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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
2022년 9월 30일 (금)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자, 욥은 보잘것없는 몸이 주님께 무어라 대답하겠냐고 응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는 고을들에게, 당신을 물리치는 자는 당신을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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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복된 예로니모 사제에게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맛들이게 하셨으니 저희도 하느님 말씀에서 생명의 샘을 찾고 구원의 양식을 얻어 더욱 풍요로이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10장 13-16절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준호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30일 (금)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준호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이길재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30일 (금)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신앙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호되게 꾸짖으신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의 북쪽에 자리한 성읍들로, 그분께서 공생활 시작부터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마귀 들린 이들과 수많은 병자를 기적으로 치유하신 곳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 주민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무심하게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돌밭과 가시덤불에 떨어져 말라 버린 씨앗처럼 죄와 불신 속에 변화를 거부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 받게 될 혹독한 징벌을 예고하십니다.
그 징벌이 사치와 교만과 우상 숭배로 타락하였던 이방 도시 티로와 시돈에 내려진 죽음과 멸망의 심판(이사 23장; 에제 26─28장 참조)보다 훨씬 무겁다고 하신 것은, 티로와 시돈은 예수님의 복음과 기적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데 비하여 이 세 성읍의 주민들은 그것을 다 알면서도 제 의지로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것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 무엇도, 지킬지 버릴지 판단할 대상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실천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일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정하신 질서입니다. 신앙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론적 응답입니다.
마치 까닭 없는 극한의 고난 속에 하느님께 자신의 의로움을 강하게 주장하며 끈질기게 답변을 요구하던 욥이, 창조주이신 그분의 절대적 주권 앞에서 입을 가리고 침묵하며 승복함으로써 완성한 그 믿음처럼 말입니다(제1독서 참조).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야말로 당신과 그리고 성부와 영원한 일치에 동참하는 가장 존엄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복음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세상에 파견된 주님의 제자로서 그 진리를 주위에 증언하는 삶으로, 모든 순간 하느님 앞에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고통의 신비
고통은 신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고통을 겪고 있기에 뭔지는 어렴풋이 알지만 왜 고통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 말은 이런 뜻도 됩니다. 고통이 왜 있는지 불교가 얘기하는 이유는 명확하기에 불교에서는 고통이 신비라고 할 것이 못 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고통의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기에 신비라고 한다고.
불교의 고통은 자업자득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자기 업보라고 말하지요. 쉽게 얘기하면 다 자기가 잘못해서 고통을 겪는 것이고 누구의 탓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고통은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고 그래서 신비라고 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왜 고통이 나왔는지. 다시 말해서 사랑이신 하느님이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지. 왜 착한 사람에게 고통이 있고 악한 사람보다 더 고통이 큰지.
그런데 하느님이 왜 그리하셨고, 하느님이 왜 그러신지를 알 수 없는데, 실은 고통에 대해서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신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오늘 욥기는 왜 고통이 있는지 따지는 욥에게 모든 것이 어떻게 있게 되었고, 어떻게 그리되는지 아느냐고 물으시고, 그 모든 것들은 네가 모르는 영역이며, 하느님 당신의 영역이라고 하십니다.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고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 죽음의 대문이 네게 드러난 적이 있으며 암흑의 대문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
신비는 하느님의 비밀이고, 인비 곧 인간의 비밀과 다른 하느님의 비밀입니다. 인간의 비밀도 알 수 없고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데 하느님의 비밀은 더더욱 알 수 없고,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의 비밀을 인간이 알려고 하지 말고, 따지지 말라는 것이 오늘 욥기의 하느님이 욥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오늘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욥은 이제 받아들입니다.
지금까지 욥은 친구의 훈계가 아니라 주님의 답이랄까 음성을 듣고 싶었던 겁니다. 그 이유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신비이어도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고통은 신비이니 알려고 들지 말고, 다 이해하려고 들지 말며 따지는 것은 더더욱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부터 제가 연피정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혹 프란치스코 대축일에는 올리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돌아와 다음주 토요일부터 강론을 올리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직도 완벽한 배우자를 못 찾았습니까?
젊었을 때부터 ‘완벽한 배우자’가 아니면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노총각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완벽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계속해서 여성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20년이 지나도 이 형제님은 결혼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였습니다.
어느 날, 이 형제님의 지인이 “아직도 완벽한 배우자를 못 찾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님께서는 만났었다고 고백합니다. 지인은 깜짝 놀라서 “그렇다면 왜 지금도 혼자예요?”라고 물었지요. 이 형제님께서는 한숨을 내쉰 뒤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딱 한 번 완벽한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완벽한 남성’을 찾고 있더군요. 그래서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완벽한 배우자만 찾고 있었지, 본인 스스로가 ‘완벽한 배우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실 자기의 완벽함을 채우는 데 먼저 집중했어야 했습니다.
우리 일상 삶 안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대방의 완벽함을 요구하면서, 조금이라도 부족한 부분에 관해서는 철저히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자기의 완벽함 정도를 먼저 봤어야 합니다.
하느님만이 완벽하시고, 그에 반해 인간은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은 기억한다면 남에게 너그럽고 관대한 모습을 늘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즉, 남에는 엄격하고, 자기에게만 관대합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도시들은 율법 학자들의 종교교육이 가장 성행하던 종교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만과 자기도취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했고,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고개를 돌렸습니다. 종교도시였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곳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말을 듣던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완벽하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는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단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철저히 사랑이 기초해서 했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율법도 모르고 율법을 따르지 않는 잘못된 사람이라고 단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모두는 예수님 말씀처럼 현재 폐허만 남아 있거나 아예 흔적도 없습니다.
자신의 완벽함을 생각하며 남을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본모습을 인정하면서, 다른 이에게 너그럽고 관대한 사랑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그래야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아니라,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 오드리 헵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이 모든 것은 마음에서 멀어집니다. 성경을 알고 읽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가장 깊은 체험입니다.
성 예로니모는 성경을 라틴 말로 번역할 정도로 뜨거운 열정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번역하며 많이 힘들었지만 가장 깊은 은총을 체험한 당사자는 예로니모 성인 자신이었습니다. 자기자신에게 철저했던 성 예로니모 사제이었습니다.
성경 번역의 과정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일상에서 만나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잘 전달하는 길은 먼저 자신이 말씀의 삶을 살지않고서는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상호관련성을 지닙니다. 말씀과 삶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새로운 수용이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번역은 해석입니다. 해석은 일상적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가 모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은총 또한 성 예로니모 사제같은 분들의 뜨겁고 치열한 성실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말씀의 결실은 소통의 풍부한 결실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는 이렇듯 이질적인 언어가 번역을 통하여 새로운 일상을 다시 만나게 되는 기쁨이 됩니다. 말씀의 대중화는 믿음의 확장성을 내포합니다.
삶의 과정에 충실했던 성 예로니모 사제처럼 우리 또한 말씀과 함께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만나는 은총의 오늘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말씀과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삶 또한 사랑으로 깊어집니다.
말씀과 삶 말씀과 사랑이 다시 말씀으로 풍요로워집니다. 말씀의 여정이 살아계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가장 생생한 삶의 여정이 됩니다. 가장 아름다운 보화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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