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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7월 9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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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

 

 

2022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는 주님의 소리를 듣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아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7월 9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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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0장 24-33절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25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26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 강론

 

 

2022년 7월 9일 (토)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김주신 멜키올 신부 강론

 

 

2022년 7월 9일 (토)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믿음이 꼭 필요한 이유.

 

오늘 복음에서는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과 관련되어 쓰였습니다. ‘의회에 넘기고, 채찍질하고, 미워하고 죽이려는 자들’(마태 10,17-23절 참조), 곧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그들”입니다. 

세 번째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네 번째는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인데, 하느님께서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실 만큼 귀한 이들이 바로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과 ‘두려워해야 할 것’이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며 허세를 부릴 때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말고는 모든 것이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노후, 그리고 일과 사랑에서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외치며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겁쟁이’가 되었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습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엄마, 아빠에 대한 믿음 때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머리카락 한 올도 손댈 수 없다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주님께서는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언급하시면서 인간은 육신까지만 죽일 수 있고 영혼은 죽일 수 없다고 하시고 하느님만 둘 다 죽이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 종류의 두려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육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영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런데 생각게 됩니다. 두려움이란 말을 같이 쓰는데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같이 쓸 수 있는 건지, 두려움이란 말을 같이 쓰지만 그 두려움이 분명 다를 거라는 생각 말입니다. 

우선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악함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은 악하기에 그 악함 때문에 내게 악을 줄까 봐, 그러니까 내가 싫어하는 것을 줄까 봐 두려워하는 거지요. 

인간에게 최악(最惡)은 죽음이고, 이 최고의 악인 죽음을 인간은 가장 싫어하고 그래서 두려워하는 거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육신 죽음보다 더 최악인 영혼의 죽음을 주신다는 것이 오늘 주님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오늘의 묵상거리는 이것입니다. 하느님은 영혼의 죽음을 주실 정도로 악하신가? 영혼의 죽음이란 무엇이고 그런 것이 있는가? 

그런데 하느님이 악하다는 것은 우리 신앙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하느님이 악하다면 그런 하느님은 하느님도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런데도 우리가 경험하는 악은 무엇이고 어떻게 나왔느냐에 대해서는 악신이 있어서 그 악신이 악을 만들었다는 2 원론에 반대하여 인간이 하느님 소유인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다가 그 벌로써 악을 알게 되고 소유하게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알고 있는데 어찌 하느님께서 최악인 육신의 죽음을 주시고, 그보다 더 최악인 영혼의 죽음까지 주신다는 겁니까? 

육신의 죽음은 인간이 어차피 유한하니 죽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유한한 이 세상에서 영원으로 가야 하니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당신께 불러 가시는 거라고 좋게 해석할 수 있지만 영혼의 죽음이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고 어떻게 좋게 알아들어야 합니까? 

제가 미국에 잠깐 살았을 때 지옥논쟁이 뜨겁게 일었습니다. 영국 성공회 한 신학자인 신부가 지옥이란 없다고 주장하며 영혼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바로 지옥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 신학자의 주장대로 하느님은 무에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니 우리를 무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오늘 주님께서도 그러실 수 있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실 수 있는 분과 그렇게 하시는 분은 다르지요.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실 거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의 비유로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사실 우리에게 최악은 하느님을 잃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잃는 것이며, 몸뚱어리를 잃는 것이 최악이 아니라 그 하느님의 사랑을 잃는 것이 최악이고 최악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도 마찬가지인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최악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제일 두려워하는지 성찰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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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제 “다 컸네.”

 

마트에 갔다가 바닥에 엎드려서 울며 떼쓰는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난리입니다. 엄마는 “이 장난감은 너 가지고 있잖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없어. 없단 말이야.”라는 말만 반복해서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엄마가 없는 것을 있다고 거짓말하는 것일까요? 없다고 우기는 아이를 향해 누나로 보이는 아이가 “엄마 말이 맞아. 너 이 장난감 분명히 가지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이 누나도 엄마와 입을 맞춰서 거짓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이가 거짓말하는 것일까요? 
 
아이는 보통 모든 것을 자기 관점으로만 본다고 합니다. 이런 자기중심주의가 가득한 사람은 보통 철부지 어린이였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배려하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다 컸네.” 
 
철부지 어린이 같은 어른도 참 많은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원에게 갑질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상대방의 생각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기가 받지 못한 것, 자기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냅니다. 아직 정신적으로 어린이 철부지입니다. 
 
상대 입장을 먼저 생각해보고 느끼는 것, 남이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황금률을 실천하기 전에 일차적으로 갖추는 우리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위선으로 가득 차서 겉으로 보이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주님의 진리를 큰 소리로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온 힘을 쏟는 위선의 삶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를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세상은 나의 육신에 큰 상처를 줄 수는 있지만, 내 영혼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제 “다 컸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다 컸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판자이신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면 영적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성장하는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안다고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시선에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시선, 하느님의 평가에 온 힘을 기울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용기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즉 두려움이 없으면 용기도 없다.

- 에디 리켄베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10, 28)

 

두려움을 치유하는 존귀함이 하느님의 참된 사랑이다. 두려움은 소중함을 이길 수 없다. 복음의 이야기는 존귀함과 소중함의 이야기이다. 존귀함은 소중함을 다시 끌어안는다. 

참다운 삶을 회복하는 힘은 소중함에서 온다. 부족함을 채워주는 소중함이다. 소중한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 관계이다. 소중함은 존중으로 이어진다. 존중은 삶의 의미를 다시 만나게한다. 

모든 생명은 소중함을 따라간다. 기도도 소중함이고 기다림도 소중함이다. 행복을 깨우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소중한 사랑이다. 구원의 문을 여시는 소중한 사람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두려움을 봉헌한다. 두려워하지 않기에 소중한 사랑의 관계는 구원으로 완성된다. 오늘도 소중함을 배우는 소중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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