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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13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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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

 

 

2022년 9월 13일 (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의 죽은 외아들을 되살리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9월 13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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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믿는 이들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 복된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에게 뛰어난 설교의 은사를 주시고 박해를 꿋꿋이 견디어 내게 하셨으니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굽히지 않는 인내심을 본받아 저희의 믿음도 굳세어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7장 11-17절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영훈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13일 (화)
김영훈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9월 13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젊은이야, 일어나라!

 

구약 시대에도 죽었다가 살아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되살린 사렙타 과부의 아들(1열왕 17,17-24 참조), 엘리사가 되살린 수넴 여자의 아들(2열왕 4,18-37 참조), 엘리사의 유해에 닿아 되살아난 주검(2열왕 13,20-21 참조) 등이 있는데, 이들은 잠시 ‘소생’하였다가 때가 되면 다시 죽을 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생’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견줄 바 못 되지만, 분명 죽은 이를 다시 살린 이 행적은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는 강력한 표징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남편이나 장성한 아들 같은 법적 보호자가 없는 과부는 으레 고아나 이방인처럼 절대 빈곤 계층으로 전락하기 일쑤였습니다. 나인에서 예수님께서는 삶의 유일한 의미인 외아들을 잃고 상여를 따르며 슬피 우는 과부를 가엾이 여기셨고, 아들을 되살려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다른 기적들과 달리 당신께 신앙 고백이나 간절한 청원을 드리는 이도 없었고, 더구나 관에 손을 대실 때에는 주검과 접촉하는 것을 심각한 부정으로 여기는 율법마저(민수 19,11-19 참조) 거스르셔야 하였는데도 말입니다. 

이 기적은 주님께서, 죽음이 삼켜 버린 지독한 고통 속에 ‘주님, 살려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칠 기력조차 없는 이를 그 누구보다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심을, 서둘러 다가가 그를 생명과 구원으로 채워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한 분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루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소중한 지체입니다(제1독서 참조). 어쩌다 삶에서 생기를 잃고 잠시 어둠을 겪고 있다면, “젊은이야, 일어나라!” 하고 명하시는 그분의 손을 잡고 힘차게 일어나 다시 생명의 길을 걸어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다 알려고하지마라.

 

오늘 복음은 외아들이 죽어 가엾은 과부를 보고 외아들을 살리는 얘기인데 지난 태풍에 아들은 죽고 자기만 산 엄마의 사연과 겹쳐 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지난 명절 이 엄마가 얼마나 아플까 여러 차례 연민의 마음이 들어 저도 마음이 아팠는데 주님께서도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니 한편, 그러신 것이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생각되면서도 다른 한편, 여러 가지 생각으로 어지러웠습니다. 

어쩌자고 그 과부의 죽은 아들은 살리셨습니까? 가엾은 마음이 드신다고 다 구하실 것입니까? 가여운 처지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다른 많은 사람에게 보이시는 당신의 침묵을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이번 태풍에 죽은 아들은 어떻게 하시고 그 엄마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런 걱정을 하며 묵상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제게 응답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꾸짖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주제넘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라! 

내가 모든 것에 답변하지 않는데 왜 네가 답변하려고 하느냐? 너는 신비라는 말을 모르고, 신비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느냐? 

나의 침묵이 나의 신비이고 네가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있음을 너는 받아들여야 한다. 

옹기장이가 어떻게 옹기를 만들든 옹기가 따지지 못하듯 너희를 살리든 죽이든 그 이유를 내가 다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니고, 왜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게 하는지 네가 알아야 하는 것 아니다. 

네가 다만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누굴 살리든 죽이든 다 사랑이라는 것이고, 네가 해야 할 것은,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이웃의 고통에 같이 슬퍼하다가 자비를 입게 되면 같이 기뻐하고, 같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뿐이다. 

이유는 몰라도 사랑이라는 것만은 알고, 네가 네 이웃의 치유와 구원을 위해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라도 너는 같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슬픔과 기쁨만은 함께해야 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청하는 것을 무조건 얻는 법 : 거룩한 무기력감

 

박보영 목사 밑에서 자라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사랑이 너무도 커서 자주 신발 없이 맨발로 집에 오곤 하였습니다. 거지가 신발이 없어 벗어주고 오는 것입니다. 옷과 자기 도시락등 먹을 것을 주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길고양이가 버스에 치였습니다. 그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버스에서 내려 고양이를 찾았습니다. 고양이는 죽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핏자국이 보였습니다. 고양이는 컨테이너 밑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고양이를 끌어내어 치료해 주려고 컨테이너 밑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그러자 고양이는 소리를 지르며 그 손을 할퀴었습니다. 그래도 그 청년은 피를 흘리면서도 고양이를 잡아 끌어내었습니다. 고양이는 하반신이 거의 떨어져 나간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청년은 고양이를 안고 울면서 동물병원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동물병원은 고양이를 살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으로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해 손을 내미십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이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것인 줄 알고 손을 피하거나 그 손을 할퀴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도움을 주실 수가 없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신 기적을 세 번 하셨는데 이번이 유일하게 청하지도 않았는데 살려주신 예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야이로의 청으로, 라자로는 동생 마리아와 마르타의 믿음을 요구하시며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지만 나인의 과부의 아들은 그냥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살려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청하지도 않았는데 은총을 쏟아부어 주신 것일까요? 

세상에는 많은 고양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왜 버스에 치인 고양이에게 손을 뻗었을까요? 바로 불쌍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불쌍합니까? 청할 힘조차도 없는 무기력감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심지어 과부였습니다. 그녀는 우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그냥 지나치실 수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거부한다면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길거리에서 살던 가출한 청소년들을 박보영 목사는 집에 데려와 키웠습니다. 처음에는 따듯한 잠자리와 먹을 것, 깨끗한 옷을 입으면 그 아이들은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지나면 다시 바깥세상의 자유를 갈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박 목사는 그들이 처음에 입고 있었던 지린내 나는 옷을 다시 입으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코를 틀어막고 그것을 입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손으로 그 옷을 가져다 버립니다. 그다음 목욕을 세 시간씩 한다고 합니다. 박 목사는 이러한 예식을 통해 자신이 아니면 그들은 아무 존재도 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무엇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자꾸 밖으로 나가면 자신들이 무엇이라도 되는 듯이 생각하고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어떠한 신앙과 가르침도 줄 수 없습니다. 움직이는 아이에게 예방주사를 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은총은 이렇게 그 주사가 아니면 자신은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자신을 무기력하게 맡기는 이들의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가 꿈을 꾸었습니다. 기도와 희생을 통해 모두가 완덕의 계단으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도 어린 수도자로서 소화 데레사는 한 계단도 못 올랐습니다. 심지어 꿈에서는 자기 나이보다 더 어렸습니다. 아기였습니다. 아기가 오르고 싶은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소화 데레사를 들어 제일 꼭대기에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가장 먼저 완덕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힘으로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착각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주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수 없으십니다. 당신은 그저 우리 보조자가 되기 때문이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내가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처지처럼 거룩한 무기력감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은총은 이미 받았다고 보아도 됩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야 모든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앵’하고 태어나, ‘휙’하고 살다가, ‘억’하고 죽더라.

 

누가 사람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앵’하고 태어나, ‘휙’하고 살다가, ‘억’하고 죽더라.”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인생이 긴 것 같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얼마 전에 서울 신학교 동창 신부가 강화에 찾아왔습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옛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신학교 다닐 때의 사건 사고를 이야기했고, 또 재미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실컷 웃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3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에 하늘 같았던 교수 신부님들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지금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기다릴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돈? 명예? 권력? 
 
그 모든 것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일한 것이 기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기억을 많이 간직하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의연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최후의 순간에 어떤 기억을 떠올릴 것 같습니까? 
 
고을 성문에서 두 행렬이 마주쳤습니다. 하나는 마을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일행이었고, 또 하나는 마을에서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이었습니다. 죽은 이는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 과부는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를 바라보며 유일한 희망을 걸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제 그 아들마저 잃은 이 여인의 처지는 어떠했을까요? 당시는 여자 혼자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던 것입니다. 
 
외아들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죽음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 죽음 앞에서 힘든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서 있는 외아들의 어머니를 가엾이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울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구원의 행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께 대한 사랑의 기억을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기억만을 만들면, 결국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삶이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주님께 대한 기억이 구원의 큰 선물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살아 있는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 천운영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루카 7,14)

 

가을이 또 다시 고향을 물들인다. 물들이는 이 가을마저 아쉬움을 남기며 우리 곁을 지나갈 것이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우리들 삶이다. 지나치고 사라지는 삶이 아니라 다시 존귀함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이젠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가장 안타까운 거기에서 예수님을 다시 뜨겁게 만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과의 이별만큼 더한 슬픔과 고통은 없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별이며 우리가 맞이해야 할 아픔이다. 

우리 곁에 영원히 머물 수 없는 우리들의 제한된 시간이다. 남아야 할 사람과 떠나야 할 사람이 있다. 사랑스럽고 소중하며 귀중한 모든 것들은 주님을 통하여 다시 새롭게 만나게된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생명의 길은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지 않는 하나되는 사랑의 길이다. 결국 하나의 자리에서 만나는 삶과 죽음 십자가와 부활의 삶이다. 생명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아픔을 수반한다. 

우리의 아픔과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아픔을 구원하시는 구원자 주님이시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우리들 생명이다. 만남보다는 이별을 이별보다는 아름다운 기도로 숨 쉬는 우리의 오늘을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안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이 사랑의 길을 이 가을과 함께 지나가고 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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