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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22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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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

 

 

2022년 9월 22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코헬렛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9월 22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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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9장 7-9절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봉용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22일 (목)
최봉용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9월 22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모든 것이 허무로다.

 

갈릴래아와 페레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9년 통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당황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디아포레오’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세 번 더 발견되는데(사도 2,12; 5,24; 10,17 참조), 그때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매우 특별하고 기묘한 행적을 목격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표현합니다. 

사실 헤로데를 그토록 당혹스럽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인지 엘리야인지 옛 예언자 가운데 하나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죽었던 이가 되살아났다는 바로 그 소문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부활은 사실 내세의 존재와 의로운 생애에 대한 죽음 뒤의 보상(상선벌악)을 뜻하기에, 헤로데처럼 세상의 재물과 쾌락만을 탐닉하며 오늘만 사는 이는 커다란 두려움과 당혹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코헬렛의 저자는 노년에 이르러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본성과 반복되는 세상사는 그저 인생의 권태로움과 무상함을 일깨워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냉정한 성찰을 기반으로, 오직 하느님께서 모든 것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지혜를 찾으며 그분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삶을 이어 가는 가운데, 비로소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인생은 길어야 8, 90년이며, 세월이 지나고 돌아보면 찰나와도 같겠지요. 감정과 소유의 노예가 되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헤로데 같은 모습이 아니라, 일상의 권태와 무상함, 모순과 한계에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생명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허무예찬.

 

허무 예찬(虛無 禮讚), 영원을 만나게 하는 이 세상 허무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이제 할아버지 돼 가는데도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 아니 어렸을 때는 더 좋았습니다. 

그것은 저의 더러운 피랄까, 탁한 피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옛날 제가 양로원에 잠깐 살았을 때 저의 피는 뜨거웠지만 이 뜨거운 피가 저를 자주 욕심을 부리게 했고 세상을 집착하게 했습니다. 

그럴 때 양로원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의 열정과 뜨거운 피를 정화해줬습니다. 

욕심과 집착의 정화제가 할아버지, 할머니였던 것인데 그것처럼 오늘 독서 코헬렛서도 같은 정화제였는데 그것은 오늘 코헬렛서가 말하는 ‘허무로다. 허무’가 이 세상 집착을 버리고 영원을 만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허무란 있던 것이 사라져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애쓴 보람이 없는 것이고, 나를 위해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내가 애를 써서 강이 흐르지 않거나 흐르지 않던 것이 흐르게 된다면, 내각 애를 써서 태풍이 순풍이 되고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면, 내가 애를 써서 해가 뜨지 않거나 서에서 동으로 뜬다면, 그 애쓴 보람이 있으련만 아무런 변화가 없고 아무런 보람이 없습니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애써 말해도 말한 것이 다 헛것이고, 보고 또 봤어도 본 것이 다 못 볼 것들이며 듣고 또 들었어도 성에 차지 않고 마음에 남지 않습니다.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그런데 애쓴 보람이 없어 애쓰며 살아온 것이 다 허무로 돌아가지만 그 허무가 영원을 만나게 합니다. 이 세상의 허무가 저 세상의 영원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애를 쓴 이 땅이 허무하지 않다면 언제 하늘을 보겠습니까? 허무한 하늘을 왜 봅니까? 이 땅이 내게 허무하지 않다면 허무한 하늘을 보겠습니까? 

그런데 허무가 영원을 잉태하고 있고, 허무에서 모든 것이 나온 것입니다. 허무가 곧 태허(太虛)이고 영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무할 때마다 영원을 잉태한 허무한 하늘을 보게 하는데 그런데 오늘 그리고 저물어가는 이즈음 허무가 영원만 만나게 하지 않고 영원한 분까지 만나게 하면 더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죄인에게 죄를 고백해봐야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

 

미국에 있는 어떤 교회에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했습니다. 큰 꿈을 안고 교회를 위해 불철주야 섬기던 목사님은 얼마 가지 않아서 몹시도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인들이 교회 일이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너무나도 무관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강단 밑에 엎드리어 주님께 울부짖으며 도와 달라고 청하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 지혜를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모든 교인에게 편지를 쓰고서, 이와 아울러 그곳 지방 신문에 이러한 광고를 게재했습니다.

“다음 주일 오후에 ‘교회의 장례식’을 거행합니다!”

사람의 장례식은 몰라도 교회의 장례식이라는 광고는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기에 교인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많이 왔습니다. 드디어 교회를 장례 치르기 위한 예배순서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지막 차례로 교인들이 강단 앞에 놓여있는 관에 나와서 고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예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과연 관 속에 누가 누워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모두가 한 줄로 서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가 심각하게 굳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관 안에는 거울이 들어있었습니다. 지각 있는 교인들은 금방 목사님의 뜻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었기 때문에 교회가 죽은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울은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거울 안에는 자신이 흐트러진 모습을 가다듬어야 하는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게 합니다. 거울이 없이는 자신을 다잡을 수 없습니다. 이런 역할을 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닮아야 할 거울입니다. 그분과 벗어난 모습을 보면 어색해서 견딜 수 없어야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전 어느 신문에서 전과자들의 간담회를 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절도 전과자들은 자신의 경험담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때 멈칫하게 하거나 절도를 포기하고 나오게 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한 명의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주인이 코를 골고 자면 도둑질하기에 아주 편합니다. 코 고는 소리에 맞추어 한 발짝씩 떼어 놓으면 행진곡에 맞추어 입장하듯이 들킬 염려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이 너무 고요하면 그냥 포기하고 나오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난 도둑질하러 들어갔을 때, 그 집 현관에 놓여있는 신발들이 가지런하면 긴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흐트러져 있으면 내 집같이 마음 놓고 들어갑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거든요.”

어떤 전과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도둑질하다가 뛰쳐나온 적이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칼을 빼 들었죠. 근데 그 괴한도 칼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괴한이 저라는 것을. 그날은 도둑질할 수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거울’입니다. 카지노에는 거울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죄에 빠져있을 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자아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본 모습이 드러나게 만드는 거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소식만으로도 헤로데의 죄를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헤로데가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고 보여주는 거울이셨습니다. 

제가 오산 성당에 있을 때 정말 제 죄가 드러나게 하는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특별히 할머니 신자분들이 많았습니다. 봉성체를 했던 한 할머니는 지금도 제 뇌리에 남아서 나이가 들어가는데 그분의 모습과 더 벗어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게 합니다. 그분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온화한 모습은 저에게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나이 들고 싶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고아로 남의 집에서 일만 하고 매도 맞으며 자라서 다 죽이고 자신도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불평하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때 바다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촌으로 가시는 것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나병 환자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냐?”

예수님은 당신이 안 해줘서가 아니라 자아가 불평 자체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다시 살 힘을 얻으셨습니다. 모든 죄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보지 못하면 죄는 영원히 계속됩니다. 십자가를 보며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입니다.”

거룩한 이들은 너무도 깨끗해서 내 죄가 드러나게 합니다. 내 죄가 드러나는 것은 너무도 아픕니다. 그러나 살려면 그 거울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역할을 하도록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 이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거울의 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으면 자신이 저지르는 죄가 보입니다. 헤로데처럼 자기 잘못을 고치기를 원하면 교회에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교회 밖에 머무를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을 이가 결정됩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 자체가 헤로데가 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는 이는 수치를 면하리라.”(집회 20,3)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야고 5,16)

결국 죄 없는 이들 앞에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죄 있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해봐야 “우리도 다 죄짓는데?”라고 말할 것입니다. 죄를 안 지으면 오히려 그 공동체에 머물기 어려울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는데 부끄럽지 않으면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내 죄를 고백하기 어려운 거룩한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에서 내 죄를 고백할 용기. 이것이 나의 육체와 영혼의 병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러셨고 또 우리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가 드러나게 하는 거울이시고 또 내 죄가 부끄러운 것임을 알게 하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교회 공동체가 이런 모습이어야 새로 들어오는 신자들을 죄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같은 죄를 짓는 공동체에서 죄를 고백해봐야 부끄럽지 않아서 죄에서 돌아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룩한 공동체를 형성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부끄럽지만 내 죄를 고백할 대상이나 공동체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을 거룩하게 하도록 반드시 그러한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실험자가 지도를 들고 길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지도를 보여주며 길을 알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행인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큰 나무판을 든 사람들이 우르르 지나가고, 동시에 지도를 든 실험자를 비슷하게 생긴 사람과 바꿔치기합니다. 행인은 과연 실험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까요?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대부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성별이 바뀌었음에도 알아채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주의 깊게 변화를 보지 않아서일까요? 
 
실제로 우리 뇌는 변화를 생각보다 섬세하게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나 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관심이 없는 것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기본적으로 인지능력의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는 인간입니다. 특히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겸손은 말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계속된 성찰과 묵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나의 실수를 줄이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들게 됩니다. 
 
헤로데 영주가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는 몹시 당황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지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디아 딸의 청에 의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사실 은근히 제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헤로데 영주에게 세례자 요한은 사사건건 자기 일에 반대하는 귀찮은 방해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라는 생각보다는 약속을 지킨다고 생각하고서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민중 속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죽었던 요한이 부활하여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있다느니, 엘리야가 다시 살아났다느니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자기가 지은 죄를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을 자기가 죽인 요한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했지만, 오히려 마음의 상태는 맨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가장 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었지만, 가장 힘없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대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라 생각했지만, 가장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자기 인지능력을 대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겸손을 통해 우리는 제대로 된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삶의 후회를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잘못된 점만 찾지 말고, 해결책을 찾아라.

- 헨리 포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 9)

 

가을은 소문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 느낌으로 만나는 참 좋은 계절입니다. 참된 만남은 헛된 소문을 뜬소문을 따르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참된 만남을 바탕으로 깊어집니다. 

백 마디의 말보다 단 한번의 올바른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삶은 살아가는 삶 자체에서 다시 만납니다. 신앙인의 기준이자 신앙인의 정확한 실체는 올바른 실행입니다. 신앙인의 정체성은 올바른 삶으로 결정됩니다. 

올바른 삶은 이타적인 삶으로 드러납니다. 이타적인 삶은 성 요한 세례자가 보여준 간절한 믿음입니다. 소문은 더 많은 의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간절한 믿음은 참된 중심을 잡아줍니다. 중심이 없으면 삶은 변덕스러워집니다. 

의심과 중심 사이에 참된 믿음이 있습니다. 믿는 만큼 깊어가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은 선구자적인 삶을 살다가 떠난 성 요한 세례자의 삶의 중심점입니다. 

삶의 중심점이 없다면 믿음은 소문으로 또 다시 죽어가는 사문화의 용어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우리는 어디에 중심을 두고 어디에 에너지를 쏟으며 살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소문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닌 믿음을 품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들의 정체는 올바른 믿음이며 간절한 실천입니다. 간절한 중심점에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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