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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28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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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2022년 6월 28일 (화)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약하다고 꾸짖으시며 바람과 호수를 잠잠하게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28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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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복된 이레네오 주교가 진리를 가르치며 교회의 평화를 이루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도 믿음과 사랑으로 새롭게 되어 일치와 화목을 위해 온 힘을 다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8장 23-27절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무렵 

23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한솔 도미니코 신부 강론

 

 

2022년 6월 28일 (화)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한솔 도미니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6월 28일 (화)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왜 겁을 내느냐?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호수에서 풍랑을 가라앉히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 함께 배에 올랐는데,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일 지경에 이릅니다.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제자들의 혼란과 공포를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배가 뒤집힐지도 모를 참으로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을 흔들어 깨우며 말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시며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풍랑이 멎고 호수가 잠잠해집니다. 제자들이 몹시 놀라워하며 말합니다. “이 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보여 주십니다.

전통적으로 성경에서 배는 교회를, 바다는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항해하는 배로 자주 묘사됩니다. 또한 바다의 거친 바람과 파도는 세상을 항해하는 교회가 겪는 갖은 어려움과 곤경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그 어떤 어려움도 당신의 권능과 말씀만으로 다스리실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주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분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족한 믿음’이 아닌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맡겨 드리며 도우심을 간절히 청한다면, 그분께서는 기꺼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꾸짖음 당하지 말고 꾸짖는

 

오늘 주님께서는 두 번 꾸짖으십니다. 하나는 큰 풍랑에 겁을 내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에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분은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이런 주님을 보고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꾸짖음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진정한 꾸짖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꾸짖을 줄도 모르고 잘 꾸짖을 줄은 더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꾸짖을 줄 모르고 싫어하면서도 꾸짖음을 당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꾸짖음을 당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합니까? 그런데 또 얼마나 자주 꾸짖음을 당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꾸짖음 당할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들에게서 꾸짖음 당할 짓도 하지 말아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으로부터 꾸짖음 당할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선제적으로 "자기 꾸짖음"을 해야 합니다. 남이 꾸짖기 전에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꾸짖으시기 전에. 

겁내지 말아야 할 것을 겁내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꾸짖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겁내지 말아야 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까? 

바퀴벌레나 지렁이를 두려워한다면 그런 나를 꾸짖어야 합니다. 말이 됩니까? 그까짓 바퀴벌레나 지렁이를 두려워하다니요. 

어둠을 두려워한다면 그런 나를 꾸짖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큰 풍랑을 두려워했다고 제자들을 꾸짖으셨는데 그까짓 어둠을 가지고 두려워한다니 그것이 말이 됩니까? 

사람들의 비판을 두려워한다면 그런 나를 꾸짖어야 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면 그런 나도 꾸짖어야 합니다. 칭찬과 성공만 있어야 한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살다보면 욕도 먹고 실패도 해야 하는데. 

그런데 두려워하는 자신도 꾸짖어야 하지만, 믿음이 없는 자신을 더 꾸짖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면서 믿음이 없기에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믿음 중에서 자신감 없음 곧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도 꾸짖어야 할 것이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자신을 우리는 더더욱 꾸짖어야 합니다. 

사실 자신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되니 자신에 대한 믿음은 없을 수도 있지만 신앙인에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믿음의 근거가 되는 믿음이니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근거로 이제 두려움을 주는 것들을 꾸짖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아무것도 아니니 그 어떤 것도 '까짓것'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고 또 우리를 사랑하시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악들은 악도 선이라고 믿으며 '까짓것' 할 수 있고 그래서 너까짓 것들 썩 물러가라 꾸짖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꾸짖음 당하지 말고 꾸짖는 사람 되기로 오늘 결심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체를 영해도 변하지 않는 이유: 나는 두려운 것을 닮아간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에 죽을까 봐 두려워하다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고는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제자들의 두려움은 이제 자연에서 주님께로 변화되어갑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기적으로 원하신 일입니다. 

우리 안에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체성사로 그분을 모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킬 힘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두려워하기 전까지는. 왜냐하면 사람은 두려운 것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개는 훌륭하다’에서 배은망덕 견 영구가 나왔습니다. 영구는 착한 주인들을 뭅니다. 특별히 소유욕이 강해서 집을 자신의 것으로 여깁니다. 마당만 들어오면 통제가 안 됩니다. 주인들은 개에게 모든 것을 맞춥니다. 물리기 싫기 때문입니다. 문을 들어갈 때도 허락받고 산책할 때도 개에게 맞춰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개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은 두려운 것에 의해 변화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체 앞에서 두려워 떨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손바닥보다 작은 밀떡 덩어리를 두가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속에 누가 계신지, 그 실체를 알면 어떻게 될까요? 까무러치고 말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우리는 이래라저래라 청하기만 합니다. 그분이 이 세상 모든 걱정과 두려움을 한순간에 없애버릴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청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사제가 들고 있는 그 작은 밀떡이 무엇인지 안다면 기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합니다. 타볼산에서 잠깐 신성을 보여주셨을 때도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서 요한이 그분을 천상에서 보았을 때는 납작 엎드렸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하느님으로 보고 두려워할 줄 알 때만 그분은 나를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나의 노력으로 성장시켜야 합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동석은 엄마를 매우 싫어합니다. 아빠의 친구였던 사람의 첩으로 들어가서 그 집에서 형들에게 매를 맞으며 자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한 마디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비뚤어진 성격으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말기 암에 걸렸습니다. 동석은 놀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왜 그리 모질게 대하셨는지 알아보기 위해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동석 의붓아버지의 제사에 모시고 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엄마 옥동은 동석의 편을 들어줍니다. 전에는 그렇게 해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 세 끼 밥을 먹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석도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읽으며 조금씩 엄마를 용서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점점 두려워집니다. 엄마를 잃을까 봐. 사랑은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잃게 될까 두렵습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을 잃는 일입니다. 

옥동은 동석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어놓고 더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동석은 죽은 엄마를 끌어안고 한없이 웁니다. 이때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죽은 어머니를 안고 울며 난 그제서야 알았다. 난 평생 어머니, 이 사람을 미워했던 게 아니라 이렇게 안고 화해하고 싶었다는 걸. 이렇게 오래 안고. 지금처럼 실컷 울고 싶었다는 걸.”

어머니는 약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분이 사라지면 나의 변화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세상 것들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노예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동석이 어머니와 동행하며 어머니를 잃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게 되었듯,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분을 잃는 것을 두려워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내 안에 가장 두려우신 분이 하느님임을 안다면 세상 다른 것은 두려운 것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변하게 됩니다. 그분처럼 변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함께 있으면서도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

 

성인께서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의 믿음은 어떨까요? 당연히 믿음이 컸기에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인 역시 이 세상 안에서 믿음의 문제로 고민하신 분이 많다고 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믿음이 없어. 나는 믿지 않아.” 
 
성인이 된 마더 데레사도 믿음에 관한 고민을 많이 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믿음이 약하다’라고 고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닐까요? 오히려 ‘나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만큼 교만하다는 증거일 테니 말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문명의 발달로 볼 것도 많고, 들리는 것도 너무 많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주님을 보기도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보는 것, 주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아예 포기한다면 믿음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약한 믿음이 아니라, 없는 믿음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믿음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한 믿음에서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즉 주님을 보고 주님 말씀을 들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 성인들의 믿음에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라운 표징들을 직접 두 눈으로 봤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을 때,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 할지를 모릅니다. 사실 제자 중에는 어부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돌발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자기의 능력도 믿지 못했고, 또 함께하는 주님의 힘도 믿지 못했기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자 아주 고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처럼, 자연의 힘을 향하여 ‘주님’으로서 명령하십니다. 그만큼 자연을 향해서도 명령을 내려서 복종하게 하시는 큰 힘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분과 함께할 믿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떨까요? 예수님과 늘 함께했었던 제자들도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하물며 우리의 믿음은 어떨까요? 한없이 약한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이 약함을 인정하면서, 조금 더 나아지는 노력을 계속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조금씩 주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불만은 생활에 독을 섞어 놓는다. 참고 견디는 것은 생활에 시적인 정취와 엄숙한 아름다움을 준다.

- 아미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마태 8, 28)

 

바람이 거세다. 풍랑을 치유하는 믿음이다. 믿음은 바람과 호수를 꾸짖는다. 꾸짖는 믿음은 삶을 위한 올바름의 시작이다. 거센 풍랑을 봉헌한다. 봉헌은 고요함으로 이어진다. 삶의 풍랑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이 계시기에 겁내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풍랑처럼 일어나는 모든 것을 나누길 바라신다. 참된 나눔은 고요하다. 나눔으로 믿음은 더욱 깊어진다. 풍랑의 체험은 주님을 깨닫는 은총의 체험이 된다. 

사랑의 교훈은 나눔의 교훈이다. 삶의 역사에서 체험했던 세찬 풍랑도 제자리를 잡듯 고요해졌다.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는 주님께서는 실은 우리 믿음을 꾸짖으신다. 

믿음도 사나운 바람처럼 봉헌의 이 여정을 거치며 하느님을 드러내는 고요가 되고 기쁨이 된다. 우리의 삶에 나의 삶에 풍랑을 다스리시는 주님이 계심을 믿는다. 겁낼 것 없다. 이것이 삶이다. 주님을 마침내 만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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