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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16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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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9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2022년 9월 16일 (금)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셨기에 죽은 이들도 되살아날 것이라며 부활을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과 복음을 전하러 다니실 때,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수산나 등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9월 16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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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헌신적인 목자 복된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를 불굴의 순교자가 되게 하셨으니 그들의 전구로 한결같은 믿음을 길러 주시어 저희가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8장 1-3절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재승 요셉 신부 강론

 

 

2022년 9월 16일 (금)
최재승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9월 16일 (금)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자선과 봉헌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전도 여행을 다니셨다는 기록은 복음서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유독 오늘 복음은 그 일행 가운데 여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더 집중합니다. 

이 여인들은 자기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는데, ‘시중들다’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식탁에서의 봉사’를 뜻합니다(루카 10,40; 17,8 참조). 이 여인들은 주님과 사도들과 동행하며, 개인 재산을 털어 음식을 대접하고 생계를 도왔던 재정적 후원자요 복음 선포의 숨은 공신들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상에서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에 자주 관심을 보이는데(12,15.16-21.33-34; 16,9-12; 19,8), 이 여인들은 가장 훌륭한 예표입니다. 

시중을 들면 보수를 받는 것이 이치인데, 오히려 이들이 개인 재산을 들여 주님 일행을 시중든 것은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구원을 몸소 체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자기 재물을 아낌없이 이웃과 나누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오롯이 깨닫고 감사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최근 들어 자신이 자선과 봉헌에 무심하였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해 주셨는지 알아듣고 감사를 드리는 데 무뎌졌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자선과 봉헌으로 주님을 동행하였던 이 여인들은 뒷날 주님의 죽음을 곁에서 지켰고, 빈 무덤의 첫 증인이 되었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현세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 때문에’(제1독서 참조) 그분 곁에 머무르며 작은 봉헌과 자선을 정성껏 이어 간다면,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는 기쁨이 충만한 일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행복하다고 해도 되는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을과 고을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음을 얘기하는데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여인들도 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이 얘기는 주님께서 당시 소외와 차별을 받는 사람인 여인도 다른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환영하시고, 복음 선포단의 일원 또는 제자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셨음을 얘기합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들과는 다른 루카 복음의 특징임은 이 정도로 갈음하고, 오늘은 주님과 여인들의 관계를 좀 더 집중하여 보고자 합니다. 주님과 여인들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관계입니다. 물론 여인들은 주님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관계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사랑의 관계만이 아니라 구원의 관계라는 얘기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여인은 많고도 많으며,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여인은 많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런 여인과 구원받은 여인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제 생각에 구원받은 여인은 불행에서 건져진 여인이고 그래서 사랑받아 행복한 여인일 뿐 아니라 구원받아 행복한 여인이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들의 불행과 비 구원은 그저 인간적인 불행과 비 구원, 그러니까 가난이나 병고나 실연의 고통 정도가 아닌 악령에 의해 인간이 영적으로 파괴된, 그런 불행과 비 구원이었지요. 

사실 영의 파괴는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전인적인 파괴이지요. 완전히 영에 제압당하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꼭 구원자가 있어야 하는데, 어떤 명의도 심리학자도 정신과 의사도 이들을 위한 구원자는 될 수 없었습니다. 

옛날 제가 양성을 담당할 때 한 형제가 이런 상태였는데 반찬 하나도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먹지 못하고 영이 시키는대로 먹어야 했고, 식당 자리도 마음대로 앉지 못하고 시키는대로 여기저기 옮겨다녀야 했으며, 영의 어두운 기운이 그 형제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짓누를 정도였는데 저의 어떤 말도 의사들의 어떤 치유도 먹혀들지 않아 참으로 무력감을 느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들도 분명 이러했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께 구원받았을 때 그 행복함과 주님께 대한 고마움은 그저 여인으로서 사랑을 드리는 그 이상의 것을 하게 하였고 가족들도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기에 주님을 따라나섰을 뿐 아니라 가진 재산도 바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주님의 구원에 대한 여인들의 보답은 헌신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 여인들의 관계는 구원과 헌신의 관계이고, 그래서 자기 욕심 때문에 주님을 따르던 다른 제자들이 도망쳤을 때도 이 여인들은 끝까지 주님을 따라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죽음을 지켰습니다. 

이런 여인들을 보면서 악령에 사로잡힌 적이 없으니 나는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들의 헌신을 보면서 나는 마냥 행복하다고 해도 되는지 성찰케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교회는 신자들을 위해서 돈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일까?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엔 감동적인 동영상들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아버지에게 차를 선물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중 ‘가족을 위해 73년식 포르쉐 포기했던 새아빠’란 내용이 감동적입니다. 친아빠도 아닌 새아빠를 위해 차를 선물한 것입니다. 새아빠는 엄마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아끼는 73년식 포르쉐를 팔아야만 했습니다. 딸은 새아빠에게 그 차를 되찾아주기 위해 돈을 아껴서 그 차를 깨끗이 수리한 다음에 깜짝 선물을 합니다. 아빠는 딸을 안고 웁니다. 

딸이 이렇게 새아빠가 가장 아꼈던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것을 선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새아빠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땀과 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 마음 안에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은 은혜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정을 주지 않습니다. 

중국 한 초등학교에서는 그들의 부모님이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자녀를 위해 뼈가 으스러지라 일하는 아버지들의 모습에 아이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보다 더 큰 교육이 있을까요? 부모들이 나중에 힘이 없어지고 자녀들이 성장하여 돈을 벌 수 있을 때 이 부모들은 절대 가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포크포크'엔 또 ‘2년째 엄마 차 얻어타던 아버지께 새 트럭 사드렸더니 반응’이란 동영사도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잔디관리 사업을 하며 고생하여 자신을 키운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2년 전 트럭이 고장 나서 직장에 엄마 차를 얻어타고 출근하는 것도 압니다. 이에 아들은 돈을 아끼고 아껴서 아버지에게 트럭을 선물해드립니다. 아버지는 울면서 뛸 듯이 기뻐합니다. 

노년에 풍족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피를 흘려서 자녀들의 마음 안에서 이기심을 몰아내고 어떻게든 보답할 수 있는 자녀들로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세계 1위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고생을 알면서도 거의 보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녀들 안에서 악한 영을 빼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경쟁시켜서 자녀들 마음 안에 악이 성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에게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여인들이 나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8,2-3)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회개한 여인들이었습니다. 또한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였고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이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영적인 은총을 받았고 이에 물적으로 보답하려 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이들 중 굶어 죽은 이는 지금까지 한 명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선악과를 바치는 사람에게 성체가 유효하듯 영적인 선물을 주는 교회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줄어든 이들이 많아지기에 가난할 수 없습니다. 
항상 보답받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가 가난하고 돈이 없다면 그 교회는 사람들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거나 병을 고쳐주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일곱 마귀란 성령의 일곱 은사와 반대되는 죄를 의미하는데 교회에서는 이를 ‘칠죄종’이라 하고 칠죄종은 ‘삼구’로 모입니다. 

칠죄종은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이고, 삼구는 “세속(돈), 육신(성욕), 마귀(교만)”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마음 안에서 이것들을 없애야 하고 동시에 육체적인 질병도 고쳐주는 일이 행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보답으로 절대 재정적으로 가난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영을 빼내고 건강한 육체를 회복시켜 줄 힘을 지닌 것은 부모의 희생밖에 없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굳은살을 보고는 절대 반찬 투정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과 같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마음 안에서 자신들의 피로 악령을 쫓아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악령을 쫓아내시기 위해 당신 피를 쏟으셨습니다. 이것이 매 미사 때 우리가 영하는 성체와 성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수난 하신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쉬운 물질적 보상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평일 미사 때도 성체의 가치에 보답하기 위해 다만 천 원이라도 봉헌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십일조 이야기가 사라진 가톨릭이 재정적으로 더 부유할까요, 아니면 개신교가 더 부유할까요? 개신교의 웬만한 대형 교회는 가톨릭 한 교구의 재정을 훌쩍 넘어섭니다. 그래도 그들은 행복하고 부유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도 재정적인 회개를 하도록 촉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교회 자신부터 돈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피 흘림과 같습니다. 이렇게 흘려주면 신자들은 또 고마워서 더 보답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넉넉해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말라키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말라 3,10)

부모가 자녀로부터 나쁜 영을 자신들의 피로 몰아내어 자녀들의 감사를 받게 되는 것이나 교회가 가진 모든 것으로 신자들의 마음 안에서 나쁜 영을 몰아내어 그들의 보답을 받아 넉넉해지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신비를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넉넉하게 살면서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그들이 넉넉하게 살게 될 때에는 또한 여러분의 궁핍을 덜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공평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2코린 8,14)

하지만 요즘 교회 안에서 돈을 봉헌하는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교회가 자비로워졌다기보다는 돈이 행복이라는 믿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돈이 행복이라 믿기에 돈을 내라고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을 내는 것이 행복임을 믿었다면 돈을 많이 봉헌하라는 강론이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베푼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당당하게 돈을 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내야지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2코린 9,7)

에덴동산은 참 행복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가장 중요하게 행해져야 하는 일이 선악과를 봉헌하는 일이었습니다. 돈을 봉헌하는 게 행복입니다. 오늘 자신들의 재산으로 교회를 도왔던 여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행복하기 위해 재산을 포기하는 여인들이었습니다. 루카도 그렇고 바오로 사도도 그렇고 이렇게 교회를 위해 돈을 내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아낌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그 피 흘림이 신자들의 마음에서 나쁜 영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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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의 로마 황제였습니다. 옥타비우스로도 잘 알려진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의 뜻인 ‘존엄자’라는 칭호를 쓰면서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장수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76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로마에 아우구스테움을 짓습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유골을 영원히 안장하기 위해 지은 영광스러운 능입니다. 자기를 비롯하여 후손들까지 세상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몰락을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그의 능이 폐허가 되고 도굴까지 당할 것을 또 그 능이 포도밭이 되고, 르네상스 정원, 투우장, 화약 창고, 콘서트홀로 계속 바뀌게 될 것 역시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소위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영광이 과연 영원할까요? 끊임없는 격동과 변화의 물결 속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그 자리에 계실 뿐입니다. 
 
과거 유다인들은 율법만이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부녀자들과 함께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부녀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전교 활동에서 식생활과 기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일들을 시중 들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필수 요원으로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고 복음을 전해줍니다. 
 
당시의 유다 공동체는 부녀자들을 포함하지 않았고, 율법을 익히는데 부적당한 사람으로 여겨 공동체 모임에 참석할 의무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교회는 부녀자들이 그 창설자 중의 중요한 요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새로 난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는 율법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님 중심이며 사랑 중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율법 중심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또 예수님과 함께했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녀자들과 다른 제자들을 통해 율법 중심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중심, 그리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셨고 직접 당신 삶으로 보여주셨던 사랑 중심의 삶만이 영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고 있나요? 영원하지 않은 것에 내 마음의 모든 것을 두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내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자정이 되면 내일은 매우 깨끗한 상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매우 완벽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와 우리 손으로 들어온다. 내일은 우리가 어제에서 뭔가를 배웠기에 희망한다.

- 존 웨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8,3)

 

최고의 정성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이시다. 참다운 삶은 예수님과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 정성어린 우리들 삶이다. 어떻게 참여하고 어떻게 봉사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을 위한 지원과 동참이 참으로 필요하다. 

와서 보시오! 말씀하신 예수님이시다. 진리를 바라보는 눈이 어두워지면 올바른 실천은 멀어진다. 신앙의 눈이 없는 사람은 진리의 빛을 결코 볼 수 없다. 마음과 시간을 내는만큼 더 깊어지는 것이 우리들 신앙이다. 

정성을 들여 시중을 들었던 초대교회의 봉사자들같이 진정한 봉사는 정성스럽게 실천하는 것이다. 정성어린 마음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다. 하느님의 정성어린 사랑이 우리들 삶에 들어오는 살아있는 오늘이다. 우리들 삶도 정성이 빠져버리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멀어진다. 

정성이 진정성 있는 우리들 삶이다. 현재의 삶에 깨어있는 것이 정성어린 우리들 삶이다. 최고의 사랑 최고의 정성으로 가을 꽃들이 피어난다. 두말할 나위 없이 믿음은 정성이다. 

우리의 오늘도 가장 좋은 정성의 오늘이길 기도드린다. 최고의 정성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오늘을 살 수 있는 우리들임을 기억한다. 정성을 실천하는 것이 복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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