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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
2022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아시리아가 제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고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냐며 징벌을 예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으니 감사하다고 기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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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1장 25-27절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김일영 가브리엘 신부 강론
2022년 7월 13일 (수)
김일영 가브리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7월 13일 (수)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예수님의 기도
아름답고 은은하지만 그 내용은 혁명적이고 파격적인 기도! 오래간만에 소개되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을 아는 이들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들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과 “철부지들”을 비교하시며 후자가 ‘아버지를 아는 이’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이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대사제들을 가리킵니다. 종교 권력을 틀어쥔 그들은 자기들만큼 하느님을 아는 이가 없다고 자부하며,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에 대해서 정통한 이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면 제자들을 포함한 ‘철부지들’은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들이 하느님을 아는 영역에 속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해 본 사람들, 곧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이게도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하는 이들은 모르는 이가 되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오히려 아는 이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사제 생활에서 하느님과 신앙, 성경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복음이 소개하는 ‘철부지들’을 만나지 않을 때입니다. 비록 전문적인 신학과 성경의 지식은 없을지 모르지만 삶을 거쳐 나오는 신자들의 깊은 고백은 제 교만의 해독제입니다. 그 만남은 오늘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로 저의 두 손을 모으게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것을 해보기 전까진 남편을 알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철부지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앞의 어린이처럼 되셨기에 아버지께서 모든 것은 내어주셨고 그렇게 아버지를 알게 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레프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는 죽기 전 두 딸 앞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아버지를 죽였다.”
딸들은 대답하지 않고 울고만 있었습니다. 딸들은 어머니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불평과 비판과 잔소리를 해 온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명작을 통해 이미 톨스토이는 전 세계적으로 대단한 명성과 재산과 사회적 지위와 많은 자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피아도 이런 부족한 것이 없는 삶에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톨스토이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젊었을 때 살인을 포함해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죄를 저질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버렸던 종교에 다시 귀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기로 합니다.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쓴 위대한 책들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화를 설교하고 전쟁과 가난을 없애자는 팸플릿을 쓰며 나머지 일생을 보냈습니다. 자기 땅을 무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청빈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밭에 나가 일하고 나무를 베고 건초를 쌓았습니다. 자기 신발을 만들고 나무 그릇에 밥을 먹었으며 원수까지 사랑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소피아는 사치를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명성과 사람들의 갈채를 갈구했습니다. 돈과 재산을 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아내의 생각과 반대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거의 죄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오랫동안 톨스토이에게 잔소리하고, 질책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녀는 저작권료를 받기를 원했지만 톨스토이는 책을 발행할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거저 주려 했습니다. 톨스토이가 자기의 뜻을 말하면 소피아는 거의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입에는 아편을 달고 바닥을 구르며 남편을 죽여버리겠다고 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우물에 떨어져 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82세가 된 톨스토이는 더 이상 이 비극적이고 불행한 가정생활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1910년 10월 어느 눈 오던 밤, 톨스토이는 아내를 피해 추위와 어둠 속으로 나섰습니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1일 후, 톨스토이는 기차역에서 폐렴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그가 있는 곳에 그의 아내가 오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결국 소피아가 잃은 것은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모른 채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지막에 조금 후회는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제 생각에도 전 미쳤던 것 같아요.”
[참조: ‘인간관계론-결혼 생활의 무덤을 파는 가장 빠른 방법’, 데일 카네기, 현대 지성]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철부지 어린이처럼 되라는 말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아이들처럼 되라는 뜻입니다. 이 밑에 이런 내용이 따라 나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멍에는 소를 순종시키기 위해 주인이 메어주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주인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아내가 만약 남편에게 순종하면 남편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이 말은 아드님이 아버지를 아시는 방식은 ‘순종’이가 아버지가 아드님을 아시는 방식은 ‘모든 것을 넘겨주심’입니다. 아내가 불순종할수록 남편은 아내에게 자기의 것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아내는 남편을 영영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물론 남편도 아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아내를 이해하게 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써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서 순종을 배움이 철부지 어린이처럼 되려는 노력입니다.
짐 엘리엇을 비롯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에콰도르 열대 우림 한 지역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원주민들의 창에 무참히 살해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총이 있었지만, 그들을 향해 발사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 직후 (미국) 라이프지와 타임지는 이 사실을 보도하며 분노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쓸데없는 선교를 한 다섯 선교사에 대한 비판일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무슨 낭비인가!” (What a Waste!)
한 기자가 짐 엘리엇의 아내에게 찾아가 인터뷰하면서 이런 말을 꺼냈을 때 그녀는 그 기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낭비라뇨?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야 그 꿈을 이룬 것뿐입니다.”
이 다섯 젊은이의 아내들은 어린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자기 남편들이 갔던 길을 따름이다. 자기 남편들을 죽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시 들어간 것입니다. 다행히 그 부족은 여성과 아이들은 죽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느 날, 와다니족 추장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이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애써 수고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나는 5년 전 당신들이 죽인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 다시 오게 된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와다니족은 모두 신앙을 받아들였고 짐 엘리엇을 죽인 그 청년은 와다니족의 목사가 됩니다.
짐 엘리엇을 가장 잘 안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당연히 그의 아내였습니다. 만약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남편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면 남편의 마음을 알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남편을 따랐기에 남편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만나면 남편도 아내에게 모든 것을 줄 것입니다.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철부지 어린이처럼 순종해야 남편을 알 수 있고, 남편은 아버지처럼 다 내어줄 수 있어야 아내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렁이가 비가 오면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걷다가 길가에 나온 수많은 지렁이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이 부분이 늘 궁금했습니다. 왜 비만 오면 지렁이가 땅 밖으로 나올까 싶었던 것이지요. 친한 친구가 지렁이는 비를 너무 좋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비를 싫어하면 굳이 비가 떨어지는 땅 밖으로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렁이는 피부 바로 아래에 있는 모세 혈관으로 호흡합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흙과 흙 사이를 통하는 공기를 마시며 호흡하지만, 비가 오면 흙 사이가 모두 물로 가득 차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게 됩니다. 결국 지렁이가 비가 오면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살기 위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 너무 쉽게 판단합니다. 살기 위해 땅속을 박차고 밖으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히 비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어렸을 때의 저처럼, 타인의 고통과 시련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남의 감정에 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판단하기에 앞서 몇 번이고 더 바라볼 수 있는 신중함이 우리 모두 함께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습니다. ‘겸손’입니다.
주님께서도 겸손의 모범을 계속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높으신 하느님의 뜻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쁨에 넘치고 감격에 겨워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찬미의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감사의 기도로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통하여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골칫거리였던 악의 세력이 꺾인 데 대한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권력을 휘두르는 권세가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가득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지혜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는 참 지혜는 철부지와 같다고 스스로 낮출 수 있는 겸손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이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교만함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할까요? 그럴수록 하느님의 뜻은 우리에게서 멀어질 뿐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 법정 스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마태 11, 25)
함부로 비웃을 것은 하나도 없다. 누가 철부지들인가? 우리자신이 철부지들이다. 알고 있다 생각하지만 실상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우리들이다. 함부로 속단할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이 사람을 업신여기고 무시한다.
하느님의 시선은 철부지들을 향해 있다.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신앙심은 신비의 핵심이다. 건강한 신앙심은 주시고 드러내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고 따른다.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사랑이 참된 신비이다. 신비와 경외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철부지들과 함께 살고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철부지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신다. 우리의 삶이 신비이고 경이로운 은총의 연속이다.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보잘 것 없다고 여긴 것에서 새로이 시작되고 있다.
믿을 수 없기에 알 수 없는 것이다. 은총의 철부지들이며 순진한 철부지들이다. 하느님의 뜻은 낮은 곳을 향해 가장 좋은 사랑을 드러내 보이신다. 그 신비에 감사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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