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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23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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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

 

 

2022년 9월 23일 (금)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코헬렛은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데,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9월 23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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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특별한 은총으로 거룩한 비오 사제를 성자의 십자가에 참여하게 하시고 그의 사제 직무를 통하여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새롭게 베푸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를 그리스도의 수난에 결합시키시어 빛나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9장 18-22절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이규황 마태오 신부 강론

 

 

2022년 9월 23일 (금)
이규황 마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이길재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9월 23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어제 복음에서 헤로데의 의문으로 제기된 예수님의 신원 문제는 오늘 복음으로 이어집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드린 답변은, 안타깝게도 헤로데가 전해 들은 소문(루카 9,7-9 참조)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는 ‘되살아난 옛 예언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 임금으로 삼으려고나 하였을 뿐(요한 6,15 참조), ‘수난을 겪는 메시아’ 곧 백성에게 배척을 받고 돌아가심으로써 그들 모두를 구원하실 구세주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이러한 몰이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살리는 그 길을 방해 없이 끝까지 가시고자 베드로에게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코헬렛의 저자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치 오늘 복음의 군중처럼 가끔은 우리도 하느님의 계획을 헤아리지 못하고, 당장의 변화만 바라다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군중의 몰이해와 외면을 이겨 내는 세월 끝에 성부께서 계획하신 구원을 이루셨고, 성 비오 사제도 오십년이 넘게 오상(五傷)의 고통을 참아 내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면, 우리라고 어찌 그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건너뛸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우리를 위한 최선의 때와 방식을 마련해 두셨음을 확신하며 언제나 희망 안에서 이 구원의 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줄탁동시(啐啄同時)

 

오늘 코헬렛서의 말씀은 때는 다 정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때의 주인이 우리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리고 정해진 때를 거슬러 우리가 뭣을 하는 것은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가장 대표적으로 정해진 것이, 바로 우리가 태어날 때와 죽을 때입니다. 

태어날 때를 내가 정하지 않았고 죽을 때를 내가 정할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태어나고 죽을 때만이 아니라 많은 것들의 때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8월 중하순에 배추와 무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것을 지금 뿌리거나 10월에 뿌리면 아무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그러면 누가 이때를 정한 것입니까? 당연히 하느님께서 정하셨다는 것이 코헬렛서의 가르침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가운데는 이런 믿음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만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어리석기에 그럴 수도 있는데 교만한 사람은 인간이, 때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연의 순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어제 어떤 할머니를 만났는데 마치 오늘 이 얘기를 하려고 만난 것 같았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아주 열심히 천주교를 믿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냉담 중이신 줄 알았는데 말씀을 계속 들어보니 뉴에이지 류의 자연 근본주의 이단에 빠져 계신 것 같았습니다. 

긴 얘기를 짧게 하면, 인간의 생로병사가 다 자연에 따른 것인데 과학적으로 확증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하신 거라고 인간이 믿는 것일 뿐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렇지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고 증명된 것은, 아는 것이고 알면 되는 것이지 굳이 믿을 필요까지 없겠지요. 

그런데 얘기를 다 듣고 보니 당신이 열심히 믿었다는 것이 실은 열심히 믿고 청했다는 뜻이었고 그런데 하느님께서 안 들어주셨으니 하느님은 안 계시거나 안 들어주시는 분이니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거였습니다. 한 마디로 내 뜻대로 안 들어주시는 그런 하느님은 안 믿겠다는 얘기였습니다. 

아무튼, 때의 주인, 시간의 주인이 하느님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하느님께서 때를 정하시는 데 우리의 인간의 뜻은 없습니까? 나의 때, 우리의 때를 정하실 때 독재자나 폭군처럼 당신 마음대로이십니까? 

그런데 하느님의 때는 우리의 뜻과 우리가 생각하는 때까지 다 포함하는 때라고 믿는 것이 또한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애쓴 것이 아무 보람 없게도 하시고, 우리가 고생하도록 오랫동안 내버려 두시기도 하시지만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신 그때는, 사랑의 때라는 믿음입니다.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끼 닭이 안에서 쪼는 것을 줄(啐)이라고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하는데 병아리가 알을 깨고나오는 데 있어서 이 줄과 탁이 동시에 이뤄져야지 따로 이뤄지면 안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제자의 때를 잘 알고 스승이 제때에 당겨줘야지 제자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도 빨리 깨닫게 하려고 미리 억지로 잡아당기면 제자가 깨닫지 못하거나 심지어 잘못될 수도 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그 아름다운 줄탁동시를 우리는 믿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들은 왜 나를 만만하게 보는가?

 

여기 피로와 무기력감, 자살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막 40대에 접어든 미혼 여성의 삶을 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이 여성은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연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족스럽게 살아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난 그녀는 소위 한국의 전형적인 장녀였습니다. 

아버지를 일찍이 사고로 잃은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집안의 기둥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도 사춘기도, 질풍노도의 시기도 그녀에게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네가 빨리 자리를 잡아 어린 남동생을 경제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청춘도 연애도 뒤로하고 오직 안정된 직장을 잡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남동생이 재수, 삼수를 하는 동안 학원비는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자 남동생은 그녀가 평생 엄두도 내보지 못한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를 원했고 그다음은 사업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업비용은 어머니의 대출로 이루어졌고 어머니의 대출금은 당연하게도 그녀가 갚아나갔습니다. 동생의 결혼을 여러 날 앞둔 어느 날 어머니의 다음 말은 그녀를 폭발하게 하였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 있지? 그거 네 동생 신혼집으로 주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남잔데 집 한 칸은 해줘야 사돈 보기에도 체면이 서지.”

기가 막힌 그녀가 “그러면 엄마는 어디로 이사할 건데?”라고 묻자 어머니는 당연한 듯 말했습니다. 

“너희 집으로 가면 되지. 이제 같이 나이 먹어 가는 모녀끼리 친구처럼 한 번 살아보자!”

그녀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애 처음 반대의견을 내본 뒤 돌아오는 것은 어머니의 순식간에 일그러진 얼굴과 폭언,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빨대 꽂아 다 빨아먹은 동생의 적반하장 반응이었습니다. 

“불효녀”, “욕심 많은 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누나 왜 그렇게 엄마 힘들게 해!”와 같은 비난이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는 동생이 신혼집으로 쓰고 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집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만나던 남자친구는 어머니의 반대로 헤어졌습니다. 

[출처: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시다』, 권순재, 생각의 길]

위 여성의 문제는 이전 세상을 찢을 용기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궁이 좋아서 자궁을 찢을 용기가 없다면 아기는 자궁보다 더 넓은 세상을 맛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성의 정체성의 ‘어머니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흔들리고 휘둘리고 이용당하고 가스라이팅 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것이 된다는 것에 희망을 걸지 마십시오. 나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인간은 분명 누구에겐가는 의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속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은근히 당신을 자기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들 맘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내가 나를 너무 믿기 때문입니다. 나로 사는 것이 강한 삶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에게 속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로 산다는 말은 세상 것들이나 사람들에게 다 휘둘리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떤 피조물이건 버려진 깡통과 같습니다. 나 스스로는 다른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피조물의 본성적 의존성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생존하려면 에너지를 소진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속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소멸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더욱더 누군가에게 속하려고 합니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한 불안함은 나를 의존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남에게 휘둘릴 준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휘둘리지 않는 유일한 법은 내가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는 대상의 것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대상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흔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라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20)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입니다. ‘의’가 붙으면 소유격이 됩니다. 하느님의 소유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은총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성령으로 아드님을 소유하십니다. 성령은 은총이기도 하지만 소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라지 말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아버지로부터 소명을 받지 않으면 아버지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뜻에 의해 움직일 때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만약 그 사람이 하느님이라면 그 사람은 세상 누구의 뜻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휘둘리며 살 것인가, 아닌가는 내가 누구의 것이 되느냐에 달렸습니다. 

고집부리는 것과 줏대 있는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고집부리는 사람은 분명 누군가에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입니다. 그러면 흔들립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발로 차 봅니다. 하지만 줏대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누군가의 권위에 따라 사람들은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만만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고집부리는 사람이 가장 만만합니다. 그 사람의 주인이 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차피 휘둘리게 태어납니다. ‘나’라는 존재는 실제로 어떤 권위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휘둘린다고, 나를 무시하는 거냐고 화내지 마십시오. 그건 내가 누구의 권위 있는 대상의 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용당하고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으려면 누구도 그럴 수 없는 대상의 것이 되십시오.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창조자의 것이 되십시오. 그분의 뜻을 따르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창조자로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당신 것이라 천명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뒤로 미루기만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한 소년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느 날, 쪽지 시험을 봤는데 망쳤습니다. 소년은 “다음 시험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맞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시험에도 망쳤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중간고사를 봤는데 망쳤습니다. “다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맞겠다.”라고 결심했지만, 기말고사도 망치고 말았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시험을 보고 나서, “다음 시험에는 열심히 공부하자.”라고 결심했지만, 다음 시험도 망쳤습니다.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재수할 때도, 취업 시험을 보고 나서도 “다음 시험에는 열심히 공부하겠다”라고 결심했지만 늘 망쳤습니다.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운 좋게 조그마한 회사에 취업했습니다. 이 회사에서 하는 일은 너무 하찮은 일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걸 할 사람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다 보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세상을 한탄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번 생은 틀렸어. 다음 생에는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뒤로 미루기만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면서 당신의 신원에 관한 질문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한 분이라는 대답을 합니다. 사실 제자들이 말하는 인물 모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자랑스럽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그 정답을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정답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알려주시지요. 정답을 알기에 미래의 시간을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과거에 매여있는 분이 아닙니다. 과거의 영광만을 떠올리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희망으로 이끌어주시는 분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걱정 없이 큰 기쁨을 가지고 희망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제로부터 배우고, 오늘을 위해서 사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루카 9, 22)

 

겪어야 할 우리들 삶의 고난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고난이 문제가 아니라 고난을 부정하는 우리들이 더 문제입니다. 쾌락을 누리는 길만 알지 욕망을 정화하고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고난은 알지 못합니다. 

죽는 법을 모르면 사는 법도 알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 생명의 길 구원이 있습니다. 꿰찔리는 아픔 없이는 변화 또한 없습니다.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십니다.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당신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고난으로 다시 세워지는 주님의 뜻입니다. 당신의 고난으로 우리의 상처를 꿰매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고난이 지나간 자리에서 사람의 꽃들이 피어납니다. 신앙의 길은 고난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큰 울림이 함께 아파하시는 생명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으로 회복되는 우리들 삶입니다. 이기적인 우리들만의 생존과 소유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아픔의 공감이 참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십자가는 공감의 가장 기본적인 뿌리가 됩니다. 

지극한 사랑의 진리는 언제나 십자가의 수난과 함께 우리를 이끄십니다. 고난을 통하여 반쪽짜리 삶이 온전하여 지는 믿음을 만납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는 십자가의 고난이 있습니다. 믿음과 삶은 고난으로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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