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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6월 29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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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6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2022년 6월 29일 (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헤로데 임금이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지만, 천사가 나타나 그를 빼내 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티모테오에게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시자, 베드로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6월 29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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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축제로 오늘 교회가 거룩한 기쁨을 누리게 하셨으니 교회의 기초를 놓아 준 그들의 가르침을 저희가 모든 일에서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6장 13-19절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정훈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6월 29일 (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이길재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6월 29일 (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모든 이에게 모든 것

 

제2독서의 말씀은 바오로 사도가 그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느끼는 감회를 매우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그야말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는 데 헌신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이제 자신도 예수님처럼 희생 제물이 되어 피 흘려 순교하게 될 것임을 예감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생의 마지막을 담담히 준비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이르러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시고, 제자들에게도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1)로 복음서의 문을 여는데,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정체가 16장에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으로 선포됩니다. 

이를 시작으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하시고(16,21-23; 17,22-23; 20,17-19 참조),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제자였고,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으며(14,28-31; 15,15-20; 16,16-19 참조),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매고 푸는 권한과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고, 박해 속에서도 베드로는 주님의 보호 아래 교회를 충실히 이끌며 뒷날 순교에 이르기까지 본인의 사명을 다합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인 오늘, 특별히 주님의 사도이며 교회의 위대한 두 성인인 베드로와 바오로의 전구를 청하면서, 우리도 예수님과 더욱 일치하여 주님께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고백하고, 만나는 모든 이에게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열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신앙의 담금질

 

어제는 공교롭게도 사도들이 큰 풍랑 때문에 겁을 내고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꾸짖음을 듣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복음은 우리 교회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배저어 갈 때도 세상으로부터 큰 도전을 받고 인간적으로는 크게 흔들릴 수도 있지만 그런 때일수록 하느님께 믿음을 둬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약한 믿음 때문에 제자들이 풍랑에 겁을 내고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고 베드로 사도도 틀림없이 예외가 아니었을 터인데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반석으로 삼아 당신의 교회를 세운다고 하십니다. 

약한 믿음은 반석과는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처음부터 교회의 반석였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는 차츰 교회의 반석이 되어간 것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차츰 교회의 반석이 되어갔을까 이것이 요점입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흔들리면서 반석이 되어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 약하기에 흔들리지만 흔들림으로 인해 믿음이 단단해졌다는 역설입니다. 

물론 흔들림으로 인해 믿음이 아예 뿌리채 뽑힐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 그는 자기 입으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자기 스승 예수 그리스도가 확 죽어버렸습니다. 너무도 힘없이 죽어버렸고 속절없이 그리고 부질없이 죽어버렸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믿음이 뿌리채 뽑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힘없이 그리고 속절없이 죽어버리셨다는 것은 맞지만 부질없이 죽어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부질없다는 것이 지금은 쓸데없이 공연히 한 짓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본래는 대장간에서 불질이 없으면 담금질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질을 하고 물질을 해야 담금질이 되는 것입니다. 불질로 뜨겁게 했던 쇠를 물질로 차갑게 식히지 않으면 담금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불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있어야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믿음도 그렇고 우리의 믿음도 그런데, 믿음의 좌절이 바로 믿음의 담금질이고 하느님의 담금질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으면 제자들의 부활 신앙은 애초부터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었으니 주님의 죽으심과 그로 인한 제자들의 신앙 좌절은 부활 신앙을 위한 담금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면 믿음의 좌절이 문제가 아니라 좌절 다음에 믿음이 다시 불타오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질과 물질에 이어 또 불질과 물질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신앙을 다시 타오르게 하시고 이 체험을 통해 부활 신앙의 근간을 형성해주셨으며 그래서 후에 또 좌절을 겪을 지라도 다시 불질을 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반석 위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신앙을 키워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반석과 기둥이 되어준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축일을 특별히 기리며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담금질하기로 다짐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 나라에 속한 이들이 보여주어야 하는 표징은?

 

2007년 서해에서 20년째 주꾸미를 잡아 온 어부 김용철 씨는 청자를 꽉 붙잡은 채 딸려온 주꾸미를 보고 바다 밑에 무언가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김 씨는 이를 태안군청에 신고했고 잠수부들이 고려청자를 잔뜩 실은 채 가라앉아 있던 배를 찾게 된 것입니다. 주꾸미는 소라 껍데기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조개껍데기와 같은 것으로 막는데, 이들은 밑에 잔뜩 깔려있던 청자 조각들로 막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조각들을 달고 다닙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자신이 속한 환경의 것들을 붙이고 다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꾸미는 우리이고 소라 껍데기는 그가 따르는 ‘법’이며 그것을 덮는 조개나 고려청자는 자신이 속한 세상의 ‘표징’입니다. 사람들은 이 표징을 보고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합니다. 

우리 각자는 각자의 소라 껍데기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각자가 따르는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 법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뉩니다. 

태어날 때부터 따르는 법은 ‘생존 본능’입니다. 생존 본능만을 따르면 마치 ‘격리 원숭이’처럼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표징’을 보입니다. 아기에게는 모든 대상이 자기를 살리기 위한 도구입니다. 또한 모든 대상도 자기와 같을 것으로 여기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마치 정글에서 생존하기 위한 사람처럼 긴장되어 있고 모기에 물려도 죽을 것처럼 소란을 피웁니다. 이들은 ‘자기 생존’만을 추구합니다. 

두 번째로 ‘세상의 법’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탐욕과 쾌락과 지배욕의 법을 따릅니다. 그러면 세상에 속한 표징이 나옵니다. 이들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관계를 맺어도 ‘이기적인 관계’라는 표징을 보입니다. 자기 영광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추구한다는 표징이 있는 것입니다. 

황우석 사태처럼 일본에서는 후지무라 신이치 사건이 있습니다. 그는 점점 오래된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신의 손’이라 불리며 일본 대 스타로 등극합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유물들은 그가 산책하며 심어놓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발견된 160여 개 유적 모두 날조된 것이라 자백했습니다. 세상의 법을 따르는 이들은 이런 표징을 낳습니다. 

나와 세상에 법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하늘의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 법을 따르는 사람은 어떨까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표징을 보여줍니다.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처럼 목숨을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말기 암 선고받고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 이것을 알리지 않고 수단 어린이 후원 작은 음악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의 생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표징을 보고 하느님 나라를 상상합니다. 

오늘 베드로나 바오로 사도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죽어도 좋다’는 표징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직 하늘의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에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영광을 버리는 이들입니다. 

영화 ‘빅토리아와 압둘’(2017)은 최고 권력자로 60여 년을 왕좌에서 군림한 빅토리아 여왕과 한 인도 청년의 우정을 다루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이끄는 빅토리아 여왕은 왕관이 주는 중압감에 늘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압둘은 여왕에게 기념주화를 전달하기 위해 인도에서 파견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화를 주면서 여왕의 발에 입을 맞춥니다. 여왕은 자기를 미워해야 할 식민지 청년이 자신 발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며 호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를 비서로 채용합니다. 

압둘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낀 여왕은 압둘에게 이러한 어려움을 털어놓습니다. 

“멍청한 놈들! 고상한 바보 귀족들. 알랑거리며 주변을 맴돌고, 자리를 차지하려 기를 쓰지. 영국 여왕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아무도 모를 거야. 전 세계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날 증오하고 자만과 질투로 가득한 아홉 명의 자식이 있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압둘?”
압둘은 말합니다. 

“‘코란’에서 말하길, ‘우리는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라고 했습니다. ”

빅토리아 여왕은 이 코란의 말에 힘을 얻습니다. 새로운 소라 껍데기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압둘의 매력이 한몫했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의 위협에서도 끝까지 여왕을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여왕은 압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살아갈 날이 끝나가니, 숨 쉴 때마다 삶을 잡고 싶은 욕심이 생겨.”

“더 평안하고 좋은 곳으로 가시게 될 거예요.”

“영원의…. 연회장?”

그렇습니다. 압둘은 그리스도를 믿는 여왕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여왕이 죽자 신하들은 여왕과 관련된 압둘의 모든 자료를 불태웠고 그와 그의 가족을 인도로 쫓아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100년 뒤 1910년 압둘의 일기장이 발견됨으로써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하느님을 찾는 이가 줄어드는 이유는 하늘의 표징을 보여주는 이가 적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표징은 하늘의 법을 따를 때 저절로 딸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법이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그 표징이란 이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삶입니다. 이웃을 위해 언제든 죽는 것이 우리 행복이 되게 합시다.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부터 내가 속할 곳의 법을 따르고 그 표징으로 이웃에게 영원한 생명의 믿음을 주는 삶을 사는 게 가장 안전하고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을 바라보며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두 달 전, 5년 동안 써왔던 스마트폰을 교체했습니다. 더 쓸 수도 있었지만, 오래되어서인지 배터리도 금방 방전되었고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느려졌다는 것도 교체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 교체를 오랫동안 망설였던 진짜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자료들을 옮길 생각을 하니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료 옮기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몇 번의 클릭만으로 전에 있었던 모든 자료를 다 옮길 수 있었습니다. 기술의 발전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옮겨졌나를 확인하다가 사진첩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참 많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찍은 사진이 없는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이 1월에 찍은 것이었습니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데도 말입니다. 
 
보통 사진을 언제 찍을까요? 아마 기쁨과 설렘을 선사하는 풍경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몇 달 동안은 기쁨과 설렘이 없었다는 것이 아닐까요? 기쁨과 설렘을 가지고 풍경이나 사물을 보지 않았으니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쁨과 설렘은 다른 이의 것이 아니라 나만의 감정입니다. 따라서 그런 감정을 가지려 노력하고, 그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나만의 기쁨과 설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쁨과 설렘을 통해 우리는 행복한 나를 만들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모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으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요? 주님을 기쁨과 설렘의 감정으로 계속해서 만나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바오로는 당시 유능한 젊은이였습니다.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유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미래는 확실히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 회개한 뒤에 세상의 것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주님께 의지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열심히 신앙을 전파합니다. 
 
베드로는 바오로처럼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서 아주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교회의 반석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지요. 
 
이렇게 세상의 것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안에서 기쁨과 설렘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감정으로 주님과 함께했기에 하늘의 커다란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쁨과 설렘보다 슬픔과 무엇인가를 바라는 욕심이라는 감정으로 주님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신의 가치는 다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 엘리노어 루스벨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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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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