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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
2022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코헬렛은 젊음의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라며, 먼지는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니 모든 것이 허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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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9장 43ㄴ-45절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승주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24일 (토)
김승주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주신 멜키올 신부 강론
2022년 9월 24일 (토)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늘 하느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라.
제1독서 코헬렛의 저자는 인생의 젊음과 아름다운 시절을 기쁘게 즐기되, 하느님의 심판과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만족과 기쁨에 빠져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노년과 죽음 그리고 심판의 때가 올 것을 알고 늘 하느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기쁘고 모든 일이 잘될 때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찾는 이라야 시련과 불행이 닥칠 때도 그 가운데서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 의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첫 번째 수난 예고(루카 9,22)에 이어,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 일을 전합니다. 사실 이때는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9,28-36)과 더러운 영을 권능으로 쫓아내신 일(9,37-43) 바로 다음으로, 모든 이가 예수님을 매우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루카 18,32; 24,7.20 참조).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으로 어깨가 으쓱하며 한껏 우쭐해졌던 탓인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선뜻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에 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아직은 불길하고 굴욕적인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이 그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작은 시련과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곤혹스럽고 피하고 싶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을 더 열심히 찾게 되고, 그분의 도움과 은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게 되니 그 또한 감사드릴 일입니다.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일상일수록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 시련과 단련의 시기를 만날 때도 한결같은 믿음과 평화 속에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이 아니면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라’는 번역이 과연 잘 된 번역일까요? 색안경을 끼고 보면 이 번역은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즐기라’는 것이 퇴폐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의미라면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지금의 번역보다 앞선 공동번역성서를 보면 사실 오해를 살만한 면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아, 청춘을 즐겨라. 네 청춘이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겨라. 가고 싶은 데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아라.
그러나 즐기라는 말이 영어로 ‘Rejoice’라고 하고, 개신교 번역에서는 ‘즐거워하라’라고 하는 것을 보면, ‘환호하라’, ‘크게 기뻐하라’, ‘크게 즐거워하라’라는 뜻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철학에서 쾌락주의도 나쁜 것이 아닌데 많은 오해를 받습니다. 에피쿠로스가 얘기하는 쾌락은 일시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오히려 절제하고 어떤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곧 아타락시아의 경지이며, 고통의 부재 또는 고통의 극복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젊은이가 우울증에 빠지거나 비관주의적이거나 고통에 함몰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산다면 이 얼마나 불행입니까?
더 쉽게 얘기하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때 유행했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떻게든 즐겁게 살려는 ‘태도’입니다.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라는 저의 행복론과도 통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제가 무조건 행복하려는 것은, 억지가 아니라 행복이 조건에 의해 좌우돼서는 안 되겠다는 저의 의지이고 태도지요. 가난하면 불행하고 부유하면 행복하다면 그것은 돈에 좌우되는 행복이라는 것이고, 그만큼 불완전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코헬렛서는 근심에 머물지 말고, 고통에만 머물지 말라는 뜻으로 이렇게 얘기하지요.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그러니 더 큰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근심과 고통이 마음 안에 머물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수난과 십자가의 길에는 발을 내딛지도 말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이니 사는 동안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플라세보 효과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무 효과가 없는데도 사람의 신념에 의해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말기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의 몸에는 야구공만 한 종양이 자라고 있었지요. 마침 신약이 나왔고, 주치의는 획기적인 신약이 나왔다며 이 약의 효능을 설명하고 환자에게 주사했습니다. 주말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환자의 상태가 좋아졌습니다. 종양도 절반도 줄었고, 10일 후에는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퇴원한 지 두 달 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신약의 효과로 점점 좋아졌던 환자가 왜 이렇게 안 좋아졌는지를 보니, 자신에게 사용된 신약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신문 기사를 봤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에 절망한 그는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졌고 이틀 만에 사망했습니다.
대만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스님께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습니다. 절망에 빠진 스님은 자기 스승을 찾아가 이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빨리 가느냐, 좀 늦게 가느냐의 차이뿐이다.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이니 사는 동안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이 말에 용기를 얻어 ‘시한부 환자’라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현재 20년이 지났음에도 열정적으로 살고 계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가져야 할까요?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저 열심히, 열정적으로 후회 남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의 스승이 수난과 죽음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벗어버릴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을까요?
걱정하고 두려움 속에서 힘든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을 사는 제대로 된 마음이 필요함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영광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욕심보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지금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영광만을 추구하다가는 커다란 실망 속에서,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광을 바라보며, 지금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열정적으로 후회 남기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
- 박민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루카 9, 44)
넘겨지고 내어맡기는 곡식과 열매의 여정이 우리를 살게하는 생명의 선물이 됩니다. 생명의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 생명의 사람이 사람을 죽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묻게됩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넘겨지심으로 사람을 보게하시고 사람을 도우십니다. 삶의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넘겨지시는 십자가의 수난으로 참된 사랑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넘겨지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넘겨지시며 당신 사랑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주면 줄수록 커지는 사랑의 기쁨입니다. 사랑하기에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넘겨진다는 것은 내려놓는 의미이며 이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넘겨지는 사랑으로 십자가를 껴안는 것입니다. 배신하고 절망하고 아파하는 십자가가 하느님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넘겨지심으로 우리 또한 십자가에 참여할 은총을 얻었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성장시키십니다. 십자가의 수난은 하느님의 약함과 무능이 아닌 우리를 향한 끝없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은 넘겨지시는 내어드림같이 이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내어맡기는 믿음의 여정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우리들과 함께 믿음으로 이 일을 시작하십니다. 넘겨지시고 내어드리시는 새로운 방식이 참된 관계이며 참된 믿음이 되었습니다. 내어드리는 오늘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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