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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
2022년 9월 19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잠언의 저자는 선행을 거절하지 말고 악을 지어내지 말라며, 주님께서는 의인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가르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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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8장 16-18절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인혁 타대오 신부 강론
2022년 9월 19일 (월)
조인혁 타대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19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선(善)은 있는 그대로 드러날 때 하느님께 영광이 된다.
요한 복음사가는 ‘로고스 찬가’(1,1-18)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1,9)으로 고백합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에게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신 참빛이셨습니다.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내면의 어둠이 드러났을 때, 그분을 회피하거나 해치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이가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구원의 빛 안에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인 ‘등불의 비유’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루카 8,4-8 참조)에 이어 들려주십니다. 마음속에 심긴 하느님 말씀을 싹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으로 살아가라는 당부와 더불어, 그러한 삶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둔 등불마냥 감추지 말고 가족과 이웃들에게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착한 표양과 모범까지도 감추는 것이 겸손은 아닙니다. 선(善)은 있는 그대로 드러날 때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선을 행하기를 잊어버린 누군가에게 깊은 깨달음과 변화의 계기가 됩니다.
제1독서의 말씀처럼,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선행을 베풀기를 지체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이웃에게 해가 되는 그 어떤 악행도 늘 경계하는 삶을 이어 가야겠습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주위에 빛이 되어 주는 삶을 더 실천하면 할수록 더 깊은 확신과 기쁨을 얻어, 언제나 주님의 빛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세상을 비추는 등불은 세상을 살아가는 내 발의 등불.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옛날에 야학을 할 때 <등불>이라는 노래를 자주 부르곤 했는데, 특히 졸업식을 할 때면 교가 대신 부르곤 하였지요. 그러니까 이 노래를 교가처럼 부르는 것은 지금은 집안 사정이 어려워 비록 정식교육을 받지 못하고 야학을 통해 교육받지만, 언젠가는 이 사회를 비추는 등불이 되겠다는 의지와 바람의 표출인 것이지요.
사실 그들의 현실은 어려움이 많았고 미래는 어둠이었지만, 그럼에도 자기의 어둠 가운데 묻혀있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겠다는 그런 대단한 꿈과 의지를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등불이 되라고 하시는데 요즘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가 등불이라는 자의식도 없고 등불이 되려는 자기 의지도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자기 의지와 자의식에 대해 얘기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저희 형제들을 양성하는 소임을 맡았었고, 지금도 양성소에 있기에 양성에 협조를 하고 있습니다. 양성이란 인간적, 그리스도교적, 프란치스칸적 성숙을 돕는 것인데 형제들 가운데는 자기가 이미 어른이라는 자의식도 없고 성숙한 사람이 되려는 의지도 없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여러모로 미성숙하다고 하면 기분 나빠하고 어린애 취급을 하면 왜 어린애 취급하느냐고 따지면서도 실제로는 어린애로 머물려 하고 어른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면 왜 어린애로 머물려 하고 왜 어른이 되려 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른이 되면 뭐든지 자기 스스로 책임지고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경제적으로만 봐도 돈 벌어 자기도 먹고 애들도 먹여야 하고, 공동체적으로 보면 주어지는 책임을 스스로 해낼 수 있어야 하며, 인간관계도 남 탓하지 않고 자기가 원만하게 끌어가야 하는데 한 마디로 이렇게 어른 노릇 하기 힘드니 어른 되기 싫은 것이고 싫으니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에 대한 자기 의지와 자의식이 포기되는데 이것은 등불에 대한 자기 의지와 자의식도 똑같습니다. 내가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세상을 어둡게 하는 장막이 되기보다 등불이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세상을 비추는 등불도 아니고, 등불이 되고 싶지도 않는 것은 등불이 되면 나를 태워야 하는데 나를 태울만한 기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말이지요. 사랑이라는 기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내가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겠습니까? 사랑이 없는데.
그렇습니다. 등잔은 있는데 등잔의 기름이 없으면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도 없고 세상을 비출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비추는 등불은 세상을 살아가는 내 발의 등불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등불을 켜면 너의 발만 비추겠습니까? 나의 발도 비추지.
이런 얘기가 있지요.
어스름한 저녁 어떤 사람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등불을 켜고 오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맹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던 사람이 하도 이상해서 당신은 등불을 켜봤자 볼 수 없는데 왜 등불을 켜고 다니느냐고 물으니 바로 당신의 어둠을 밝혀주려고 켜고 다니는 거라고 답하더랍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 나의 발도 비추고 너의 발도 비추는 등불입니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옵니다.” (시편 119).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혜는 듣는 데서 오고,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온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후회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당연히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책을 많이 읽고, 많이 배우면 될까요?
많이 배워서 학벌도 좋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책도 열심히 읽으면서 자신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지혜롭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을 피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사건건 간섭하는 그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두릅니다. 그 누구도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국 속담에 “지혜는 듣는 데서 오고,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말하는 순간에 밀려드는 후회를 경험한 적이 없습니까? 그러나 들어주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존경을 표시하며, 그를 향한 굳은 믿음을 갖습니다. 그만큼 들어주는 것이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더 많이 듣는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하는 데에 집중하면 할수록 나의 지혜는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에 맞춰 살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나요? 혹시 자기 말만 열심히 하면서, 자기 말이 마치 하느님의 말인 것과 같은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도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열심히 실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라고 하시지요. 등불은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두면 제 기능을 다할 수 없습니다. 꺼져버리거나, 밝은 빛을 세상에 드러낼 수 없겠지요. 만약 이런 사람은 어리석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등불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는 것처럼 감춰지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에 환하게 당신을 드러내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역할은 주님께서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떠했나요? 율법을 잘 아는 그들이었기에 주님을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 말씀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어떤가요? 주님을 환히 드러내기 위한 노력은 무엇인가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를 우리가 아닌 존재로 만들려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성취다.
- 랠프 윌스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 21)
자연의 변화는 삶의 변화를 성찰하게 한다. 핑계와 실행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 말씀의 힘은 실행의 힘으로 드러난다. 실행하지 않는 이의 말은 힘이 없다. 알고 있는 것을 실행하고 믿는 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의 실행이 곧 복음을 지켜가는 올바른 삶이 된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절이 아닌 더 넓고 깊은 관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일상적인 삶에서 만나게되는 관계의 선물이다. 가장 귀한 것은 마음에 품은 복음을 우리가 제대로 실행하는 기쁨이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지 않으면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다.
일상의 신앙이 바로 복음의 참된 실행이다. 실행은 거창하지 않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실행이다. 말씀과 함께하는 곳에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 늘 함께 한다. 인간 관계의 모든 문제는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서는 실행 없이는 해결점을 찾을 수 없다.
하느님 중심의 살이란 말씀을 일으키는 믿음의 삶이다. 마음과 실행 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말씀의 관계이다. 오늘도 아는 것을 실행하고 믿는 것을 기쁘게 실천한다. 건강한 관계는 곧 건강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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