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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
2022년 7월 6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은 죗값을 치러야 하고 사마리아는 망하리라고 하며,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도록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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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0장 1-7절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이한석 사도 요한 신부 강론
2022년 7월 6일 (수)
이한석 사도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7월 6일 (수)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쟤가 있지 않습니까? 쟤를 보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를 모두 고쳐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가까이”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당신의 삶에 더 깊이 참여하라는 뜻이며, 이것이야말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더러운 영들이 쫓겨나고 병자와 허약한 이가 치유받는 것은 성경에서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승리가 당신의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열두 제자의 이름이 “사도”라는 호칭으로 소개됩니다. 복음을 읽으면서 이 부분을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이미 익숙한 이름들이기도 하지만 그 명단에 자신 또는 친밀한 이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본당에서 봉사자를 선발하여 명단을 발표하여도 교우들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그 명단에 올릴 마음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어찌 신자들뿐이겠습니까? 사제품을 받으며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라고 바쳤던 기도가 점차 “쟤가 있지 않습니까? 쟤를 보내십시오.”라는 기도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제자들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계속 이루십니다. 그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안에서부터.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가 사도로 부르심 받은 것에 이어 파견을 받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열두 사도는 많은 제자 중에 사도로 뽑힌 제자들이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한다는 뜻이며 어느 한 지파도 빠지지 않는 온전한 하느님 공동체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민족들에게 가지 말라는 말도, 다른 민족을 배제하시는 그런 뜻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 공동체를 온전히 이루라는 뜻이며 그러기 위해 길 잃은 양들을 우선 모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먼저 하느님 공동체를 온전히 이루라는 것도 그들이 공동체로 다른 민족들에게 가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제가 이 복음을 읽을 때마나 부끄러운 것은 선교를 한다고 해외를 돌아다니고 해외에 나갈 수 없으니 가까운 곳부터 선교를 한다고 <여기선교협동조합>을 세우고 요란을 떨지만 오늘 주님 말씀처럼 밖으로 나가기 전에 집에서부터 복음을 선포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실패이고 포기입니다. 사실 밖에 나가 복음 전하는 것보다 안에서 선교하는 것이 더 힘들고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사는 것을 안에서는 포기하고 밖을 선택합니다.
이 실패와 포기가 뼈아픈 오늘이고, 그래서 다시 집에서부터 복음을 살기로, 안에서부터 형제애를 살기로 겸심하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복음화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이방 민족이나 사마리아 땅에는 가지 말고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길잃은 이들에게 보내십니다. 이는 아직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임을 예수님께서 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훌륭’ ‘오줌지옥견’에서 강형욱 훈련사는 역대급 분노를 폭발하였습니다. 두 명의 젊은 남자가 개 네 마리를 키우는데 아무래도 개가 문제가 아니라 보호자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 네 마리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데나 오줌을 쌉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싸웁니다. 주인은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안 되고 아무리 말려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강 훈련사는 한눈에 개가 아니라 주인이 문제임을 알아봅니다. 치우지 않은 오줌과 똥이 구석구석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강 훈련사는 말합니다.
“개가 소변을 봐서 내가 이런 집에 산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개들 때문에 집이 이렇게 된 게 아니에요. 보호자님이 집을 지켜주지 않아서예요.”
강 훈련사는 이런 환경 자체라면 자신이 불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호자들은 어쩌면 반려견들을 통해 자신들이 집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강 훈련사는 왜 불안할까요? 개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불안한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개를 키우면 안 된다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그들이 한 번 해보려고 하니 먼저 청소를 도와줄 테니 일주일만 그 상태를 유지해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다시 갔는데 좋아진 줄 알았더니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사람은 그리 빨리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산책 시간을 짜고 강 훈련사의 지시대로 열심히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메타인지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능력을 아셨기에 이방 민족과 사마리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당에서 봉사한다고 하면서 집안 식구들은 다 냉담하고 함께 가정 기도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성당에서 봉사하는 게 정당한 일일까요? 먼저 집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어느 정도 집이 안정되고 봉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봉사해도 나와 성당에 이득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구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가 이렇게 몸살을 앓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세상도 힘들어지겠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도 피해를 봅니다.
대학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말이 있습니다. 내 몸을 닦고 집을 제어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한다는 뜻입니다. 말뜻보다는 말의 순서가 더 중요합니다. 먼저 나를 죄 안 짓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하고 가정을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나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그러면 세상도 평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복음화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당신이 먼저 거룩해지려고 하셨다고 하십니다.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빨이 다 썩었어요. 사탕을 먹지 말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안 듣습니다. 제 아들은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들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말씀 좀 해주세요.”
그런데 뜻밖에도 간디는 “한 달 후에 데리고 오십시오. 그때 말해주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이어머니는 놀랍고도 이상했으나 한 달을 기다렸다가 다시 간디에게 갔습니다. 간디는 말합니다.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또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나요?”
“글쎄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아이어머니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으나 참고 있다가 한 달 후에 또 갔습니다. 간디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
아이는 대답합니다.
“예! 절대로 사탕을 안 먹을래요.”
소년의 어머니가 간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 한마디 하시는 데 왜 두 달씩이나 걸려야 했나요?”
“실은 나도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할 수가 있나요. 내가 사탕을 끊는 데 두 달이 걸렸답니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자녀는 그렇게 살게 하겠다는 게 말이 될까요? 내가 사는 능력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니 먼저 나부터 신앙의 삶을 다잡읍시다. 그리고 가족도 성가정으로 만듭시다. 그다음에 성당에서 봉사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복음화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임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 사실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제 위의 형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집 옆에 다리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근처를 가면 꼭 다리 밑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혹시 나의 진짜 부모님이 계시지 않을까 싶어서였지요.
다리 밑에서 주워 온 ‘나’라는 말을 계속 믿게 되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형, 누나들과 저는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힘도 약하고, 운동도 못하고, 그림도 잘 그리지 못하고…. 그 밖에도 못 하는 것투성이인 저와 달리 형, 누나들은 모든 것을 잘했습니다. 그래서 진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어려서 못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어느 날, 어머니 친구분이 집에 놀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고는 제 위의 형과 쌍둥이냐고 묻습니다.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이 말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다리 밑에서 주워 온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부정적인 이유만을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통해 긍정적인 생각을 전혀 떠오르지 못하게 합니다.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없이 이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불가능한 이유를 찾는다면 계속해서 찾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파견 명령을 받아들여서 전교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믿었기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만 긍정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대시하는 지방에 가지 말고 우선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고 하시지요. 사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민족과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이 어떤 곳인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곳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반대편에 있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기쁜 소식인 복음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굳게 믿은 제자들이 성공적인 전교 여행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호세 10,12)라고 하시지요. 부정적인 생각으로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닌, 지금 당장 믿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이 비록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힘도 가득합니다.
- 헬렌 켈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마태 10, 6)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다. 그것은 참된 사랑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하늘 나라의 생생한 복음이다. 곡식을 돌보는 농부의 지극한 보살핌은 곡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며 정성이다. 관계안에서만 볼 수 있고 관계안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함께하시는 사랑의 주님이다.
사랑의 지극함은 부르심과 응답으로 드러난다. 흩어진 백성을 사랑으로 모으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참모습과 참 뜻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파견하시는 사랑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참된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새로운 탄생을 불러일으킨다. 새로운 탄생이란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는 사랑의 변화이다.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오늘의 사랑이다. 우리자신이 새로워지는 기쁨이다. 더 이상 어제의 우리가 아니다. 참된 우리란 길 잃은 양들을 도와주는 사랑이며 봉사이다.
사랑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인격의 길을 다시 찾게한다. 사랑의 삶은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진실된 사명이다. 진실된 사명은 뜨거운 삶의 현장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는 인격의 승화이다.
인격의 고귀함을 되찾아주는 일이야말로 제자들의 책무이며 신성한 사명이다. 그러기위해선 먼저 제자들이 기뻐야 한다. 그 기쁨을 생활로 나누는 것이다. 생활의 복음은 생활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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