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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7월 10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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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7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5주일 -

 

 

2022년 7월 10일 연중 제15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 가까이, 곧 입과 마음에 있기에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셨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를 드시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하고 이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7월 10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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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10장 25-37절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5주일
이요섭 요셉 신부 강론

 

 

2022년 7월 10일 (일)
이요섭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5주일

 

 

2022년 7월 10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

 

어느 겨울,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하러 가던 길에, 술에 취해서 쓰러져 있는 행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괜한 참견으로 일정에 방해를 받을까 봐 안타까운 마음만 지닌 채 그냥 지나치려는데, 오지랖 넓은 동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보세요. 경찰서죠? 출동 부탁드립니다.”

‘오지랖이 넓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으로는 ‘쓸데없이 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참견하는 면이 있다.’는 뜻인데, 통념으로는 남의 일도 자신의 일처럼 여기며 참견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 사람에게 꼭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사마리아 사람을 본받으려는 마음이 들기보다는, 왠지 사제와 레위인이 이해되고 때로는 그들을 변호하고 싶어집니다. 

그때는 하느님께 드릴 제사와 성전 봉사 때문에 너무 바빴을 것이고, 시간이 여유로웠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요. 과연 그러하였을까요?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곳을 향하여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점점 지나치는 것이 많아지고, 참견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많아집니다. 손수건을 떨어뜨린 앞 사람에게도, 어느 집에 쌀이 떨어졌다는 말에도, 언덕을 오르는 할머니의 숨 가쁜 소리에도 도무지 무심합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잠시 멈추어 서고, 그냥 지나쳐 가다가도 마음이 쓰여 되돌아가는 선택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한 오지랖’,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다가감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율법 학자가 주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에 대해 묻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이 질문은 부자 청년이 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에게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그런 다음 당신을 따르라는 해법을 주님께서 주셨는데 오늘 율법 학자에게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해법으로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을 영원한 생명을 받는 해법으로 제시하십니다. 

이 두 해법에서의 공통적인 방점은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야지만 하느님께 가고 거기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부자 청년에게는 <재물을 버림-나눔-따름>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자기를 버림-십자가를 짐-따름>을 얘기하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그러니까 재물을 많이 소유한 부자 청년은 재물을 포기하는 것이 힘들기에 그에게는 재산의 포기와 그것의 나눔을 더 강조하였다면 제자들에게는 재산의 포기보다 더 어려운 자신의 포기와 십자가 수용 곧 수난을 더 강조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율법 학자에게는 이웃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은 하지 않고 이웃 사랑만 말씀하시는 겁니까? 얘기해봤자 당신을 따르지 않을 사람이기에 아예 그 얘기는 하지 않은 걸까요? 

그보다는 율법 학자에게 많이 부족하고 그래서 그에게 더 필요한 것은 이웃 사랑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율법 학자는 오늘 신명기 말씀처럼 하느님 계명을 늘 가까이 두고 살았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법이 율법서에 어떻게 쓰여있는지 주님께서 물으셨을 때 그는 즉시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 계명은 가까이 있는데 이웃은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 있었습니다. 이웃이란 본래 가까이 있는 사람인데 율법 학자에게는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이웃이 마음 안에서는 멀리 있었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사마리아인 곧 이방인을 착한 모범으로 제시하시지만 그 전에 사랑이 없는 사제와 레위인 곧 유대인을 악한 모범으로 제시하십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웃도 이웃이 아니라는 말씀이고, 반대로 사랑을 하면 원수도 이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에서 멀어진 그래서 다가가지 않는 이웃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이웃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비유를 마치면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시는데 가라는 것은 다가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가까이 다가감을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착한 사마리아인 되기’는 나에게 ‘권고’인가 ‘법’인가?

 

1928년 미국의 한 부둣가, 산책하던 중 한 남자가 실수로 바다에 빠졌습니다. 친구들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고지점 불과 몇 미터 거리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그 사람이 도와주었으면 자녀가 살 수 있었다며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굳이 도와주어야만 하는 법은 없다며 그 남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만약 ‘착한사마리아인법’이 있었다면 어떨까요? 

가톨릭 국가라고 볼 수 있는 프랑스는 이 법이 있습니다.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해주어도 자신이나 제삼자에게 위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도와주지 않는 자는 3개월에서 5년까지의 징역과 360프랑에서 1만5천 프랑(한화 약 40만 원~1,700만 원)까지의 벌금을 물을 수 있습니다. 이 법을 호주와 폴란드, 일본에서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이 법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인간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한다는 반발 때문에 통과가 못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산 여중생 사건’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지나가던 많은 사람이 여중생 구타 현장을 목격했지만, 오히려 간섭하면 안 좋아진다는 인식으로 인해 방관하였고 피해 여중생은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무려 한 시간 반 동안 폭행당했습니다. 신고가 늦어져 경찰이 출동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수없이 많습니다. 신고만 해 주어도 사람이 사는데 구해주지 않습니다.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어야만 하는 의무는 종교인에게만 있습니다. 

저도 오늘 복음에서처럼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주지 못한 사제였던 적이 많습니다. 사고 난 사람을 전화로 신고만 해주고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차에 불이 나거나 그 사람의 출혈이 심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신고만 해 주었으니 할 건 다 했다고 여겼습니다. 아무리 착한 사마리아인 강론을 많이 하더라도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잘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자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아가 원하는 것을 따라주는 것을 자유라고 여깁니다. 결국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은 소유욕, 성욕, 지배욕으로 나아갑니다. 그것도 노예 생활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도 법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남을 도와줄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 법에 지배받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은 다릅니다. 천국은 더 높은 수준의 법이 있습니다. 우물에 빠진 형제를 구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오는 자녀를 부모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권고로 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권고가 아닙니다. 법입니다. 법이 아니면 우리는 지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안의 자아는 ‘법’이고 그 법을 이길 수 있는 수준의 명령은 ‘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저 법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법에는 반드시 그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대가가 따릅니다. 하지만 권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권고로는 자아가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입법자로서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벌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해리 포터 – 비밀의 방’(2010)에 도비라는 집 요정이 나옵니다. 도비는 사실 좋지 않은 주인에게 속해있습니다. 아무리 해리포터를 도와주려고 해도 주인의 명을 어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도비는 주인에게 새로운 옷을 선물 받았을 때는 주인에게서 자유로워집니다. 해리포터는 자신의 양말을 주인 것으로 속여서 선물합니다. 그리고 도비는 말합니다. 

“도비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해리포터를 도와줍니다. 이상하게 자유라고 하면서 해리포터를 섬깁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법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법을 해리포터가 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해리포터를 구하려다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도 행복하게 죽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 가죽옷을 주셨습니다. 그 가죽옷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입니다. 우리는 그 의로움을 입고 더는 돈과 쾌락과 명예로 우리를 치장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뱀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주인이 주는 명령은 법입니다. 자아가 우리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세속-육신-마귀는 법입니다. 이 법을 누를 수 있는 새로운 법이 아니면 우리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법을 이기는 것은 법입니다. 권고로는 법을 이길 수 없습니다. 권고는 안 해도 되지만 법은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그것이 나의 법이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지 않을 수 없을 때, 나는 지금 이미 천국의 법을 따르는 것이고 천국에 사는 것입니다. 나의 입법자를 하느님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유를 옹호하는 자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착한 사마리아인 법의 제정을 스스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어야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법입니다. 이 법이 없으면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은 권고가 아니라 법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과대망상에서 벗어나는 방법

 

교통 체증이 심할 때, 앞의 차가 너무 느리게 가서 계속 다른 차들이 그 앞으로 끼어들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대부분 화를 냅니다. 자기 앞으로 많은 차가 끼어들수록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늦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차를 향해 욕을 하기도 합니다. 형편없는 운전 실력으로 길을 더 막히게 한다는 말도 합니다. 
 
자기는 잘한다는 ‘우월함’ 환상에 자주 빠지는 우리입니다. 운전만이 아닙니다. 다른 이를 향한 ‘뒷담화’ 역시 내가 더 낫다는 ‘우월함’ 환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해보십시오. 
 
“운전을 못 하는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부족한 사람인가요?” 
 
“뒷담화로 비판하는 대상과 나를 비교하면, 나는 대단한 사람인가요?” 
 
나는 낫고, 상대방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보다 과장하여 터무니없는 헛된 생각을 하는 과대망상 증세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증세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주님께 계속 말씀하셨고, 당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낮추는 겸손입니다. 겸손을 통해 ‘판단’보다 ‘이해’를 가져올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전개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현실적인 문제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율법 교사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신봉하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는지를 묻지요. 그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정답이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번제물 바치는 것으로만 하느님 사랑을 대신했으며, 이웃 사랑은 동족 사랑에 국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하나로 묶으셨지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면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교만에서 벗어나 이웃을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역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도를 만나 길에 버려진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고, 여관 주인에게까지 부탁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사랑을 외면한 사제나 레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아버지가 되기는 쉽다. 그러나 아버지답기는 어려운 일이다.

- 세링그레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루카 10, 29)

 

우리자신이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이웃은 신분이 중요하지 않다. 이웃은 이웃의 아픔에 마음으로 반응하며 실천의 길을 따라간다.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복음의 참된 이웃이다. 공

동체의식을 깨닫게하는 가장 좋은 공통어 이웃이다. 일체감을 체험하게 하는 이웃이다. 우리자신이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이 삶을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길이 된다. 

좋은 이웃은 실천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다.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돌보아주는 사랑을 실천한다. 좋은 이웃은 수 많은 이유와 핑계를 멀리한다. 좋은 이웃의 시작은 예수님이시다. 

좋은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상처난 손으로 우리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신다. 

좋은 사람은 좋은 이웃이 되어 함께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좋은 이웃을 통해 전달하신다. 자신에게 우리에게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 37) 

살아있는 이웃 살아있는 삶이다. 살아있는 이웃은 자비를 베푸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 좋은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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