 않는다면 주님처럼 가끔 산에 오르십시오. 산에 오르지 않더라도 산에 올랐을 때를 상상해보십시오. 

산 위에서 보면 세상의 크다고 하는 것들도 다 작디작습니다. 그리고 밑에서 아웅다웅하는 것이 다 부질없음도 느낍니다. 

그러니 성도들끼리 세상일로 다투지도 않을 것이고, 혹 다투더라도 다시 정신을 차린다면 세속 법정으로 그 분쟁을 끌고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아무나 이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받아들일 때 그것이 내 존재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면 길길이 날뛸 것이고, 받아들여도 아무렇지도 않을 때만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산 위에 오른 사람,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나눈 사람이라야 큰 바다가 작은 돌에 출렁이지 않듯이 불의를 당하고도 담담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보상의 역설 : 왜 예수님은 배신자 유다를 검증도 없이 뽑으셨을까?

 

성당에서 보면 어떤 일을 잘하면 상을 주는 식의 사목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선교를 많이 하면 상을 준다거나, 어떤 단체에 대해 점수를 매겨서 높은 단체에 상을 주는 식입니다. 이런 식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주는 일은 진짜 좋은 성과를 내게 할까요? 같은 예로 만약 아이들에게 성적이 오르면 스마트폰을 바꿔주겠다는 식의 보상을 주는 것은 효과가 있을까요? 

수년간 많은 과학자가 행동 활성화의 효과를 입증하는 다수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한 사례에서는 과학자들이 담배를 끊으려는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추적했습니다. 이들은 흡연자를 두 그룹으로 나누고 8주 동안 금연 프로그램을 시행했습니다. 

한 그룹에는 금연 프로그램에 참여한 보상으로 머그컵이나 하와이 여행 응모권 등을 주었습니다. 반면 통제 집단에는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물을 받은 피실험자들은 금연 프로그램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처음에는 보상이 꽤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3개월 후 금연 성과를 확인했을 때 두 그룹 사이에 눈에 띄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1년 뒤에는 보상그룹의 참여자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금연을 포기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다른 연구사례도 있습니다. 버지니아 폴리테크닉대학교의 E. 스콧 갤런은 안전띠 착용과 관련해 스물여덟 건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았습니다. 6년간 25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인 다양한 연구 결과를 모두 검토하고 나서 안전띠 착용에 대해 금전적인 보상이나 선물은 주는 방법은 거의 효과가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독서를 한 학생에게 보상하는 여러 프로그램에 관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검토하고 나서도 여러 프로그램에 관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검토하고 나서도 보상에 따른 어떠한 장기적인 효과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흉흉한 마을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같은 마을에 사는 불만 가득한 십 대 몇 명이 모여 그 노인을 곯려주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이들은 매일 노인의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어느 날 노인은 마당에 나와 10대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들이 나타나자 노인은 모두에게 5파운드씩 나눠주면서 앞으로도 계속 욕을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아이들은 일단 돈을 받고 욕을 하며 지나갔습니다. 

일주일 동안 노인은 매일 아이들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그다음 주는 약간 달랐습니다. 노인은 아이들에게 돈이 별로 없다고 사정을 하고는 1파운드만 주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일주일 동안 돈을 받아 가며 계속 욕을 해댔습니다. 

세 번째 주가 되자 또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노인은 아이들에게 상황이 너무 안 좋아 20펜스밖에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너무 적은 금액에 모욕감을 느낀 아이들은 급기야 욕을 중단해버렸습니다. 

이것은 누가 지어낸 이야기일 테지만 여기에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 근본적인 동기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즉 행위에 대한 보상을 제안받은 사람들은 행위와 보상을 동일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행위가 보상을 위한 숙제요 부담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아무런 제안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 행위 자체를 보상으로 여겨서 그 행위를 멈추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처: ‘지금 바로 써먹는 심리학’,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행위는 감정의 산물입니다. 행위를 바꾸려면 감정을 바꾸면 됩니다. 그런데 행위에 따라 감정이 변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행위가 감정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웃으니 행복하다는 등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은데 억지로 하는 행동은 장기적으로 감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웃음 치료와 같은 시도가 있기는 하지만, 계속 불안한데 억지웃음만 웃으면 감정이 좋아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감정을 만들고 감정이 행위를 만듭니다. 믿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배를 타고 있는 나에게 어떤 배가 와서 부딪쳤을 때 화가 났다가도 그 배가 빈 배였다면 화가 사라집니다. 이는 분명 그 배 안에는 멍청한 사람이 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된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를 바꾸려면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는 감정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믿음에서 오기에 그런 감정을 갖게 만드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만약 모든 것은 은총이라는 믿음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항상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믿음은 내가 에덴동산에 머물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을 믿게 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먼저 성체를 주셨습니다. 성체가 나를 하느님의 자녀로 믿게 하고 또 이미 에덴동산에 머물고 있음을 믿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 믿음 때문에 좋은 행위가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먼저 그들을 사도로 뽑으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이 사도로 선출되었다는 기쁨에 좋은 행동이 나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가리옷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께 사도로 뽑혔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믿음은 선택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에덴동산에 들어가려 했습니다. 이것이 뱀이 하는 일입니다. 바닥에 있다고 믿으면서 하늘을 날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하늘을 날고 있다고 믿으면 모든 뱀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결국 믿음은 내가 그 사람이 되었다고 믿으며 행하는 작은 행동들로 확고해집니다. 세례가 뽑히는 것이라면 견진은 그 믿음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하는 작은 행동들입니다. 

제임스 클리어는 『아주 작은 습관의 힘』에서 살을 빼려거든 살을 빼려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정체성을 바꿈 없이 목표를 세워봐야 제자리라는 것입니다. 술과 과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바꾸지 않으면 10kg 감량은 물 건너간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하면 확고해질까요? 걸음마를 통해서입니다. 안 되지만 자꾸 해봄으로써 믿음이 확고해지는 것입니다. 

안전장치 하나도 없이 손가락 한두 마디로 버텨야 하는 ‘프리 솔로’ 암벽등반으로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975m에 달하는 바위산 ‘엘 카피탄’을 오른 ‘알렉스 호놀드’는 어떻게 그 산을 오를 수 있는 믿음을 얻었을까요?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계획을 세우고 안전장치를 이용해 50번을 등반하고 나서야 그런 믿음이 생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면허를 따고 운전대를 잡으면 도로에 나가기 두렵습니다. 하지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지나다 보면 그런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나친 자만심만 아니면 초보 때 두려워할 때보다 훨씬 안전하게 운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유태인들이 세상에서 큰 성과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이미 그런 성과를 내도록 뽑혔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노력해서 자신들이 선택된 백성임을 증명하려는 삶이 아닌, 이미 뽑힌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성과를 내는 것입니다. 먼저 되었음을 믿어야 그렇게 되어갑니다. 

담배를 끊은 이후의 삶을 기대하며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과 결국엔 누가 담배를 끊을 수 있게 될까요?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끊게 됩니다. 

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로 불러주셨음을 자기 행동으로 증명하고 확인받으려고 하는 사람과 그냥 믿어버리고 사는 사람과 누가 잘 살 수 있을까요? 의심 없이 사제로 불림을 받았음을 믿는 사람이 잘 살 것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천생연분임을 증명하려는 사람과 하느님께서 천생연분이기 때문에 맺어주셨음을 믿는 사람과 누가 잘 살까요? 이미 주님께서 그렇게 맺어주셨음을 믿는 부부가 잘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미리 사도들을 뽑으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훌륭한 사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면 이미 그런 행동을 할 존재로 불림을 받았음을 믿으십시오. 이미 받았다고 믿으면 꼭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누구세요?

 

밤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외부에서 강의를 마치고 완전히 녹초가 되어 사제관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낮에 나가 밤에 들어왔으니 모든 불이 꺼져 있어야 하는데, 거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낮에 켜 놓고 나갔나?’라고 생각하면서 방문을 여는데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낯선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황하며 “누구세요?”라고 물었습니다. 대답하지 못하다가, 한참 만에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밤손님인 것 같은데,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힘으로 제압하지도 않았고, 또 신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 나의 공간에 들어와 있으면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낯선 것을 계속 들여놓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바로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 악을 받아들여서 죄를 범하는 우리입니다. 문제는 이 죄를 낯설게 여기지 않기에, 악의 침범에도 전혀 놀라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선의 실천이 낯익어서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될 때, 매 순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대한 일을 구상하면서 먼저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보면, 산에 가셔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서 기도하시지요.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사도직을 부여합니다.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것이 밤을 새우면서 고민하게 할 정도로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을 것, 둘째, 사람들을 가르칠 것, 마지막 세 번째는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열두 사도를 뽑으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을 계속해서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따른 사명은 예수님 시대와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선 기본적인 세 가지 사명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지키지 못했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지도 못했습니다. 또 마귀를 쫓아내는 삶이 아닌 함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요? .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마음은 따뜻하게, 행동은 씩씩하게, 진심이 통할 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릴 것.

- 황경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루카 6, 12)

 

태풍의 피해가 없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안에서 필요한 것은 매일 매일의 기도이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로 탄생되는 제자들이며 열두 사도들이다. 

우리 또한 기도하는 자세로 살길 바라신다. 기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가슴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래서 기도는 간절한 만남이며 하나되는 간절한 일치이다. 

삶의 길은 기도의 길이다. 기도의 삶은 거짓이 없다. 거짓이 없는 삶은 믿는 것을 기쁘게 실천하며 고통까지 겸허히 받아들인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기도의 삶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기도의 삶은 새로운 삶의 뜨거운 시작이다. 힘든 삶의 여정 가운데서도 내적 평화와 내적 기쁨을 체혐할 수 있는 것은 함께하시는 기도의 본질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밖에서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구하는 기도이다. 삶의 구심점은 간절한 기도이다. 간절한 기도로 재창조되는 우리의 마음이며 간절한 우리들 삶이다. 사람의 삶이 기도의 삶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