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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7월 1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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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7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

 

 

2022년 7월 1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날이 올 것이라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있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드시며, 당신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7월 1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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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9장 9-13절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7월 1일 (금)
최정훈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7월 1일 (금)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우리의 속마음을 건드리는 복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구원 사명’이 마태오 복음사가의 성소 이야기 안에서 소개됩니다. 

먼저, 마태오는 중풍 병자가 치유된 사건(9,1-8 참조)에 이어서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평상에 누워 있던 중풍 병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해방된 이야기가, 자신이 한평생을 묶여 살았던 세관에서 해방된 체험과 닮았다고 본 듯합니다. 

또 마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자신을 먼저 “보시고” 시작되었음을 전하면서 이 부르심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셨고,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마태오는 자신의 성소 이야기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실인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이유’를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가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을까요? 

마태오도 우리처럼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한참 뒤에나 알게 되었을 듯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마태오는 회개하였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회개하였다는 점입니다. 

부르심이 회개에 앞섭니다. 교회는 회개한 이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런데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의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복음은 그런 우리의 속마음을 건드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기대하지 마라, 이런 개는 꼭 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이것에 기분 나빠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하셔야 하는지 아십니다. 왜 바리사이들과 함께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들 마음을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개로 치자면 언젠가는 반드시 예수님을 물 수 있는 개들과 같았습니다. 그런 개 무리 안에 섞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994년, 자신의 부모를 살해하는 존속살해를 저질러 현재까지 사형수로 복역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존속 살해범을 논할 때 첫 손으로 꼽히고 있는 범죄자가 있습니다. 박한상입니다. 

박한상은 사실 태생부터 상당히 안 좋은 인성을 가졌습니다. 이 때문에 학교와 병원을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비행을 일삼고 싸움질과 폭력을 행사하는 학교폭력 가해자였습니다. 이런 아이가 도박과 쾌락에 빠졌으니 돈도 안 주며 늦게서야 그를 질책하는 부모를 어떻게 했겠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어떤 자녀가 나를 물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이들을 힘들게 만드는 푸틴은 어렸을 때 어땠을까요? 그냥 깡패였습니다.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보다 덩치가 큰 형들과도 싸우고 다니는 동네의 말썽꾸러기였습니다.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숙제는 나 몰라라 하고 칠판 지우개를 친구에게 집어던지고 수업 중에도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등 늘 주변으로부터 손가락질받는 문제아였습니다. 게다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불량한 애들이랑 어울리며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첩보원이 되고 싶었던 푸틴은 어린 시절부터 무술을 연마하여 삼보와 유도 등 무술을 배웁니다. 레닌그라드에서 열린 삼보나 유도 대회에서 우승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히틀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운동도 잘하지 못했습니다. 미술로는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많은 돈을 벌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을 보면 우쭐하고 대장을 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선생님은 이렇게 히틀러를 평가했습니다. 

“1. 재능은 없고, 성실하지 않으며 교칙에 순응하지 않고 고집이 세며 고자세임. 2. 또한 꾸지람하면 오만불손하며, 급우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함.”

히틀러는 어떤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군인이 되어 전쟁하는 중에는 자기 지배력을 통제할 필요가 없었기에 가장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수천만 명이 죽게 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개는 훌륭하다’를 보면 주인을 무는 개들이 나옵니다. 이 개들의 특징은 ‘세속-육신-마귀’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소유욕’이 큰 영구는 주인집이 자기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는 주인을 물려고 합니다. 

또 ‘식탐’견도 여럿 나옵니다. 식탐이 많은 개는 주인이 밥을 주는데도 주인이 밥그릇을 만지면 성질을 부립니다. 

마지막으로는 ‘지배욕’이 강한 개가 나옵니다. 라오는 어렸을 때 받은 상처의 화풀이를 주인에게 합니다. 

이들에게 하는 훈련은 그것들의 욕구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들이 주인을 물지 않게 하려면 탐욕이 강한 개에게 누가 주인인지 알려주고, 식탐이 많은 개에게는 그 밥이 누구에게서 오는지 알려주며, 지배욕이 강한 개는 물속에 집어넣어 주인에게 의지하게 만듭니다. 

결국 세속-육신-마귀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개들에게서 나오고 그 개들이 남을 물지 않게 만들려면 그 탐욕-식욕-지배욕을 줄여주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구가 강한 개는 반드시 사람을 문다는 것이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한 번 그것들에 빠지면 개처럼 길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강 훈련사처럼 통제해 줄 어른이 없기 때문입니다. 박한상의 아버지는 늦게서야 그를 길들이려 했습니다. 

“너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놈이다. 그렇게 말씀을 피우려면 호적을 파라.”

하지만 아들에게 물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아이들이 생기지 않게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가장 좋은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십일조’입니다. 

세속-육신-마귀는 십일조만 낼 줄 알면 다 해결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오히려 돈에 대한 욕심, 쾌락, 교만을 키우기 위해 십일조를 했습니다. 이것을 줄이기 위해 내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주님 것이고 또 먹을 것을 좀 절제하고 그리고 주님께 의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무는 자녀로 성장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자녀로 성장합니다. 우리들도 결국 구원을 못 받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십일조를 삼구를 없애려는 마음으로 내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항상 ‘좋을 때’에 살고 있음을 잊지 말라.

 

작년 아버지 장례 때에 집안 어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종친회 같은 곳에 잘 나가지 않아서인지 정말로 오랜만에 뵌 것입니다. 그런데 집안 어르신 중의 한 분이 “조 신부, 올해 몇 이지?”라고 나이를 물으셨습니다. 제 나이를 말씀드리니, “참 좋을 때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삼십 대에도 또 이십 대에도 제 나이를 물으셨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참 좋을 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보다 젊은 나이를 사는 제가 부러워서 그렇게 말씀하셨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항상 ‘좋을 때’에 살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나쁠 때가 있기도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쁠 때도 가장 좋은 시간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나이는 집안 어르신의 말씀처럼 가장 좋은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좋은 때를 살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구원받기를 원하셨던 주님이시지요. 구원으로 나아가는 지금이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위어 주님께 데려옵니다.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당시에는 병을 죄의 결과로 생각했었습니다. 죄를 지었기에 벌로 병을 얻게 되었다고 간주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권한이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죄를 용서하신 다음에 건강을 회복시키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중풍 병자를 걷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셨다는 율법 학자의 비난이 근거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맞이하고 함께하는 지금이 어떤 때일까요? 가장 좋은 때입니다. 문제는 가장 좋은 때, 은총으로 충만한 때를 살면서도 불구하고 ‘믿음 없음’으로 인해 가장 좋은 때를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믿음을 두지 못하는 율법 학자들이 오늘의 상황을 마주하면서 기뻤을까요? 아닙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다가와서 겸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때를 사는 비결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심판 날에 우리는 무슨 책을 읽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했는지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 토마스 아 켐피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13)

 

매순간이 사랑이다. 무엇이 참된 사랑인지를 다시 보고 배우는 은총의 시간이다.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이 다름아닌 우리를 향한 참된 치유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언제나 가능성을 열어 놓으시는 주님이시다. 

그 어떤 사랑보다 더 할 수 없을 만큼 많고 크신 사랑을 오늘도 우리는 체험한다. 언제나 사람들 안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시는 주님이시다. 변화와 희망의 새로운 살맛나는 새 길이다. 죄인과 함께 하나된 행복을 만끽하시는 행복의 실천가이신 주님이시다.

자연스럽게 우리들 삶에 사랑의 가르침을 주신다. 병든 이들에겐 의사가 되시고 죄인들에겐 빛이 되시고 나눔이 되신다. 죄인들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회개의 나날들이다. 

참으로 진실하신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님이시다. 다름아닌 저 자신이 죄인이며 병자임을 알기에 오늘도 사랑이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한다. 이것이 삶의 가장 큰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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