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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9월 14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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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십자가 현양 축일 -

 

 

2022년 9월 14일 (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불평하는 백성에게 불 뱀을 보내 벌하셨지만,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게 하시어 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쳐다보면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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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외아드님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저희가 지상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천상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요한 3장 13-17절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재승 요셉 신부 강론

 

 

2022년 9월 14일 (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최재승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9월 14일 (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구리뱀 사건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건너가는 두 번의 여정에서(탈출 15,22-18,27; 민수 10,11-21,35 참조) 굶주림과 갈증, 지도자의 권위에 대한 회의, 이민족의 공격으로 자주 불평과 갈등에 빠졌는데, 제1독서는 두 번째 광야 여정의 말미에 있었던 구리 뱀 사건을 전합니다.

에돔 임금이 길을 막자,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져, 모세와 아론을 탓하고 하느님의 선물인 만나를 “보잘것없는 양식”이라 폄훼하며 불평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계약을 맺고 계명을 따르기로 맹세한 이 백성이 이토록 쉽게 순명과 믿음의 자세를 버린다면 결코 가나안 땅에서 축복의 삶을 이어 갈 수 없음을 아셨기에, 광야의 불 뱀(독사)을 보내시어 그들을 나무라시며 가르치셨습니다. 

다만 백성이 불평과 불신을 멈추고 회개하였을 때에는, 모세가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을 쳐다본 이들을 모두 살게 하시어 곧바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교회의 교부들(유스티노,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은 구리 뱀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리 뱀을 달아맨 기둥을 십자가로 풀이하면서, 이 구원 사건을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형으로 가르쳤습니다.

‘빨리빨리’ 문화와 전자 기기의 즉각적 응답에 익숙해진 오늘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삶의 태도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한 영적 진보가 더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일상 속 불 뱀 같은 괴로움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더라도, 자주 시선을 들어 올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바라보며 위로와 확신을 얻는 지혜를 가집시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야지만 진짜 죽음이다. 이것은 실패란 실패로 끝날 때 진짜 실패인 것과 같다. 

뒤집어 얘기하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실패를 바탕으로 성공을 거두면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실패를 바탕삼아 재기하면 처음 실패는 작은 실패지만 재기를 포기하면 그것이 큰 실패이고 진짜 실패다. 

사랑도 실패한다면 사랑을 포기할 때 진짜 실패이기에 내 사랑이 상대에게 거부되는 실패는 작은 실패이고, 내가 사랑을 포기한 그 실패가 진짜 실패요 큰 실패이며,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사랑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축일의 감사가는 이렇게 노래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 나무에서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은 생명이 이 죽음에서 솟아나고 패배에서 승리하기 위함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십자가는 참혹한 사형의 틀이었고 그래서 예수님 전의 죄수들은 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죄로 인생을 끝내지 않도록, 그리고 죽음으로 삶이 끝나지 않도록 죽음에서 생명이 솟아나는 이 구원의 신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므로 십자가의 신비는 구원의 신비이고 사랑의 신비입니다. 구원을 위한 사랑의 형틀이 아니라면 십자가는 사형틀일 뿐이고 그래서 저주받을 것이지 현양받을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구원과 사랑의 신비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으니 이제 우리가 주님과 세상에게 보여야 할 것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며 그리고 매일 미사 때마다 이 신앙의 신비를 기념하고 이 신앙을 고백하는데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하면 우리는 세 가지로 답합니다. 

-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받으소서.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영광드리기 위해서, 주님의 죽음을 전하고 부활을 선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이 이 신앙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실현이고, 재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신앙의 신비의 실현이고, 재현입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늘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하시는데 믿는 사람이 주님 구원이 내게 들어오도록 문을 개방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믿을 때 주님 구원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이 신앙의 신비가 실현이 되고 재현되며,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를 통해서 증거가 되고 중계가 되지요. 

죽음에서 참삶이 시작된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오늘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진정 기쁘고 의미있게 지낼 수 있음을 다시금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십자가의 힘을 무력화하는 유일한 방법: 일상에 감사하지 못하게 하라.

 

KBS ‘안녕하세요’ 75회에서는 매달 핸드폰 결제로 100만 원 이상 사용하여 편의점에서 일하는 엄마에게 4년 동안 빚만 3,500만 원을 떠넘긴 28살 딸이 나왔었습니다. 

딸은 왜 이렇게 엄마를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요? 

딸이 소액 결제를 하는 이유는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빚만 남기고 집을 나가 엄마는 자녀들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자신에게 유일한 위로였던 강아지가 아플 때 엄마는 돈이 없다고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갔더라도 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딸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강아지를 열 마리씩이나 데려왔고 자신은 애견 미용사가 되었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공허함은 디지털 기기를 모으는 취미, 폭식, 문신하고 게임을 하는 것 등으로 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나무라는 엄마에게 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엄마인 게 창피해.”

엄마는 딸만 바라보며 뼈 빠지게 일하며 살았는데 딸에게 돌아온 것은 원망과 빚문서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딸 안에 부모에 대한 원망이 깊이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딸은 더 엄마를 아프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 아픔이 엄마의 탓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엄마가 딸을 위해 진 십자가는 의미를 잃게 됩니다. 딸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피로 자녀의 자아가 죽고 새로 태어나려면 먼저 그 피를 받기 전에 행복하여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일상에서의 감사를 회복하는 노력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십자가는 인류 구원의 핵심적 열쇠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이 되려면 그 희생이 나 때문이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예수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들어 올린 뱀처럼 들어 올려져야 하는 이유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물었던 불 뱀 때문이었습니다. 이 불 뱀 때문에 예수님께서 들어 올려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뱀의 형상으로 들어 올려졌다면 뱀은 곧 한 인격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단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은 뱀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뜻’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뜻을 주었던 동물이 에덴동산에 있었습니다. 역시 뱀이었습니다. 이렇게 뱀의 뜻이 곧 나의 뜻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뱀이 곧 나 자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 십자가를 보면서 그 십자가의 원인이 자아이고 자아가 곧 뱀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거둔 가장 큰 성공입니다. 십자가와 자아를 연결하지 못하면 십자가는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때문에 삶을 포기하지 못하고 재기한 켈리 최 회장도 있습니다. 켈리 최 회장이 마흔이 되어 빚만 10억이 되었을 때 그만 세상을 끝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감수해야 했던 어머니의 십자가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술과 불필요한 모임과 드라마, 게임을 끊게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힘입니다. 어머니의 십자가의 탓이 자신이 술을 마시고 드라마를 보고 의미 없는 모임으로 시간을 허비한 탓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렇게 어머니의 십자가가 나의 자아와 연결될 때 어머니의 십자가는 헛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보아도 그 은혜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부모의 당연한 희생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의 고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요? 먼저 행복해져야 합니다. 행복해야 행복한 것에 대한 감사를 십자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고통스러우면 부모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오히려 더 고통을 주어서 보복하고 싶어집니다. 

이를 위해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지금 가진 것들로 이미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더 마음 아프게 하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은 자녀는 부모에게 불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어떻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의지적으로 감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감사일기를 쓰게 하는 것도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고맙게 여겨집니다. 어떤 사람은 감사일기를 많이 쓰다 보니까 어머니에 대한 감사한 것 1,000가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일상의 아주 작은 것들에 감사하다 보니 이런 행복한 삶을 살도록 나를 낳으시고 희생하신 어머니에 대한 감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뱀은 에덴동산의 일상의 삶에 감사하지 못하게 만들어 선악과를 바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그리스도인 생명 나무를 먹어도 소용없는 인간이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성체성사가 의미 없어지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부모의 당연한 희생으로 여기게 만들기 때문에 그 피가 나를 죽이지 못하게 합니다. 감사일기를 쓰는 등의 노력으로 먼저 일상에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감사의 십일조를 봉헌할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그다음에야 십자가의 희생이 나에게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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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심리학 실험실에서 노인을 대상으로 이런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집단은 하루 일정을 일원화해서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앴고, 다른 집단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일정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두 집단의 극명한 차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통제 집단보다 스스로 일정을 선택하는 집단이 훨씬 더 건강했고, 더 오래 사셨습니다. 
 
제아무리 안락하고 편하다 해도 주어진 대로만 누리려는 수동적 태도는 삶에서 생기를 빼앗아 갑니다.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 모두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고통과 시련을 주신다면서 불합리한 하느님이라고 불평불만을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좁니다. 즉, 하느님께서 고통과 시련 없이 알아서 좋은 것만 주셔야 한다는 논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더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생기를 잃어가면서 살도록 무엇이든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 진짜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사랑하기에 고통과 시련을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배반하는 자들을 살리는 희생으로 극치를 이룹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하느님을 배반해 벌을 받아 모두 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측은히 여겨 모세가 구리 뱀을 만들어 높이 들게 하고 누구든지 그것을 쳐다보면 죽음에서 모면토록 하셨습니다(민수 21,4-9). 
 
이제 하느님께 보내신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그때의 구리 뱀처럼 죄인들의 구원 표적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고 이런 당신을 보는 사람이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알아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과거 이스라엘 사람도 구리 뱀을 봐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알아서 해 달라는 기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주체적인 마음을 세워서 직접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오늘, 우리는 얼마나 주체적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자유의지를 주체적으로 내세워 사는 사람만이 지금의 삶에서 생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신을 인정하면 그 다음에는 상대를 인정하기 쉬워진다.

- 네모토 히로유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요한 3,13)

 

사람의 삶은 들어 올려지는 십자가로 더욱 빛난다. 십자가는 우리를 가두지 않는다. 십자가가 두 팔 벌려 우리를 안아준다. 십자가에서 찾게되는 하느님의 참된 사랑이다. 

십자가 없이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삭제할 수 없는 십자가의 여정이다. 십자가와 사람 사이에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다. 생명있는 모든 것은 십자가처럼 상처가 있다.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사랑으로 이끄는 십자가의 상처이다. 하느님께서도 하느님의 상처를 우리들에게 내어 보이신다. 십자가는 늘 우리들 편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다. 

우리의 삶을 달래어 주는 십자가이다. 십자가와 함께 산다. 들어 올려지는 십자가를 통해 보게되는 우리들 모습이다. 십자가가 오히려 우리를 품는다. 십자가의 상처가 우리를 품는다. 

사랑의 완성은 십자가의 사랑이다. 십자가로 만들어지는 십자가의 사람이다. 십자가가 또 다른 십자가를 껴안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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