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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7월 8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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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

 

 

2022년 7월 8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보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하며,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간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고 하시며,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7월 8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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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0장 16-23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이한석 사도 요한 신부 강론

 

 

2022년 7월 8일 (금)
이한석 사도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이길재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7월 8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용기를 내어라. 절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니.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한 결과가 회당에서의 채찍질이요, 모든 이로부터의 미움, 그리고 형제들과 부모 자식 사이에서의 분열과 죽음임을 소개하시며, 그런 상황 안에서 절대로 좌절하지 말라고 이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에 익숙한 시대에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마음이 평화롭기를, 가족이 서로 화합하고 안정을 이루기를 바라지만, 그와는 달리 혼란과 갈등을 체험할 때가 많기 때문이지요. 때때로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상황을 마주한 이들이 신앙의 무익함을 외치며 교회를 떠나는 것을 봅니다. 

복음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반드시 장애물을 만납니다. 주일을 지키느라 때로는 가족들, 친구들과 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좋은 일을 하면서도 혼자만 잘났냐는 질투를 사기도 하며, 누군가를 배려하느라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는 듯합니다. 

‘슬퍼하지 마라. 복음 때문에 네 안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표징들이니. 용기를 내어라. 절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니.’ 

복음 때문에 어떠한 혼란과 다툼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고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누린다고 생각하는 안정과 평화가 그들이 받을 보상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의 구원은?

 

어제 호세아서의 주님은 당신에게 멀어진 이스라엘을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젖먹이처럼 가엾게 여기며 돌봐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사랑이 오늘 호세아서에서는 회개의 결실로 나타납니다. 

이는 옷 벗기기 시합에서 해가 바람을 이긴 것을 연상케 합니다. 바람이 강한 힘으로 억지로 옷을 벗기려 하니 그 사람이 오히려 더 옷깃을 여며 실패한 것에 비해 해는 따듯하게 하여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이 이스라엘을 진정 뉘우치게 한 것이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왜 아시리아는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는 겁니까? 그것은 그들이 아시리아에게 구원을 바랐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이 아닌 당시 최강국인 아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에서 아시리아에 기대어 자기들의 구원을 도모했기 때문이지요. 이는 마치 지금 우리 지도자들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어느 한쪽에 서려고 하는 것과 같지요. 

우리는 힘과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를 보게 됩니다. 하나는 힘이 있는 사람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힘이 없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힘이 있는 사람은 자기들의 권력이 천 년 만 년 갈 줄로 착각하고 마구 힘을 사용하는데 그래서 저는 그들이 한심하고 불쌍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도 힘이 없어서 서럽고 불쌍합니다. 힘 있는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고 힘 있는 사람에게 줄을 잘 서야 합니다. 사실 바로 내 앞에 있는 힘과 권력 앞에서 담대하고 당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려고 한 것인데 이제 제 정신이 들어 구원은 그들에게 있지 않고 하느님에게 있음을 깨닫고 아시리아의 눈치를 본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시편 저자가 이렇게 노래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 님한테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 나거나 들거나 너를 지켜 주시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러하시리라." 

이렇게 새로운 깨달음과 자신의 잘못을 이스라엘이 고백하자 하느님께서는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이렇게 화답하십니다.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아무튼, 오늘 호세아서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가 어떠해야 하는지 모범답안입니다. 어지러운 국제 정세 안에서 그리고 어려운 우리 현실 삶에서 잘못하면 다시 말해서 중심을 잡지 못하면 우리는 이리저리 흔들릴 수 있는데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의탁하는 것이 우리의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지럽고 아무리 어려워도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께 믿음을 두라는 호세아서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리 떼 가운데에서 양이 살아남는 법 ; 어떤 때는 뱀처럼, 어떤 때는 비둘기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라고 하십니다. 자녀가 양인데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야 하는 부모라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2010년 틸리쿰이라는 한 고래가 그의 조련사 ‘돈 브랜쇼’를 공연 도중 물어서 사망하게 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착하던 범고래가 여 조련사를 물고 이리저리 휘저으며 풀장 안을 돌아다닌 것입니다. 브랜쇼는 머리 가죽이 벗겨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왼쪽 팔은 골절되고 팔꿈치는 탈구되어 잔인하게 죽었습니다. 브랜쇼는 시월드에서 16년 일한 베테랑 조련사였고 틸리쿰과는 14년을 함께 일했을 정도로 친했습니다. 시월드 측은 사고라고 주장했지만, 야생에서 범고래에게 인간이 공격당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범고래는 왜 그 오랜 우정을 깨고 자신의 조련사를 죽였던 것일까요? 범고래는 어미와 새끼의 교감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런데 틸리쿰은 어렸을 때부터 어미와의 교감 없이 수족관에서 훈련받으며 살았습니다. 가족의 애착 형성 없이 그저 인간을 위한 쇼와 번식용으로 사용되었던 틸리쿰은 그 쌓인 스트레스를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 살 무렵 포획되어 다른 범고래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좁은 물탱크에 수용되어 살았던 틸리쿰의 저 행동을 우리는 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본성대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본성대로 살지 못하게 강요한 인간의 죄가 더 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처 입은 범고래가 끝까지 자기에게 잘해줄 것을 믿은 것도 문제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하고 말씀하십니다. 

뱀처럼 슬기로워지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마태 10,17)로 요약될 수 있고, 비둘기처럼 순박하여지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와 연결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뱀처럼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으니까 상처받습니다. 사람을 믿는다는 말은 나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하느님을 믿기 위해 믿지 말아야 하는 대상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나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배신당해도 자비롭습니다. 사람은 다 그런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 앞에서 비둘기처럼 순박하면 배신당하고 서로 원수가 됩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저는 제 딸을 미국식으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어떤 청년 둘이 제 딸을 술에 취하게 만들고 강간하려고 했습니다. 딸의 턱은 폭행으로 으스러져 철사로 봉합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놈들은 집행유예를 받다니요. 정의를 위해서라도 저는 돈 콜레오네를 찾아와야만 했습니다.”

“도와줄 수 없네. 당신에게 미국은 낙원이었겠지. 나 같은 친구도 필요 없을 만큼. 그리고는 이제 찾아와 내게 정의를 구현해달라고? 존경심을 보이지도 않고 우정을 구하지도 않고 나를 ‘대부’라고 부르지도 않는데? 내 딸아이의 결혼식에 날 찾아와 돈을 주겠다며 살인을 요청하고 있어. 우정으로 날 찾아왔다면 그 인간쓰레기들은 당장 죽어 사라졌을 것이네. 하지만 이 ‘정의’를 내 딸의 결혼 선물로 받겠네”

영화 ‘대부 1’의 시작 부분입니다. 대부 돈 콜레오네는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기를 배신하다시피 한 친구의 청을 그냥 들어줍니다. 이렇게 자비로울 수 있는 이유는 뱀처럼 사람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들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주며 이런 충고를 합니다.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어라.”

멀리 있는 적은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그러나 가까이 두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있고 대처하기 유리합니다. 뱀처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자기 측근 중에서 누가 배신할 사람들인지 미리 알려주어 그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집단의 수장이기는 하지만 두 번째 대부인 알 파치노는 마지막에 30년 만에 고해성사합니다. 이것이 비둘기처럼 순박한 것입니다. 사람을 믿지 않는 만큼 하느님을 믿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뱀과 같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는 비둘기처럼 순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뀌면 안 됩니다. 그러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이나 마더 데레사는 돈이 한 푼도 없으면서 커다란 병원을 짓고자 했습니다. 사람을 믿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사람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한 푼도 없이 무조건 시작합니다. 순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지만 당대에 개인이 짓기에는 불가능한 커달란 병원을 지어냅니다. 

이리 떼 가운데 양이 살아남는 법은 사람에겐 뱀처럼 대하고 하느님껜 비둘기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뱀처럼 믿지 않고 하느님은 비둘기처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세상으로 나아갈 때도 항상 이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리 떼 가운데 양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명품'의 삶

 

언젠가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명품을 만드는 곳으로 유명한 회사에서 운동화를 딱 100켤레만 한정판으로 판매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운동화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낡았고, 흠집도 많고, 아주 더러웠습니다. 이렇게 비정상적 운동화이지만 우리나라 돈으로 자그마치 230만 원대라고 하더군요. 운동화는 평생 신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며칠 지나면 도저히 신을 수가 없어서 버려야만 할 것 같습니다. 또 이것도 명품이라며 100켤레 한정이며, 자그마치 230만 원이나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들이 이런 신발이어도 금방 팔릴 것으로 예측했다는 것입니다. 하긴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매출이 부진한 매장에서 10만 원짜리 가방을 점원이 실수로 100만 원으로 적어서 진열한 것입니다. 그런데 10만 원일 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사람들이, 100만 원이라고 하자 금세 완판될 정도로 큰 인기였습니다. 
 
명품을 좋아한다지만, 사실 물건이 아닌 나 자신이 ‘명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명품을 들고 있다고 해서 ‘나’가 명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명품처럼 함께하고 싶은 ‘명품’인 ‘나’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명품’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이기에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저절로 명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출신 신분과 배운 것 없는 구변으로 어마어마한 권력자들 앞에 선다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아무래도 힘에 버거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박해받으며 체형을 받는 등 몸으로 때우는 일은 굳은 믿음만 있으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정이나 회당에서 진리를 변론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일을 당하면 당황하고 걱정만 가득하게 될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대변자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시면서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에서도 이를 극복할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그 자체로 명품의 ‘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사라지고 말 ‘명품’을 쫓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명품’인 나를 만들기 위해 더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

- 오노레 드 발자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마태 10, 16)

 

슬기로움과 순박함은 우리의 생활 안에서 피어나야 한다. 슬기로움과 순박함은 구체적인 삶의 실천이며 조화로운 삶의 건강한 방식이다.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믿음의 실천이다. 우리의 신앙이란 때로는 뱀의 슬기와 때론 비둘기의 순박함이 어우러지는 신앙의 실천들로 이어진다. 

주님과 함께하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신앙은 관계로 시작하여 관계로 마무리된다. 구분되고 분리될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관계의 본질은 하느님에게서 시작된다. 하느님의 영은 기대와 실망을 어루만져 주신다. 

우리모두를 위한 삶의 기쁨으로 이끄신다. 수시로 바뀌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하는 삶이 구원의 올바른 삶이다. 올바른 삶은 있는 그대로를 알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슬기로운 봉헌이며 순박한 믿음의 삶이다. 

새로움으로 이끄시는 성령과 함께 새로운 실천이 믿음의 출발이다. 구원이란 끝까지 인내하고 끊임없이 신뢰하는 관계의 여정이다. 이 관계의 여정 안에 맡겨드리는 기쁨과 우리에게 오시는 가장 좋은 희망이 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힘으로 오늘을 새롭게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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