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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27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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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

 

 

2022년 9월 27일 (화)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욥이 제 생일을 저주하며,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하고 탄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9월 27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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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가난한 이의 복지와 성직자 양성을 위하여 복된 빈첸시오 사제에게 사도의 열정을 부어 주셨으니 저희도 같은 정신으로 그가 사랑한 것을 사랑하고 그가 가르친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9장 51-56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영중 미카엘 신부 강론

 

 

2022년 9월 27일 (화)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이영중 미카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9월 27일 (화)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증오와 원망이 아닌 온유와 겸손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 곧 당신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을 위한 마지막 때가 왔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여정의 첫 순간에 마주한 사람들의 외면과 배척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실 여정의 마지막까지도 이어질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것은 유다인들을 향한 오랜 반감과 더불어, 그분께서 그리짐산에 있는 자신들의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런 사마리아인들을 두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살라 버리겠다.’고 한 것은, 지난날 엘리야 예언자가 자신을 잡으러 사마리아에서 온 이들을 하늘에서 내린 불로 살라 버린 일을(2열왕 1,10.12 참조) 떠올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냉대와 무시에 분개하여 복수를 떠올린 제자들을 꾸짖으셨는데, 몇몇 수사본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목숨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하려고 왔다.”(루카 9,56, 『성경』 각주 참조)라는 말씀을 덧붙여 그분의 속마음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시기 전에 제자들도 장차 당신처럼 사람들에게 외면과 박해를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그들의 선의가 짓밟힐 때가 오면, 증오와 원망이 아닌 온유와 겸손으로 그 사명을 이어 갈 힘을 지니도록 미리 단련시키셨습니다.

제1독서에 따르면 욥과 같은 의인도 까닭 없는 고통과 지독한 시련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처량히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파견된 주님의 사도임을 기억합시다. 

내 진심을 왜곡하는 이들이나 거룩함을 간직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일들을 만날 때, 흔들림 없는 내적 평화와 온유를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필요한 힘과 지혜를 주님께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섣부른 찬미가

 

오늘 욥은 자기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자기 인생을 저주합니다.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그런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어제 자신의 재산과 종들과 가족을 다 잃고 난 뒤에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라고 하느님을 찬미한 그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욥의 고통이 한층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한 층이 더 커진 것이 아니라 두 층, 세 층이 더 커진 때문입니다. 

어제 얘기에서도 욥의 고통은 가중되었었지요. 먼저 소와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양과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낙타와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자식들이 다 죽었지요. 

이때까지는 하느님이 주셨던 것 하느님이 가져가시니 하느님은 찬미 받으시라고 하느님 찬미를 합니다. 이것만도 사실 하느님께 대한 대단한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그런데 소유물에게는 손을 대도 욥에게만은 손을 대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사탄이 욥의 목숨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지독한 피부병을 앓는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래서 욥은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차라리 내가 아픈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고, 고통을 실제로 겪게 되면 욥처럼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너의 죽음보다 내 몸의 가려움이 더 큰 고통이고, 너의 다리 절단보다 내 손의 가시가 더 아픕니다. 

그러므로 찬미하던 욥의 입에서 어떻게 저주가 나오는지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하고 같은 맥락에서 저는 저를 반성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숙제처럼 안고 있습니다. 

왜냐면 저는 한 번도 저의 출생과 인생을 저주한 적이 없습니다. 사춘기 때 빼고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한 번도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고통이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렇게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없었다는 얘기이고, 그러니 이런 제가 고통이니 사랑이니 감사니 찬미니 얘기하는 것이 어쭙잖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일생을 장애를 안고 사는 분들이나 지병을 앓는 분들 앞에서 저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없고 인생이 뭔지 안다고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수도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제이기 때문에 인생을 운운하고 저보다 더 크고 더 긴 고통을 겪는 분들에게 위로니 격려니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저주를 볼 때 어제 욥의 찬미는 섣부른 찬미였다고 할 수 있는데 욥처럼 큰 고통을 겪는 분들을 볼 때 저의 사랑 찬가나 하느님 찬미는 욥의 찬미보다 훨씬 더 섣부른 찬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섣부른 찬미가에서 성숙한 찬미가가 될 수 있도록 큰 고통을 주십사고 청하지도 못하는 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새벽, 비록 이 섣부른 찬미가인 제가 저 스스로 큰 고통을 주십사고 청하지는 못하지만, 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께서 더 큰 고통을 제게 주실 때 잘 견딜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분노는 칼과 같아 쓰는 법에 따라 의사도 되고 강도도 된다.

 

단편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2015)는 형벌 제도가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여자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합니다. 처음엔 팔 한쪽, 그다음엔 나머지 팔과 한쪽 다리, 그다음엔 신장과 허파 하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잘라가며 자신의 분을 풉니다. 코와 입술, 귀까지 잘린 범죄자는 더 이상 살아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냥 망연자실합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아버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피해자의 고통과 그것에 비해 약한 처벌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 가서는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마가 되어가는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보복하면 딸이 살아날까요? 그리고 그 보복은 그 사람 전체에 대해 행해져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식의 분노는 그 사람의 마음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어 나중엔 이런 소리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죄 안 지었냐?”

부모가 화가 많으면 자녀도 화가 많은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방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금자 씨’에서 감옥에 갇혀있던 금자 씨에 안 좋은 감정을 품고 다가온 목사님에게 금자 씨가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게 지적할 때 “그러면 너는?”이라고 자동으로 질문합니다. 이것이 본성입니다. 그리고 상대에게도 단점이 있다는 것이 발견될 때는 절대 그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부모가 분노를 터뜨려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그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 명확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메스를 들었다고 다 의사가 아닙니다. 마구 휘두르면 강도이고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에게 화를 내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마리아 마을을 불살라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들의 분노는 예수님의 분노와 다릅니다. 예수님도 성전을 정화할 때, 그리고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실 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분노는 그들을 고치려는 의사의 분노였습니다. 성전 전체가 아닌 성전을 더럽히는 탐욕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 전체가 아니라 자기만 생각하게 만드는 그 안의 사탄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유다 지도자들도 그들의 위선과 교만에 대해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의사로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 수술을 받아들이면 고쳐지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사의 분노를 터뜨리는지 강도의 분노를 터뜨리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형제에게 성을 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사탄에게는 화를 내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화를 내도 되고 죄에 대해서도 화를 내도 됩니다. 예수님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 전체에 대해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재판에 넘겨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용서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분노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분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살인자에게 분노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그렇게까지 이끈 사탄에게 분노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트레이 알렉산더 랠포드, 나는 당신이 가엾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어서요. 내가 도와주고 싶습니다. 선량한 시민으로 자라도록 아들을 도운 것처럼요. 살라후딘이 여기 있었다면, 살아 있었다면, 당신을 용서했을 겁니다. 그게 아들의 방식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화가 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 아들을 해쳤다고 해서요. 나는 악마에게 화가 납니다. 악마를 탓합니다. 당신을 잘못 이끌어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인도했으니까요. 당신 탓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전혀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걸 꼭 알아주세요.”

우리가 화를 터뜨릴 대상은 사람이 아닌 사람을 그렇게 이끄는 사탄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도시와 같아서 사람 전체에 분노하면 정의롭지 못한 인간이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도 하느님은 그 안에 살던 롯의 가족은 빼내셨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것이 정의입니다. 좋은 것도 분명 들어있는 사람 전체에 분노하지 맙시다. 그러면 의사가 아닌 강도로서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함께해야지만 구체적으로 서로에게 존재할 수 있다.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에 타고 있던 닐 암스트롱이 처음으로 달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면서 달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달은 그저 신비로운 장소일 뿐이었지요.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는 옥토끼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나라에서 달이 가장 큰 보름에 맞춰 농경 사회에 의미 있는 행사(정월대보름, 백중, 추석)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달에 직접 갈 수는 없고, 눈에 보이기만 하니 그냥 신비로운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달 착륙 후 신비로움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의 이웃과 함께해야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혼자만 살면 그만이라면서 함께하는 자리를 피한다면 사람의 기억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에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자기의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해야지만 구체적으로 서로에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신적 존재가 아니기에 절대로 사람들과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던 예수님께서는 심부름꾼을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보내서 숙박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그 전에 이미 사마리아 지역에서 환영받아 머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영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다인들이 과월절을 지내는 곳은 시온산, 즉 예루살렘입니다. 그에 반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과월절은 그리짐산에서 지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가는 예수님 일행을 환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전례적인 이유로 거부했던 것이지요. 
 
여기서 제자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격분해 못 참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자기 스승께 대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홀대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은 누가 내릴 수 있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어떤 불도 내릴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하는 마음 자체가 없으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폭력적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든 함께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이웃들과 함께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신비의 차원이 아닌, 구체적으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물 흐르는 대로 휩쓸러 가지 않고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멈춰 서서 고민하고 사색하는 것. 의구심은 사람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에너지가 된다.

- 야마자키 마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루카 9, 51)

 

뜨거운 결심은 뜨거운 실천을 낳습니다. 예수님의 굳히신 마음이 십자가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흩어진 우리 마음을 모으는 일이 가장 좋은 사랑입니다. 가장 좋은 사랑은 인생의 참된 가치와 참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가장 존귀한 일은 가난한 이들을 돕고 사랑하는 봉사입니다. 봉사의 기쁨은 삶의 새로운 안목을 제공합니다. 

새로운 안목이란 복음의 기쁨인 새로워진 마음과 하느님 중심의 실천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웃들을 대하고 있는 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을 끝까지 돌보았던 빈첸시오 드 폴 사제의 삶이었습니다. 가장 예수님다운 삶이란 반드시 해야할 일을 피하지 않고 우리가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인식의 전환은 생각 속에 그치지 않는 복음의 실천입니다. 

복음의 실천이란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며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의 아픔에 우리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생활의 실천이 참된 봉사이며 참된 나눔입니다. 나눌 줄 알 때 만나게 되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맑으신 사랑입니다. 

생활의 실천이 십자가이며 부활의 삶임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아름다운 생활의 실천이십니다. 우리의 오늘이 뜨겁고 맑은 생활이길 기도드립니다. 신앙인의 생활은 뜨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여정이 참으로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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