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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7월 4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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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7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

 

 

2022년 7월 4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영원히 아내로 삼으시리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혈루증을 앓는 여자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어 그의 죽은 딸을 일으키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7월 4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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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9장 18-26절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박남준 미카엘 신부 강론

 

 

2022년 7월 4일 (월)
박남준 미카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7월 4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간절함과 믿음으로 내미는 손

 

‘손’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봅니다.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예수님께서 ……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손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사람의 손’입니다. 간절함과 믿음으로 ‘손’을 내미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인정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기에 그렇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열두 해’가 그 손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손’으로 사람을 살리는 손입니다. 성전에서 솟아나는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살아나듯(에제 47,9 참조), 예수님의 손이 닿은 소녀가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손’이 보입니다. 단순히 건강을 회복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창세 1,31 참조) 새로운 창조가 오늘 예수님의 손에서 시작됩니다. 

여인의 간절함과 믿음은 그가 예수님의 옷을 만지게 하고, 회당장의 간절함과 믿음은 예수님의 손을 움직이게 합니다. 오늘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겸손과 용기의 손으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을 만지고, 하느님의 손이 내 삶에 닿아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기를 청해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의 청혼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지금껏 저는 호세아서의 말씀으로 나눔을 하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이 말씀 묵상을 회피해 왔습니다. 

주님께서 그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좋고 이해되지만 나를 당신의 아내로 삼으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도 되지 않고 그 제의 그러니까 청혼과 결혼이 그다지 좋지도 황홀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님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어쩌면 빼도박도 못하게 매이는 것으로, 구속이나 속박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회피하지 않고 그 뜻을 생각해보기로 했는데 그러면 주님의 아내가 되는 것이 진정 구속이나 속박일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당신 옆에 묶어두기 위해서 당신 아내로 삼으시는 걸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거라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설사 사랑이라 할지라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에게 묶어두실 요량이었으면 애초에 우리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지 않으셨을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당신을 배반할 자유도 주셨고 떠날 자유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당신 아내 삼으심은 속박이 아닌데 그렇다면 뭡니까? 

묶어두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일 겁니다. 호세아서 전체에서 볼 때 아내로 삼은 이스라엘은 바람난 아내인데 그런데도 당신 사랑을 포기하거나 이혼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 뜻이 바로 "영원히 나의 아내로 삼으리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이것은 어미의 자식 사랑보다도 더 숭고한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어미는 자식이 어떤 죄를 지어도 당신 사랑에서 배제하지 않습니다. 아니, 당신에게서 나왔고, 당신의 분신이기에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선택한 사랑이고 그래서 포기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는 좋아서 선택했는데 싫어서 버릴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주님은 우리가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닌 것이고, 사랑으로 선택하신 것이요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 선택을 하신 겁니다. 

따지면 이런 것인데도 저는 여전히 저를 당신 아내 삼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내키지 않고 부담스러우니 이게 무엇입니까? 겸손입니까? 사랑 없음입니까?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주님의 청혼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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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기 삶에 대해 100%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변화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변화는 과연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거의 모든 이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변화라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변화가 어렵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은 사실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보다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반드시 해낸다’라는 생각을 무의식 속에 설정해놓고 집중하는 사람만이 변화를 가능한 것으로 이루게 됩니다.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생각으로는 자신의 원하는 것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또 상상만 해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체화해나갈 때 조금 더 변화에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마음보다는 의심과 불신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자기 변화에서 더 멀어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믿음을 갖춘 사람이 아닐까요? 실제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주님께서 대한 긍정적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의심과 불신으로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딸이 죽었는데, 와서 손을 얹으시면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다인들은 종종 다른 이의 머리에 양손을 얹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 경우 보통 ‘손’이 복수로 쓰입니다(양손이니까요). 그러나 여기에서는 복수가 아닌 단수로 쓰입니다. 단수로 사용할 때는 예수님의 카리스마적인 행동과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즉, 회당장이 손을 얹어 달라는 것은 단순히 의식적인 행위가 아닌,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주어져서 살아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믿음을 통해 회당장의 딸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 역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믿음이 그의 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입으로 믿는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생각만으로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과 같이 예수님을 찾아가야 하며, 혈루증을 앓던 여자처럼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려는 용기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믿음을 통해 진짜 자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 삶에서 하느님이 함께하신 기억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교황 베네딕토 16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마태 9, 25)

 

모든 치유의 시작에는 소통이 있다. 먼저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이시다. 소통하는 법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신다. 믿음은 소통의 본질이다. 성장할 때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믿음을 지켜주고 있다. 

아버지의 올바른 믿음은 딸 이야기를 제대로 듣는 경청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신다. 간절함과 간절함의 만남이 참된 치유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더 간절하시다. 

예수님의 간절함은 관점의 변화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관점의 변화가 치유이다. 믿음에 눈뜨는 시간이다. 믿음과 치유는 시점을 바꾸는 우리들 관계의 새로운 시도이다. 자고 있는 우리를 깨우시는 예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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