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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26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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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

 

 

2022년 9월 26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욥의 모든 소유를 치셨지만,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9월 26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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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크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고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약속하신 그곳으로 저희가 달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9장 46-50절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승주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26일 (월)
김승주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26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욥의 기도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시자(루카 9,44-45 참조), 제자들은 그분의 최측근으로 얻어 누릴 영광을 기대한 듯 자기들끼리 서열을 매기려 합니다. 이토록 완고한 모습에 진노하실 만도 한데, 예수님의 교수법은 달랐습니다. 아직 어리석기만 한 제자들의 수준에 맞추어, 가장 작은 이들을 섬기는 겸손으로 얻게 될 영광을 다시 한번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신 말씀은, 어린아이처럼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마치 당신인 듯 받아들여 달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선을 넘고 내 감정과 삶을 마구 헤집으며 나를 이기려고만 하는 이를 미워하고 앙갚음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사람, 못난 나보다 더 못나 보이는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이 계시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참아 내고 용서하는 사람. 그가 당신 눈에는 진정으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 속하지 않는 이에게도 이런 겸손과 포용의 마음으로 대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제1독서의 주인공 욥은 흠 없는 의인이었지만, 하느님과 사탄의 내기로(의인의 수난을 ‘하느님께서 다 아셨고 허락하신 일’로 표현하기 위한 소재) 자연재해와 약탈자들의 손에 모든 재산과 자식들마저 잃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하고 드렸던 욥의 기도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욥의 삶이 그분께 영광과 승리가 되었듯이, 일상 속 고난과 시련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직 주님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삶도 하느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탄도 이용하시는 하느님

 

오늘 욥기를 보면 역시 하느님은 다르십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다릅니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사탄에게 지지만 하느님은 그리고 하느님 사랑은 사탄마저 이용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랑은 사탄과 고통을 압도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탄보다 강하고 고통보다 강합니다. 

오늘은 이점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스콧 팩이라는 심리 정신과 박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제가 알기로 개신교 신자이고 대부분의 심리 정신과 전문가들과는 달리 악령의 세계를 인정하고 심리와 정신과 영의 관계를 정면으로 다루는 분입니다. 

그분의 주장을 제가 다 그리고 잘 소개할 수 없지만 제가 이해한 한도에서 말씀드리면 악령은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을 숙주 삼고 자기 하수인으로 만든다고 주장하는 분입니다. 

이는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뚫지 못하지만 약한 사람을 공격하여 쉽게 무너뜨리는 것과 같지요. 

그렇다면 누가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일까? 이에 대해 그는 사랑이 강한 사람이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하다고 합니다. 

이런 그분의 주장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강한 사람은 악령이 고통으로 공격해도 너끈히 방어하는 데 비해 사랑이 강하지 않은 사람은 조그만 고통에도 쉽게 악령에게 굴복하고, 악령이 아니더라도 고통에 의해 쉽게 그의 인생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든 자신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이 약한 사람은 고통 때문에 아주 쉽게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느님 사랑도 의심하니 이웃의 사랑은 더 쉽게 의심합니다. 

나의 고통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표시라고, 하느님은 나의 고통에 관심이 없으시다고 믿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의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오늘 욥기 1장에서는 욥이 그 엄청난 고통을 당해도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고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작고 약하기에 하느님 사랑처럼 자신 있게 그리고 모질게 욥의 믿음을 시험하거나 단련하지 못하지만 앞서 봤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욥의 이러한 믿음을 믿고 사탄을 도구로 고통을 가지고 담담하게 욥의 믿음을 시험하고 단련합니다. 

사랑하기에 마음이 아파도 매를 대고, 더 사랑하기에 이 정도면 됐다고 하며 매를 멈추지 않고 더 매를 대는 아비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름의 차이

 

“아들과 함께 운동하는 것이 제 소원이에요.” 
 
종종 자기 자녀와 함께하는 꿈을 이야기하는 부모를 봅니다. 이 꿈대로 어렸을 때는 부모와 함께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 역시 성장하면서 부모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더군요. 
 
죽이 척척 맞아 정치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부모와 문화 활동도 같이하고, 또 세계여행도 함께하는 상상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상에 충족하는 자녀 부모의 관계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치에서는 서로 정반대 견해를 보여서 토론할 수 없으며,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문화 활동이고 여행이냐며 화를 내는 부모와의 다름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이렇게 다릅니다. 살았던 시간이 다르고, 생활했던 공간이 다른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다른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해야 부모와 자녀의 만남이 가능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면 남보다도 못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일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렸을 때, 동네에 찾아온 약장수 무리가 기억납니다. 그들은 약을 팔기 전에 관심을 끌 수 있는 차력쇼를 했습니다. 그래서 동네의 모든 아이가 약장수 근처에 모입니다. 그때 약장수 무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약을 사지 않으니, 굳이 있을 필요가 없었겠지요. 애들을 무시하는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불과 4~50년 전에도 그러했는데, 예수님 시대는 어떻겠습니까? 아직 미성숙한 존재로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역시 다름의 차이인데 말이지요.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런 다름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성공하고 싶다면 봉사하라. 그것이야말로 인생에 있어 불변의 법칙이며 그것이 당신을 성공으로 이끄는 왕도이다.

- 헨리 밀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큰 사람 작은 사람의 어리석은 이 논쟁은 허무하게 스러지는 포말과도 같이 삶의 본질을 놓치게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시 겸허한 자세로 주님을 따라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살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 모두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좋은 스승들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이 와도 소중함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같이 낮아지심으로 사람을 얻습니다. 사람을 얻으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자신의 삶을 보게됩니다. 진리를 찾는 모습은 언제나 작아지고 낮아지는 가운데 만나게되는 기쁨입니다. 복음은 우리들 마음의 성숙과 정화로 우리를 이끕니다. 더 낮은 곳에서 행복해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꽃을 만나면 꽃이 되시고 어린이를 만나면 어린이가 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십니다. 

우리들 만남이 이렇듯 큰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작은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귀중한 만남 소중한 열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어린아이같이 순수하며 낮아지는 만남입니다. 오늘도 겸손과 사랑의 참된 날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막을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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