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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
2022년 7월 7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연민이 북받쳐 오르시어 타오르는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으시리라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이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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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0장 7-15절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황범중 요한 세례자 신부 강론
2022년 7월 7일 (목)
황범중 요한 세례자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7월 7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진정으로 지니고 가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하신 단호하고 구체적인 명령이 소개됩니다. 평상시의 예수님 모습과 다르게 제자들을 실전에 투입하시며 이르시는 말씀이기에 복음을 듣는 이도 덩달아 긴장하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신 아홉 가지 명령 가운데 두 번의 금지 명령은 ‘지니지 말아야 할 품목’에 관한 것입니다. 전대에 금, 은, 구리, 돈이 담겨 있거나 여행 보따리에 여벌 옷도 신발도 담겨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자신을 보호할 최소한의 도구인 지팡이도 금지됩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리 떼가 가득한 세상에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더 꼼꼼하고 넉넉하게 챙겨 주어야 할 것들인데 말입니다. 제자들이 무척 서운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예수님께 어느 정도의 양은 허락해 달라고 청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금지 명령의 핵심은 지니지 말아야 할 품목과 양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니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지니고 가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어릴 적 학교에 갈 때 준비물을 챙겨 주시던 부모님이 떠오릅니다. 다 챙긴 것 같은데 꼭 하나씩은 빠뜨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 나가는 우리 모두에게 준비물을 챙겨 주십니다. 불안해하며 많은 것을 챙기려고만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꼭 챙기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는.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오늘 호세아서의 주님께서는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그 이유가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렇겠지요? 우리가 사람이니까 분노하지 하느님이라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아예 분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이라면 분노하지도 않고 분노대로 행동하지도 않을까요?
그야 분노라는 것이 자기 중심에서 나오는 것인데 하느님은 당신 중심이 아닐 뿐더러 사랑이시기 때문이지요.
자기 중심인 사람은 일이 또는 사람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작은 것일 경우 짜증이 나고 큰 것일 경우 화가 나는 데 비해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거나 하지 않을 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연민이 생기고 안타까워하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누가 어떻게 죄를 짓든 하느님의 종이 이 때문에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한다면 스스로 과오를 쌓는 것입니다. 어떤 일로 말미암아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이 진정 소유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요즘 저는, 전에 비해, 저에 대해서나 남에 대해서나 큰 분노가 없습니다. 특히 요즘 정치인들에 대해서 큰 분노가 없는데 그것은 그들이 분노할 가치도 없고 한심하고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정치인들에 대해 덜 분노한다고 했는데 요즘 정치인들이 전의 정치인보다 낫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전이나 지금이나 정치인이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권력을 위해 날뛰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전에 비해 덜 분노하는 것은 요즘 정치인이 전의 정치인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대하는 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수없이 실망하고도 하느님께가 아니라 그들에게 또 기대를 걸고 그래서 분노한다면 그것은 정치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인이 본래 그런 거라는 것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고 또 기대를 거는 내가 잘못이고 문제인 거지요.
그런데 제가 지금 그들의 하는 짓을 한심해하고 그들의 미래를 내다보고 불쌍해하는데 그러나 제가 사랑이 더 많은 사람이고 하느님의 사랑, 아니 어미의 사랑만 지녀도 한심해하고 불쌍해하는 것을 넘어 안타까워하고 가슴이 까맣게 탈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처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던 하느님은 이제 아들과 딸처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며 당신에게서 멀어져간 이스라엘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십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사실 내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찬 것보다 연민이 가득한 것이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좋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제는 분노가 아니라 연민만 내게 가득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가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유
선교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행복을 주려면 가진 것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앓는 이를 고쳐주고 죽은 이를 일으켜주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마귀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이 능력을 주시며 파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저도 새로이 본당에 가서 많은 이에게 주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큰 기적이 한 번만 일어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내가 모든 것을 거저 받는 처지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거저 받는 처지라면 나는 나의 힘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가진 돈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는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말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개훌륭’에서 ‘폭군 형과 껌딱지 동생’, 망고와 링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히 망고는 지나치게 일찍 입양해서 소유욕이 강합니다. 집이 자기 것이라 여기고 문에 누가 들어오려고 하면 난리를 칩니다. 이것을 말리려고 링고가 달려듭니다. 그래서 둘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망고에게 주인이 칭찬해 주어야 할까요? 하지만 보호자는 안쓰럽다고 간식과 말로 타이르려 합니다. 그러나 강 훈련사는 이 집이 망고의 것이 아님을 인식시킵니다. 그리고 결국 작은 강아지 집에 들여보냅니다. 자기 위치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보상을 주면 안 됩니다. 보상은 손님이 왔을 때도 자기 위치에 머물 수 있었을 때 줍니다. 그전에는 결핍을 줍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위치를 잘 모르고 내 힘으로 무언가 해보려 할 때는 당신 은총의 힘을 거두십니다. 그러나 나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주님께 온전히 위탁할 때 그분은 성령의 힘으로 도우실 것입니다. 이 방법이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입니다. 재물은 결국 내가 의지하는 힘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전에서 앉은뱅이를 고칠 때는 은도 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기적이 일어나는 힘이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당시 교회가 유럽에게 큰 권위를 행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티칸으로 들어오는 돈의 행렬을 보며 교황은 옆에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자, 보게. 저 긴 돈 수레 행렬을.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는 지났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제 ‘일어나 걸으시오’하고 말하던 시대도 끝났습니다.”
‘개훌륭’에서 외로운 엄마가 레트리버에게 수많은 간식을 시도 때도 없이 주어서 개가 주인을 거의 끌고 다니다시피 하게 된 상황이 나왔습니다. 강 훈련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할리가 잘할 때 간식을 보상으로 주세요. 예쁜 것은 잘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잘할 때 주님께서 성령의 힘을 주실 것입니다. 착하디착한 레트리버도 간식을 아무 때나 주면 고집 센 개로 변하듯, 인간도 주님께서 시도 때도 없이 은총을 주시면 인간은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먼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는 의미로 ‘십일조’를 봉헌합시다. 에덴동산에 머무는 법은 선악과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총으로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힘입니다. 돈도 힘입니다. 내가 힘을 빼지 않으면 무법자가 되기 때문에 주님은 기적의 힘을 주실 수 없습니다. 얌전하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수 있는 가난한 목자가 될 때 주님은 기적의 힘을 상으로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본당의 청년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영화를 즐겨 보지 않습니다. 영화만 보면 왜 이렇게 졸린 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전과 마찬가지로 졸다 나올 것 같아서 청년들만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 여럿이 함께 보면 절대로 졸 수 없다고 하더군요.
결과는 전과 마찬가지로 시작과 동시에 잠들었다가 끝날 때쯤에 깨고 말았습니다. 내용을 전혀 알 수가 없었지요. 극장에 나와서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영화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보는 관점이 모두 다른 것입니다. 재미있었다는 사람, 약간 지루했다는 사람, 영화를 분석하며 의미를 찾는 사람, 배우의 연기에 집중하는 사람….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르게 보는 것을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영화 보는 눈이 모두 다른 것일 뿐,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는 맞고 남을 틀렸다고 단정 지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정작 나만 틀리고 남들이 맞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늘 내가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믿지 않고 반대하는 자들과는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이교도 지방에서 돌아올 때 발에 묻은 이방의 흙을 털어 버리고 자기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우상 숭배로 더럽혀진 모든 것을 거룩한 땅에 묻히지 않으려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거절하며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우상 숭배의 이방인과 같이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의 악행으로 가혹한 천벌을 받은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이 도시의 벌보다도 더 엄중한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왜 주님의 기쁜 소식을 거절했을까요? 자기만 옳고 남은 틀렸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할 수 없음에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호세아 예언자의 말이 마치 지금 우리를 바라보며 하시는 주님의 슬픔 가득한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부디 평화의 길을 택하십시오. 단기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이 전쟁에서 승자와 패자가 결정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들의 무기가 가져올 고통과 참상, 생명의 손실을 절대 정당화하지 못할 것입니다.
- 성 마더 테레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10)
다른 삶을 살도록 초대받은 우리들이다. 거저받은 오늘의 새아침이다. 다시 주님을 향해 출발하는 우리들 여정이다. 좋은 여정은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을 때 더 구체적으로 도와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
수 많은 행복의 품목들을 내려놓는다.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는 우리들 여정이다. 물건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집중이다. 삶을 걸지 않고서는 더 큰 삶을 만날 수 없다.
삶의 순례자는 삶 안에 계시는 주님을 만난다. 삶은 고착되어 있지 않다. 적극적인 가난으로 우리 영혼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참된 기쁨은 지니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기쁨이다.
잡동사니들을 비우듯 회개의 여정은 비우는 만남의 여정이다. 그 만남의 여정 안에 거저 베풀어 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물질이 아니라 삶을 보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삶을 내어맡기는 삶의 신비이다.
떠나지 않고서는 새로움을 만날 수 없다. 용기가 필요한 믿음의 여정이다. 다시금 우리들 마음인 믿음을 점검하는 시간이다. 믿음은 뜨겁게 물질은 차갑게 다루어야 할 우리들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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