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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20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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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9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

 

 

2022년 9월 20일 (화)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잠언의 저자는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니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곧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9월 20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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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8장 19-21절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봉용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20일 (화)
최봉용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9월 20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그분을 찾아왔던 일은 공관 복음서 모두에 실려 있습니다. 

다만 루카 복음사가는, 그들이 사람을 보내어 군중을 가르치고 계시는 예수님을 밖으로 불러내려 하였다는 내용이나(마르 3,31 참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마르 3,33)라고 하신 조금은 냉정해 보이는 예수님의 반문은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의 가족들은 군중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께 그저 방해가 되는 존재, 또는 그분에게서 외면당한 이들로 여겨지는 오해를 벗고, 독자의 관심은 오롯이 예수님과 그분께 귀 기울이는 군중에게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서민들은 하루 품삯으로 온 식구가 끼니를 해결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빠듯하였습니다. 

작고 가난한 이 사람들이 당신 곁에 모여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듣고 새 삶을 결심하는 그 자리가 매우 소중하였기에,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미루어 둔 채 이들에게만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과 ‘등불’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삶 안에서 열매로 맺어 내라는 가르침(루카 8,4-15.16-18 참조)을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것은, 겉치레뿐인 예배가 아니라 정의와 공정을 실현하고, 악인의 행실을 멀리하며,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삶입니다(제1독서 참조). 

막연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주 읽으며 삶의 방향을 잡고, 깨달은 바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주님의 어머니요 형제’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매일 평화로이 십자가를 지는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오늘 한국 순교 성인들의 축일에 의인의 영혼은 하느님 손안에 있기에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우리가 들었는데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쉽지 않고 그래서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면 여기서 고통이 없다고 말한 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그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과 함께 있어도 고통이 있고, 오히려 더 많은 고통과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모든 성인이 그랬고,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우리 성인들도 그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고통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그것과 다릅니다. 고통을 주지 않고 받지 않아서 고통을 겪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줘도 받지 않거나 받아도 겪지 않는 그런 고통을 말함일 겁니다. 

우선 박해를 받으면 온갖 고문이 있고, 그래서 육신의 고통을 피할 수 없지요. 

사실 이 고통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분이 안락사 방식으로 순교시킨다면 배교하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박해 시대 때 많은 분이 고문의 고통으로 어쩔 수 없이 배교하였고 독재시절에는 다른 민주화 운동 동지의 이름을 대는 배신을 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박해 시절 고문을 받을 때 육체만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같은 심리적 정신적 고통이 없었겠습니까? 

이로 인해 온갖 고뇌와 번민이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마침내는 주님 안에서 고통을 겪지 않게 된 것이고, 이런 것들을 다 통과한 다음에 갖게 된 평화로운 고통을 말함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도 시험과 단련을 얘기하고 불사의 희망을 얘기하고 평화를 얘기합니다. 순교자들은 박해자들의 박해를 하느님의 시험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시련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단련을 받은 분들이며 끝까지 불사의 희망을 놓치지 않은 분들이고 마침내 평화롭게 된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순교자들은 고통을 겪지 않은 분들이 아니라 평화로운 고통을 겪은 분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평화는 고뇌와 번민의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같은 것들이 사라진 마음의 평화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품 안에서의 인격적인 평화이고 사랑의 평화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는 그래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얘기합니다. 독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도 있는 것들을 다 열거하며 이 가운데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는지”  물은 다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라고 아주 확신에 차서 얘기합니다. 

그러니 박해자들의 평화는 사랑이 이 모든 것을 이겨낸 승리의 평화이고, 하느님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온순해진 평화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지막 순교가 아니라 일상의 순교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인데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순교는 우리의 성인들처럼 마지막의 영웅적인 순교가 아니라 매일 자신을 버리고, 매일 우리의 십자가를 평화롭게 지는 거라는 말씀이겠습니다. 

매일 평화로이 십자가를 진다! 

이것이 묵직하게 마음에 남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녀를 집착의 속박에서 해방하는 유일한 법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 주일 경축이동 관계로 주일 묵상을 오늘(20일)로 이동했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01회에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아이들과 이모, 그리고 엄마 돈은 물론이요 화장품까지 내다 파는 금쪽이가 나옵니다. 

금쪽이는 자신도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고 자신도 착해지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고 합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사느냐며 다그치기만 할 뿐입니다.

아이가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 돈으로 친구를 사귀기 위함입니다. 친구들에게 돈 자랑을 하고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사줍니다. 그 이유는 친구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없는 것입니다. 금쪽이도 자신은 자신감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약삭빠른 청지기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실 이 복음은 더 깊은 내용이 있지만, 오늘은 왜 약삭빠른 청지기가 주인의 돈을 축낼 수밖에 없는지를 생각해봅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돈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주인이 그를 떠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주인의 돈을 훔쳐서라도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물론 그 친구들이 이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는 청지기를 맞아줄 것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모든 죄는 돈을 좋아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탐욕이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탐욕을 끊어야 합니다.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의 청지기와 위 사례의 금쪽이로부터 그 원인을 찾아내면 됩니다. 

금쪽이는 박스로 만든 진실의 방에서 엄마, 아빠에게 털어놓습니다. 지금 집으로 이사 오기 이전에 엄마 아빠가 심하게 싸웠을 때 자신은 큰 상처를 받았고 경찰까지 부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싸운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자녀의 생존이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의 청지기가 직장을 잃고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과 같습니다. 

이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믿을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돈을 많이 모으고 친구를 많이 사귀어서 세속적인 보험을 들어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돈에 대해 집착이 커지고 그렇게 죄를 더 많이 짓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집착은 생존에 대한 보장이 이뤄지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집착하게 되었을 때는 하느님을 생명보험으로 믿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러니 자기들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탐욕을 부리게 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금쪽이가 부모를 믿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금쪽이 부모는 금쪽이에게 믿음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엄마는 돈을 원하면 가져다 쓰도록 보이는 곳에 놓습니다. 다만 쓴 액수를 써 놓도록 합니다. 그리고 아빠는 금쪽이를 데리고 일을 나갑니다.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까지 금쪽이를 책임지겠다는 믿음을 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화목입니다. 부모는 앞으로 금쪽이 앞에서 절대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금쪽이가 계속 돈을 훔치고 거짓말을 할까요?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부모님을 믿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참 자유입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면 이제 부모가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주지 못할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더는 부모를 자신의 창조자로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창조자만이 자녀에 대한 생명보험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의 생명보험은 오로지 부모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다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스페인에서 예술 작품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대형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스페인 바로크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1682)의 작품인 ‘성모잉태’를 무자격 복원업자가 작업하면서 흉측한 ‘추상화’로 바꿔 놓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위대한 화가의 작품을 자격이 부족한 사람에게 맡겼을까요? 

현지 언론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80대 여성 세실리아 히메네스의 원작 훼손’과 비견된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2012년 스페인 북동부 보르자 교외의 한 교회 벽에 걸린 예수의 그림을 선의로 복원했는데, 가시 면류관을 쓰고 박해받는 예수의 얼굴을 원본과는 전혀 딴판인 원숭이 같은 모습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같은 존재를 낳을 수 있는 분은 부모밖에 없습니다. 나는 온 우주의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리 봐도 나와 같은 존재를 다시 복원시키고 창조할 수 있는 생명보험을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창조자라고 하시는 분이 당신이 우리 생명보험이시라고 우리에게 아드님의 살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이제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위 청지기처럼 돈에 집착하고 관계에 집착하며 자기 생존을 책임지려 할 것인지, 아니면 신앙인들처럼 자기 생존을 하느님께 맡기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인지. 어차피 에덴동산에서도 아담과 하와는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믿을 것이고 집착하려는 사람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자녀의 모든 집착에서 해방하는 유일한 법은 자녀의 생명보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모든 집착은 결국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모를 자기 생존을 위한 생명보험으로 믿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자녀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에게 정확히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느님을 생명보험으로 믿지 않아서 좋을 것은 잠깐의 집착과 쾌락입니다. 그리고 긴 양심의 가책과 고통 속에서 지옥을 간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약삭빠른 청지기처럼 되지 말고 절대 우리를 내쫓으실 수 없는 우리 아버지를 참 생명보험으로 믿기를 결심합시다. 그러면 탐욕에서 벗어나고 그러면 죄에서 벗어나며 그러면 착한 사람이 되고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의 자유와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어느 신부가 본당의 어느 어르신 때문에 힘들다고 말합니다. 사사건건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누구 만났는지를 물어보기도 하고, 어제는 왜 늦게 사제관에 들어왔냐고 물으신답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려는 이 어르신께 대한 불편함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르신은 왜 스토커처럼 본당 신부에게 집착하실까요? 이 신부가 자기 아들 같아서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는 마음에 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너무 서운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만남이란 어느 정도의 이기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즉, 자기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입으로는 상대를 배려한다고 말하지만, 이 역시도 자기 관점에서 나오는 ‘배려’라는 이름일 뿐입니다.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책에서,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알아서 해주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 됩니다. 때로는 답답해도 가만히 놔두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이런 진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알아서 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답답하고 간섭하고 싶지만, 우리를 위해 꾹 참으며 말없이 함께하실 뿐입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이 진짜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우리 역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봉헌합니다. 과거의 순교자들은 박해의 고통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도 불의의 폭력을 저지르는 박해자들을 벌하지 않는 주님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 단순히 주님을 믿고 있다는 이유로 망나니의 칼에 의해 목이 잘려 나갈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주님을 믿을 수 없다며 배교했습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은 이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진짜 사랑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찬미를 외치면서 기쁘게 순교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와 같은 고통과 시련의 삶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진짜 사랑을 찾고 있습니까? 혹시 불평불만과 원망으로 주님을 떠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과거의 순교자 모습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다. 절망하는 인간만 있을 뿐이다.

- 하인츠 구데리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 21)

 

익어가고 영글어가는 가을소리를 가을 풍경과 함께 듣습니다. 먼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먼저 듣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말씀에 마음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먼저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말씀에 집중할수록 삶은 달라집니다. 말씀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말씀과 함께 하는 여정이 신앙의 참된 여정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생활 신앙이 참으로 중요한 신앙입니다. 

생활 신앙은 먼저 말씀을 듣기에 새로워질 수 있는 이들입니다. 새로운 변화는 우리가 제대로 듣는 변화입니다.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는 그 시작은 이와 같이 경청입니다. 

사람의 성장은 경청의 성장입니다. 먼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변화는 말씀이며 실행은 경청입니다. 기도도 소통도 관계맺음도 모두가 제대로 듣는 경청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오늘을 말씀을 듣는 마음과 함께 시작합니다. 익어간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 마음이 익어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들어야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자아에 갇혀 있기에 우리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이기적인 자아를 치유하는 그 시작은 먼저 말씀을 듣는 실행임을 기억하는 기쁜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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