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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7월 15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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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

 

 

2022년 7월 15일 (금)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병들어 죽게 된 히즈키야 임금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셨다며 주님의 표징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당신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는다고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7월 15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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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보나벤투라 주교의 천상 탄일을 기념하며 비오니 저희가 그의 높은 지혜와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며 언제나 그의 불타는 사랑을 본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2장 1-8절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일영 가브리엘 신부 강론

 

 

2022년 7월 15일 (금)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김일영 가브리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7월 15일 (금)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두 얼굴

 

율법의 세부 규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서른세 가지의 노동이 금지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밀 이삭을 뜯는’ 행동이 포함된 추수 작업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규정에 기대어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 율법도, 말씀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있음을 지적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언하십니다. 

살다 보면 알맹이는 보지 못한 채 껍데기만 볼 때가 있고, 의미와 사람은 보지 못하고 규정만 볼 때도 있습니다. 종교적 규범은 세세한 것까지 들여다보지만, 배고픔이라는 인간이 놓인 절박한 상황은 제대로 보지 못하였던 바리사이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누구나 개인으로, 또 집단으로 바리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규범과 관행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행동은 교회를 “박물관의 전시물”로 만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계명과 규정들을 일컬어 “두 얼굴”, 곧 “하느님의 얼굴과 형제의 얼굴을 알아보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58.61항 참조). 

여러분은 계명과 규정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과 형제들의 얼굴을 만나고 있는지요? 부끄럽게도 전례와 교회 규범을 조심히 살피는 저 자신을 꽤나 훌륭한 사제라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 규범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를 지적하는 것을 합리화할 정도로 말입니다. 지켜야 할 계명과 규범들과 함께 그것을 마주한 형제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오늘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절대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바리사이에게 안식일에 일해도 되었던 예들을 대면서 그 안식일 법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다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비라고 그리고 그것을 안다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끌어낼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의 기준은 자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사람은 단죄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안식일 법보다 상위의 법이 자비의 법이라는 말씀인데 이것은 지혜로운 율법 학자라면 알 수 있는 거였을 겁니다. 

복음 다른 곳에서 율법에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 율법 학자에게 주님께서 그 유명한 대답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대답을 하시자 율법 학자도 그 말을 받아 이렇게 덧붙이지요.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이렇게 율법 학자가 슬기롭게 얘기하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칭찬하십니다. 이것은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말이 아닙니까? 

우리가 지혜롭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책상머리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 자비라고 잘 알고 있지만 살다 보면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장사꾼이 분주하게 물건을 팔다보면 돈 주머니를 잃거나 더 중요한 자기 자식을 잃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서 안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어제 제가 똑같은 잘못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의 어머니 기일에 형제들이 모여 같이 미사하고 식사를 하였는데 저도 아들이고 나이도 제일 젊기에 이번에는 제가 식사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하는 <여기 밥상>에서 미사와 식사를 한 것입니다. 

아주 열심히 그리고 잘 준비하고 식사를 하는데 시작부터 제가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을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의식하고 조심했는데도 어느 시점에 가자 그 조심하던 것을 하고 말았습니다. 

거슬리는 몇 가지 누적된 일들이 제 안에서 사랑을 밀어내고, 누적된 피로가 제 안에서 사랑을 밀어낸 것입니다. 애초에는 사랑으로 시작한 일인데 말입니다. 

아무튼, 살다보면 그것도 정신없이 살다보면 중요한 것을 놓치는데 제일 치명적인 것이 바로 살면서 자비를 놓치고 사람을 놓치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정신없이 바쁘다고 하는데, 분주함이 정신을 놓치게 하고, 정신을 놓치는 데서부터 자비를 놓치는 일이 연쇄적으로 벌어지고, 그 정신없는 가운데서 죄 없는 사람을 단죄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는 일이 또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것인데 참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런 뜻에서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마음 중심에 새기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안식일은 무조건 쉬는 날이 아닌 '이것'을 내려놓는 날!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먹다가 바리사이들의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안식일은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주인이 당신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행복마다 주인이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행복하지 않다면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심했을 때 잠자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무서운 것이 나올까 봐 두려웠던 것은 아니고 자고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공포를 해결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깨어있을 때의 행복이었습니다. 행복하게 놀고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힘이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그 행복을 맛보게 해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어도 되니까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살다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태중의 아기처럼 즐기다가 새로운 세상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죽음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하다면 저세상에서 만나게 될 부모가 나를 사랑함을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의 주인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재미있게 놀았더라도 부모가 나의 생존을 보장해주고 있지 않았다면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당장 먹고살 것이 걱정인데 무슨 놀이가 행복하겠습니까? 따라서 모든 행복의 바탕에는 생존을 책임지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놀이가 생존이 됩니다. 놀이가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생존이 보장되어야 삶이 놀이가 됩니다. 예수님은 생존을 보장하시는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주일에 성전에 오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바리사이들처럼 지킬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안식일의 주인이 하느님임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하느님이면 마치 태아처럼 태중에서 걱정 없이 편안합니다. 

유튜브에서 어떤 노숙자가 자기 개 두 마리아에게 자기 전 재산을 다 털어 케이크를 사고 생일잔치를 해 주며 이것밖에 해 줄 수 없는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걱정해야 하는 것은 주인입니다. 성당에 와서도 걱정하고 있다면 그 성당의 주인이 하느님이 아니고 나인 것입니다. 이럴 때 바리사이처럼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생존이 보장되면 삶이 놀이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나의 모든 삶은 죽지 않기 위한 노력이 되고 이 경쟁의 삶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생존을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날 가난한 스님이 부자 스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오늘 길을 떠나려 합니다. 남해의 어느 큰 절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몸 건강히 계십시오.”

가난한 스님이 떠난다는 말에 부자 스님이 매우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니, 여기서 남해까지가 얼마나 먼 거리라고 그렇게 함부로 떠난단 말이오. 나 역시 남해로 가려고 진즉부터 준비하고 있었는데,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아 이러고 있는데…. 그런데 자네는 나 모르는 사이에 언제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하였단 말인가?”

그러자 가난한 스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뭐 준비랄 것이 있겠소. 물병 하나 바랑 하나면 되지.”

가난한 스님이 달랑 내민 물병과 바랑을 보며 부자 스님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뭐라고? 이것으로 그 먼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오?”

가난한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더니 물병은 허리에 차고, 바랑은 등에 짊어진 채 문밖으로 나섰습니다. 터덜터덜 멀리 사라져가는 가난한 스님의 등 뒤에서 부자 스님이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무사히 도착이나 할지 원, 쯧쯧…. 나는 준비를 철저히 해서 떠나야지.”

그다음 해가 되자 가난한 스님이 돌아왔습니다. 얼굴은 해쓱해지고 옷은 누더기가 되었지만, 스님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가난한 스님을 에워쌌습니다. 가난한 스님은 고생하면서 겪은 이야기와 남해의 큰 절과 자신이 만난 부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부자 스님은 그때까지도 남해로 떠날 생각을 못 하고 조금 더 돈을 모을 생각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어떻게 안식일을 지낼 수 있었을까요?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와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일 먹을 양식이 없는데도 하루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이들은 내년까지 먹을 것이 있는데도 쉬지 못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준비해서 하려면 평생 못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안식일의 주인으로 모시면 당장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밀이삭을 뜯어먹는 것은 놀이입니다. 누구에게는 생존일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주인과 함께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놀이가 됩니다. 삶이 놀이가 될 때 안식일의 주인을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새로 태어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는 “테슬라 파산!”이란 문구를 들고 초췌하게 눈물을 흘리는 사진을 SNS에 올렸습니다. 테슬라에 다니는 직원들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세계 최고 부자인 일론 머스크는 지금 안식일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걱정을 내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이 놀이가 됩니다. 

염려와 걱정은 주인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염려하고 있다면 나는 주님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걱정을 성당에 놓고 와야 합니다. 걱정한다는 말은 내가 주님이란 뜻입니다. 

성전은 주님의 집이고 나는 그 집의 종입니다. 종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걱정을 버리는 자리입니다. 항상 성전에서 살면 인생이 즐거움이 됩니다. 안식일은 무조건 쉬는 날이 아니라 걱정을 내려놓는 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친 짓이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제가 한 말이 아니라,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말입니다. 이 글을 보는 순간, 제 머리를 꽝 때리는 충격을 입은 것만 같았습니다. 미친 짓을 계속 반복하고 있음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노는 것만 반복하면서, 전혀 다른 시험에 합격할 수 없습니다. 가족에게 아픔과 상처 주는 것을 반복하면서, 전혀 다른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죄를 반복하면서, 전혀 다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합당한 행동을 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두 미친 짓이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바라는 결과를 위해 해야 할 합당한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누구는 ‘세상이 미쳤다’라면서 자기가 아닌 다른 이의 잘못만을 꼬집어 이야기하지만, 정작 나 자신이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미친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주님의 반대편에 서 있었습니다. 율법 준수를 들어 사람들을 구속하는 일을 반복하면서도 이를 통해 자기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을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비볐다는 것만으로도 고발했습니다. 실제로 안식에 걷는 행위도 금지되는 등, 일상생활에서 금지 사항이 39개나 되었습니다. 여기에 사소한 데까지 까다로운 규정이 덧붙여지면서 사람들이 꼼짝도 못 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면서 계속해서 이런 율법 준수를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도 율법 자체가 절대적이 아니라 율법은 어디까지나 실증법으로서 자연법이나 신법의 요청이 있으면 관면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 일행이 했던 일을 말씀하십니다. 
 
율법이 하느님의 법이라면 그것은 사람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율법으로 얽어매서 괴롭히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밝히십니다. 잘못된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참 하느님이신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인해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이 세상 안에서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그 사랑의 삶을 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을 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적이란 없다고 믿고 사는 것과, 또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다. 나는 후자의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

- 아인슈타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 12, 8)

 

너를 변화시키는 안식일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안식일이다. 참된 휴식을 배우는 은총의 시간이다. 휴식은 채우는 것이 아닌 비우는 것이다. 뒤섞여 있는 것을 비우는 것도 삶의 일부이다. 

안식이 필요한 우리자신을 다시 만나는 회복의 날이다. 참된 휴식으로 지쳐있는 우리를 이끌 수 있는 분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뿐이시다. 주님 안에 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온 힘으로 버티는 삶이 아니라 휴식과 봉헌으로 주님께 맡겨드리는 삶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안식일이 필요하다. 삶의 맛은 휴식의 맛이다. 건강한 삶을 배우는 시간이다. 삶과 삶 관계와 관계를 이어주시는 안식일의 주인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새 사람 새로워진 삶 새로운 관계 새 시작의 창조 이 모두에는 가장 필요한 참된 안식이 있다. 새로 태어날 수 있는 휴식이 필요하다. 주님과 우리자신을 새롭게 만나는 사람의 기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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