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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7월 11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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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

 

 

2022년 7월 11일 월요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의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주님의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리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가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7월 11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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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복된 베네딕토 아빠스를 뛰어난 스승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을 섬기라 가르치셨으니 저희도 오로지 하느님만을 사랑하며 열린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0장 34-42절, 11장 1절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 강론

 

 

2022년 7월 11일 (월)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2022년 7월 11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여러분의 손에 들린 ‘칼’은 누구의 칼인가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과 그들이 받게 될 보상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따라야 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 ‘칼’은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삶’을 자르고, ‘자기 십자가를 피하는 삶’을 베어 내며,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삶’을 잘라 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예수님께 충실한 데서 비롯하는 단호함이라는 ‘칼’을 필요로 합니다. 어설픈 제자에게 들린 ‘칼’이 떠오릅니다. 자기 실속을 위협하는 복음의 요구를 잘라 내고, 주님의 일을 베어 내며, 복음의 가치들을 쳐 내는 칼, 자신을 위하여 만든 ‘칼’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들린 ‘칼’은 누구의 칼인가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그 삶을 통해 얻게 되는 행복과 기쁨, 평화의 중심에 그분 대신 ‘나 자신’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베네딕토 아빠스를 기억합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규칙서」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모든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이 보여 준 제자의 삶이 우리 안에서도 지속될 수 있도록 전구를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인정은 칼로 베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평소 우리가 생각하는 주님의 말씀과 다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이 아닌 것같이 느껴집니다. 

평화를 주러오신 주님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오셨다고 하고, 일치를 가르치신 주님이 일치가 아니라 분열을 주러오셨다고 하며 서로 사랑하라 하신 주님이 서로 사랑하면 당신께 합당치 않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그릇된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주님께서 분명 옳은 말씀을 하신 거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 말씀하시는 평화나 일치나 사랑은 잘못된 평화나 일치나 사랑이기에 그런 것들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거라고 알고 또 믿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일치가 좋은 것이 아니지요. 야합도 일치지만 그런 일치는 아주 나쁜 일치지요. 마찬가지로 모든 사랑과 평화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과 일치하는 사랑이 좋은 사랑이고, 하느님 진리와 일치하는 평화가 좋은 평화입니다. 

하느님을 같이 사랑하지 않는 사랑, 인정에 매여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랑, 인정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것을 막는 사랑, 이런 인정을 오늘 주님께서는 문제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늘로 오르지 못하는 인정, 하늘로 오르지 못하게 하는 인정은 참사랑이 아니며, 이는 마치 연을 끈으로 묶어 날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은 하늘로 날아야 진정한 연이듯 우리의 사랑도 하느님 사랑에로 올라가야 참사랑이고, 그래서 사랑이 아닌 인정은 칼로 베라고 칼을 주러 오신 주님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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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여러분은 하느님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까?

 

어느 신학교 교수 신부가 신학교에 막 들어온 신학생들에게 강의할 때였습니다. 커다란 칠판을 가리키면서, “이 칠판이 하느님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뒤, 신부님께서는 칠판에 점 하나를 찍은 뒤에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이해하는 정도입니다.” 
 
유한하고 부족한 존재인 우리가 과연 얼마나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칠판 위의 점만큼은 과연 이해하고 있을까요? 이 정도 만한 이해만 있어도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마태 17,20)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정도의 믿음도 없어서 불평불만의 연속과 하느님 뜻에서 멀어지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그분 사랑을 이해할 수 있어야 지금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칠판 위의 점만큼이라도 하느님께 대한 이해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내 삶의 첫 번째 자리에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처음 주님의 말씀을 접하는 사람에게 충격적일 것입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 성당에 왔는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뒤에 이어 오는 말씀도 충격적입니다. 부자간, 모녀간, 고부간에 갈라지면서 서로 원수가 된다니요. 
 
이는 무조건 원수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우선순위에 두면서 갈라질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 그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하심과 정반대의 악의 세력은 어떻게 하려고 할까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도록 온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세력이 사랑하는 내 가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평화가 아닌 분열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분열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며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38)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이사 1,16) 
 
주님께 합당한 자녀가 될 수 있는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미래에 사로잡혀 있으면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과거까지 재구성하려 들게 된다.

- 에릭 호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 34)

 

진짜 칼은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 칼을 부정하는 것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잘라내야 할 악습을 잘라내는 단순한 사실에서 칼은 시작된다. 우유부단한 우리들에게 칼을 주셨다.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삶의 중심을 바로잡아 준다. 

십자가의 칼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진짜 신앙은 하느님 중심적이다. 따르기 위해서는 자를 수 있어야 한다. 일상의 매순간이 식별의 칼날과 함께 주님을 향한다. 평화를 지키는 십자가의 칼이다. 밭을 갈아엎는 쟁기도 소중한 것을 알게하는 칼도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삶임을 가르쳐준다. 

조화와 균형 겸손과 중용 절제와 성숙의 칼이 필요한 우리들이다. 칼끝이 향하는 방향이 실은 새로워져야 할 우리자신의 삶이다. 새로워진 삶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이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십자가의 새 길이다. 무딘 신앙으로는 아무 것도 잘라낼 수 없다. 

주님께서는 절박하고 각별한 칼을 우리에게 주셨다. 반성과 결심의 칼은 우리의 목마름을 일깨워주며 우리의 안일함과 우리의 이기와 우리의 무지를 꾸짖고 있다. 평화는 칼과 함께 공존한다. 우리자신의 변화를 촉구한다. 식별의 칼이며 우선순위의 칼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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