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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7월 3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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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4주일 -

 

 

2022년 7월 3일 연중 제14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시리라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그곳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7월 3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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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10장 1-12절, 17-20절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4주일
김우진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7월 3일 (일)
김우진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4주일
김주신 멜키올 신부 강론

 

 

2022년 7월 3일 (일)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우리 모두 저마다 함께 묶여 파견된 제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지명하시어 당신께서 가시려는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힘겨울 때마다 “둘씩” 짝지어 보내시는 예수님을 원망하며 호소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효율면에서나, 신자들에게 주는 부담의 차원에서나 혼자가 낫지 않을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둘씩 짝지어 보내신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는 심부름꾼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만 하거나, 마술사처럼 그럴듯한 기적을 보여 주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동료와 나누는 관계 안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군중은 제자들의 행동과 말투뿐 아니라 그 둘이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느낍니다. 

혼자 있을 때는 빛이 나지만 둘이 있을 때 빛을 내지 못한다면, 기적을 일으키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할지라도 진실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면 함께 살아가는 모습에서 활력과 생명력이 넘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더 큰 진정성을 얻게 됩니다. 

복음은 화려한 말이나 신기한 행동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이와 함께 만들어 가는 일상의 작은 사랑을 통하여 선포되는 것입니다. 

‘성인 옆에 순교자 나고, 신심 깊은 부인 옆에 냉담한 남편이, 열심인 사제와 수도자 옆에 빈자리만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둘씩 짝지어 보내신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리며 부부와 동료, 본당 공동체 모두 저마다 함께 묶여 파견된 제자임을 기억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어디 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시는데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머물 거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평화가 아닌 우리 평화가 머물 것이라는 얘긴데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을 주제로 나눔을 하고자 하는데 현실을 보면 평화를 선사하기는커녕 분란을 일으키고 평화를 깨는 사람이 많고, 평화를 깨는 이유는 그 자신에게 평화가 없기 때문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자기 안에 평화가 없는데 어떻게 남에게 평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평화가 없기에 불화를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제는 상반기 공동체 공동 피정을 위해 피정의 집을 갔는데 옆 집 개가 아침부터 계속 짖어대 제 마음의 평화를 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저 개는 왜 계속 짖어댈까?'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를 이해하고자 마음 먹고 관찰하고 생각해 보니 까치나 새들 한테는 짖지 않고 누군가 대상에게 짖어대는데 그 개의 경우 주인이거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짖어대는 거였습니다. 

말하자면 호소하거나 토로하는 거였습니다. 배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거나 똥 누고 싶으니 풀어달라거나 외롭거나 편치 않으니 관심 좀 가져달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없는 듯이 있으면 모두 평화롭게 되는데 이 개의 경우처럼 뭔가 불편하거나 결핍이 있거나 괴롭거나 하면 없는 듯이 있을 수 없고, 그것을 불평의 형태로, 요구나 주장의 형태로, 짜증이나 분노의 형태로 토로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의 평화를 깨고 불화체 하는 것입니다. 

사실 내 배 부르고, 등 따습고, 만족하고, 평안하면 남에게 요구하거나 시비걸지 않고 없는 듯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유교의 가르침처럼 안빈낙도할 수 있으면 가난해도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처럼 욕심과 집착이 없으면 부유해도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도가의 가르침처럼 없는 듯이 있으면 많은 사람 가운데 있어도 싸우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무엇이고 어떤 것입니까?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하셨고 오늘 제1독서에서도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고 하셨으며, 복음 환호성에서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다스리게 하여라."고 하심으로 우리의 평화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되게 하라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평화는 받아 지니는 평화입니다. 받지 않으면 없는 평화입니다. 

나의 평화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지니는 평화요, 또 우리가 전하는 평화도 받을 사람이 있어야 전해지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도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제대로 우리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주님의 평화를 갈망하고 그런 다음 주시는 대로 받아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평화를 줄 수 없으면 길들일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느 집을 들어가든지 먼저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것은 엄청 중요한 말씀입니다. 선교의 본질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개들에게 평화를 주지 않습니다. 거의 학대 수준입니다. 실제로 동물 보호단체에서 강 훈련사가 심한 학대를 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행복과 평화를 주어야 하는데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훌륭하다'에 어미로부터 애정을 한 달밖에 받지 못하고 데려온 천둥이가 나왔습니다. 집에 오는 손님은 물론 주인까지 자주 무는 개입니다. 교만이 하늘까지 이른 상태입니다. 이런 개에게 어떻게 평화를 줄까요? 아무리 잘해주려고 해도 주인은 개가 무서워 두려움에 떱니다.

이런 개에게는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평화는 주인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당신이 파견하시는 제자들이 남의 집에 들어가 주인처럼 먹고 마시고 잠을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발에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누가 갑인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화는 생존욕구에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생명이 보장되면 평화가 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합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부모가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주는 부모에게 자녀들은 순종합니다. 길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부모가 사는 세상에 살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참 평화를 주어야만 누군가를 길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주는 존재가 두려운 존재입니다.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부모를 잃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를 싫어할까 봐 가장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힘이 강하면 자기가 부모에게 무언가 해 주는 것처럼 여기고 부모가 평화를 주는 존재가 아니라 귀찮은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는 자녀를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은 두려운 것을 섬기는 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보다 돈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지배당하고 그것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에 내가 속하고 그것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주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향을 미치고 싶으면 내가 먼저 그것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주는 생명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디팩 초프라가 자녀에게 한 일이 이것입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먹고살 것은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먼저 평화를 주지 못하면 “너희는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평화가 집입니다. 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주인만이 그 집에 사는 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진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평화가 없는 사람이 평화를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풍랑에 죽기 직전이었던 사도들을 배 위에서 안심시키시며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 것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도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러면 평화가 옵니다. 그 평화는 세상 어떤 것도 빼앗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차인표 씨는 모태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한 번만이라도 듣기를 원했습니다. 평화를 갈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돈 한 푼 안 받고 ‘지저스, 지저스’란 뮤지컬에서 예수님 역할을 무려 4년이나 했어도 그분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컴패션이란 단체에서 인도 콜카타에 봉사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 시달릴까 봐 차인표 씨는 1등석을 타고 갔습니다. 왕처럼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 자체가 이미 자기 평화는 자기가 책임져 하느님을 평화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도에 도착해서 목사님이 아이들을 안아주면서 “너희는 소중한 존재다. 너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라는 말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한 지저분한 아이가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런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소중한 존재다.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그분이 주시는 평화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음을 그때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평화를 돈이나 명예, 사람들에게서 얻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평화를 주시는 당신께 길들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도 평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못 됩니다. 

평화를 줄 수 없으면 길들일 수 없습니다. 먼저 평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의 집에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 곧 죽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군가에게 평화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평화이신 분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평화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이웃을 평화가 필요한 사람으로 만듭시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심리학자 토마스 길로비치의 실험

 

토마스 길로비치라는 심리학자가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한 실험 참가자에게 오래전에 큰 인기를 가지고 있던 가수의 얼굴이 크게 들어가 있는 티셔츠를 입게 한 뒤, 다수의 다른 참가자들이 모여 있는 방 안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티셔츠 입은 참가자에게 다른 참가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 예측해 보라고 했지요. 
 
그는 사람들이 옛날 가수의 얼굴이 크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자신을 이상하게 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그의 티셔츠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기억하고 있었던 사람은 실험자 중에 10%도 되지 않았습니다. 
 
타인이 나에 대해 관심을 두고 바라볼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머리 스타일이 어떤지, 피부가 어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신경 쓰는 사람은 높이 잡아도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했었어도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내게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다른 사람의 기준과 잣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약한 ‘나’가 늘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지, 남들의 시선 때문에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닌,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지금보다 훨씬 위험과 고난이 따르는 길입니다. 그런데 주의 사항이 조금 이상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편안한 여행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입고 먹는 것 모두 하느님께 맡기고 오로지 하느님 나라 전파에만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것도 인사하느라 긴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교 사명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고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 말씀을 철저하게 따랐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집 떠나면 고생이라면서, 너무 힘들다고 불평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마귀들까지 복종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으며, 동시에 큰 기쁨을 갖게 됩니다. 
 
남들의 시선, 세상의 관점에 신경 쓰고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신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인생의 목적과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은 자기 삶에서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진정한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행동에 있으며, 그런 사랑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지혜를 준다.

- 톨스토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루카 10, 2)

 

곡식은 계절을 탓하지 않는다. 영글어가는 실천으로 계절을 따른다. 기도도 실천이고 일꾼들도 실천이다.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과 확신이다. 일꾼들은 가슴 설레는 새로운 일들을 통해 희망찬 기쁨을 몸소 체험한다. 

진정한 삶의 가르침을 파견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전달하시는 주님이시다.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듯 예수님을 따르면서 공동체의 시각이 다시 열리게 된다. 만남의 깊이는 따름의 깊이이며 공동체의 깊이로 이어진다. 

몸소 체험하는 것보다 더 힘찬 것은 없다. 파견의 시작과 돌아옴의 봉헌에는 삶의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중심이 되어 주신다. 변화의 이 모든 여정에 함께 하신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 지를 우리들에게 몸소 제시하여 주신다. 

제자들의 마음에 빛을 주시고 제자들의 생활에 따르는 기쁨과 보람을 알맞게 베풀어 주신다. 기도에서 기도로 실천에서 실천으로 전달되는 일꾼들의 참된 정체성이다. 실천 없는 정체성은 언제나 요란하다. 파견은 실천으로 결정된다. 

소유가 아니라 기도이다. 기도는 전적으로 주님께 맡겨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다. 좋으신 주님 안에 좋은 제자들이 뒤를 따른다. 기도로 영글어가는 제자들이다. 기도하는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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