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28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28.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9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

 

 

2022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욥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며 누가 그분과 겨루겠냐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하시며,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9월 28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크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고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약속하신 그곳으로 저희가 달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9장 57-62절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준호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28일 (수)
이준호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28일 (수)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예수님을 따라나서려던 세 사람의 이야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라나서려던 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나눈 대화마다(루카 9,57.59.61 참조) ‘주님을 추종하여 따름’을 표현하는 특별한 그리스어 동사 ‘아콜루테오’(따르다)가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앞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마태오가 그분을 따라나선 대목에서도 사용됩니다(루카 5,11.27.28 참조). 

이를 통하여 루카 복음사가는, 이 세 사람의 어정쩡한 태도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제자들의 모습과 병행시켜 대조적으로 드러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어디로 가시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하지만, 이는 마땅한 거처도 없이 공생활 내내 떠돌아다니시던 예수님과 일행의 삶을 알지 못한 채 드린 공허한 다짐일 뿐입니다. 또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은 각각 아버지의 장례와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를 더 우선시합니다. 

물론 유다인들에게 장례는 자식의 마땅한 도리고(토빗 4,3-4; 14,11-13 참조)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 또한 인지상정이지만, 그 어떤 관행이나 기본적인 도리도 결코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 욥은 “그분께서 잡아채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누가 그분께 ‘왜 그러십니까?’ 할 수 있겠나?”라며, 하느님께 순명하는 데는 그 어떤 조건이나 타협도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차마 세상의 방식대로 할 수 없어 무엇인가를 포기해야만 하고 신앙 때문에 불편을 겪을 때마다, ‘그래, 내가 지금 주님을 올바로 따르고 있구나!’라고 확신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사람의 일이 결코 하느님의 일보다 먼저일 수 없다는 소신을 품고서,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말고 단호히 구원 여정을 이어 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침묵의 뜻

 

오늘 욥기의 얘기는 두 번째 친구의 충고에 대한 욥의 대구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느님께 충실한 신앙인이고 고통받는 친구에게는 우정이 있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욥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서는 같이 목 놓아 울고 겉옷 찢고 머리에 먼지를 얹고 이레 동안 아무 소리 없이 함께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괜찮은 친구들입니까? 

그러다 어제 본 것처럼 극심한 고통 때문에 욥이 자기 인생을 저주하고, 고통에서 건져주시지도 않고, 죽여주시지도 않는 하느님께 원망하자 친구들은 한편 하느님을 변호하고, 다른 한편 욥에게 충고를 합니다. 

첫째 친구는 불행의 근원에 대해 얘기하며 미련한 자는 역정을 내다가 죽고, 우둔한 자는 흥분하다가 죽는다며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에게 투덜거리지 말고 하느님께 호소하라 하고 그러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이라고 하느님을 변호합니다. 

둘째 친구는 욥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토로하며 자기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 이런 고통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잘못이 없는데도 하느님께서 터무니없이 벌을 내리시겠냐며 악인에게는 가차 없으시고 의인은 살리시는 정의로운 하느님이라고 변호합니다. 

그러니 욥의 친구들은 틀린 말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변호하느라 욥의 심정을 그저 알아주는 데는 실패합니다. 

그래서 욥은 나도 그런 줄 알고 있다며 그러나 지금 자기가 느끼는 절망스러운 하느님에 대해 오늘 얘기합니다. 

인간이 고통 한가운데 있을 때 느끼는 하느님은 절망스러운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절망스러운 하느님이란 첫 번째로 독단적인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지혜가 충만하시고 능력이 넘치시는 분”이시고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측량할 수 없는 위업을 이루시는 분”이시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하시어 그것을 뒤엎으시는 분”이시며, 이에 대해 왜 그러시는지 아무 설명 없으시고, 우리 인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느님은 매우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하시다는 것은, 능력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나 힘 세다는 뜻에서 강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과 호소에도 꿈쩍 않고 물러서지 않는다는 뜻에서 강한 겁니다. 

우리 인간은 마음이 약해서 벌을 주다가도 그만두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과 호소에 꿈쩍 않으시고 냉엄하십니다. 

그래서 욥은 이런 절망스러운 말을 합니다. 내가 불러 그분께서 대답하신다 해도 내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리라고는 믿지 않네. 

그렇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고통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믿지 않고, 하느님께서 내 말 들으신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으며, 그저 침묵하시는 분으로만 느껴지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느낌입니다! 

들으시는지 안 들으시는지 알 수는 없고 그런 느낌만 듭니다. 왜 침묵하시는지 알 수는 없고 그저 침묵만 크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느낌 때문에 믿을 수 없는데, 이 침묵의 뜻을, 나중에 알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지금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시 태어나는 삶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짜 고쳐 쓸 수 없을까요? 맞다고 하면 반대의 의견을 내시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인간은 변화 가능하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과학적으로 보면, 고쳐 써서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 순간 다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사람 몸은 약 3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세포들은 매우 활발하게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세포가 생성됩니다. 하루에 3,300억 개의 세포가 새로 만들어지고 사라집니다. 이는 1초에 380만 개의 세포가 교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포로 교체되는 주기가 약 7년쯤 된다고 하더군요. 지금의 나와 7년 후의 나는 과학적으로 전혀 다른 세포로 구성된 ‘나’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삶은 고쳐 쓰는 삶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삶입니다. 이 점을 인정하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된 변화를 내 안에서 이룰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났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열정적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기존의 것을 모두 간직한 채 따를 수 있을까요? 약간의 변화를 통해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야 제대로 따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제자가 되어 따라다니겠다고 청원합니다. 그는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자기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사제 간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인생을 배우는 사제 간의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따르는 완벽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새롭게 태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말에도,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는 말을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일에 대해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하셨으며, 엘리야 예언자도 허락했었던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에 대해서는 “쟁기에 손을 대가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로지 달려야 할 길만을 꾸준히 달리고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고침으로 충분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물 흐르는 대로 휩쓸러 가지 않고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멈춰 서서 고민하고 사색하는 것. 의구심은 사람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에너지가 된다.

- 야마자키 마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루카 9, 58)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외로움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외로움까지 이해하고 받아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외로움이 우리의 외로움을 위로하여 주십니다. 외로움의 시간이 주님의 말씀을 듣는 깨어있는 은총의 시간이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주님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외로움을 보게됩니다. 

외로움은 제 자리를 찾게 하는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외로움도 주님을 향하면 만남의 힘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견디어 나가는 공동체의 힘이 됩니다. 공동체에 살고 있어도 때로는 외롭습니다. 그 누구도 외로움 앞에 예외일 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는 외로움의 길도 있었습니다. 

따뜻한 사랑을 실천하고 선포하는 이들의 외로움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외로움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따뜻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외롭기에 간절했던 주님의 사랑이 목마름이 아닌 서로를 인정하고 따뜻이 바라보는 사람다운 사람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외로움 또한 믿음이 됨을 깨닫습니다. 제 자신과 싸웠던 내면의 시간 그 외로움의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봉헌의 시간임을 알기에 머리 기댈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든 길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을 깊어지게 사랑을 간절하게 만드는 우리 존재의 외로움입니다. 사랑과 외로움이 다시 기도로 올려드리는 공동체의 새날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