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7월 12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7. 12.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7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

 

 

2022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유다 임금 아하즈를 만나 아람 임금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인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7월 12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1장 20-24절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신희섭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7월 12일 (화)
신희섭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2022년 7월 12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벌을 받는 이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특별한 호의를 받은 고을들을 꾸짖으시며 저주받은 고을에나 어울릴 법한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복음에 따르면 그들이 불행해지고 심판 날에 무거운 벌을 받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을의 이름을 정확히 지칭하시며 그 잘못을 지적하시고 벌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통쾌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라면 그 정도까지 호의를 못 알아보지는 않았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불행한 이들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고, 심지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 고을과, 이미 멸망한 고을에까지 비교된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주민들이 지녔을 분노가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 고을들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에서 통쾌와 분노 가운데 어떤 감정을 느끼시나요? 

때때로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고을 이름에 가톨릭 교회, 우리 본당, 우리 구역,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겹쳐 보이는 것은 죄책감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와 우리 각자 안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말씀과 성체라는 기적, 전례와 성사, 그리고 거룩한 전통들을 통하여 기적이 계속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예수님의 이 ‘기적’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데서 이미 회개는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믿음은 무릅쓰는 것

 

오늘 하느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하시는 예언의 마지막 말씀은 이러합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그런데 무엇을 믿지 않으면 서 있지 못하리라는 것입니까?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어떤 예언을 하신 것입니까?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고 이제 예순다섯 해만 있으면 무너지리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지금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아람 연합군이 아무리 강해 보이고 그래서 그들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망할 것 같이 보여도 이들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불과하여 예순다섯 해만 지나면 무너지니 마음이 약해져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강해 보이는 원수들이 예순다섯 해만 지나면 무너질 거라는 말을 믿으면 마음이 약해지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래서 예루살렘이 무너지지 않을 테지만 관건은 그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것입니다. 

사실 예순다섯 해가 지나면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무너질 거라는 말을 믿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받은 것이 삼십칠 년인데 독립운동을 하다 나중에 변절자가 된 많은 분이 그 지배가 심십칠 년이면 끝나는 줄 알았다면 아무도 변절치 않았을 겁니다. 

이때 변절하지 않은 분들, 예를 들어, 김구 선생이나 안창호 선생 같은 분들이 변절한 분들에게 일본은 오래 가지 않아 망할 것이라고 그러니 계속 버티자고 설득해도 그말은 멀리 느껴지고 당장 앞에 있는 일본은 크게 느껴졌을 겁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그럴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멀리 느껴지고 현실은 오래 갈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약하거나 없는 사람에게는 참고 견디면 극복의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주님 말씀하셔도 그 날이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올 것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다는 것은 많은 고통을 무릅쓰고 믿는 것이요, 오랜 기간을 무릅쓰고 믿는 것이며 그래서 믿음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무릅쓸 것이 많습니다.


반대를 무릅써야 합니다. 

손해를 무릅써야 합니다. 

고통을 무릅써야 합니다. 

배신을 무릅써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도 무릅써야 합니다. 

실망을 무릅써야 합니다. 

심지어 절망도 무릅써야 합니다. 

 
이런 것을 무릅쓰지 않고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없음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치유가 안 돼도 기도해주면 위로는 남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기적을 많이 행하셨지만 믿지 않는 도시들을 꾸중하십니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3-24)

하지만 요즘에 우리가 믿지 않는 신자들에게 이런 꾸중을 할 수 있는 처지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기적을 일으킬 힘이 없다고 이미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유튜브에서 박혁이라고 하는 어떤 개신교 청년이 콜롬비아에 가서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불량 청소년 세 명에게 설교하고 복음을 전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콜롬비아는 가톨릭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돈을 요구하는 청소년들에게 갑자기 예수님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없이는 무엇을 가져도 만족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일한 기쁨은 그리스도라 말합니다. 특별한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청소년 세 명은 그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를 함께하자고 하니까 손을 잡고 기도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저희 죄들을 용서해 주소서!”였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으나 그들은 무언가에 눌린 듯 기도를 따라 합니다. 
처음에 저는 그의 믿음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것은 그다음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여기 아픈 사람 있니?”

‘치유의 기도와 안수’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기도를 받은 이들에게 또 묻습니다. 

“움직여봐!”

그는 말합니다. 

“새로워진 거 같습니다.”

사람들은 손뼉을 칩니다. 예전 같으면 “쇼하고 있네!”라고 했을 텐데 부끄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모여든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안수할 수 없자 각자가 아픈 곳에 손을 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치유의 기도를 합니다. 비웃는 사람들도 없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그의 말을 따라서 함께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친 그는 말합니다. 

“움직여보세요. 당신의 통증은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본 것은 그가 하는 치유의 행동을 따라서 한 이들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들었지만, 그의 말만을 들은 이들은 그냥 지나쳐 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설교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아주 단순하고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자신에게 성령의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믿는 이들은 그와 함께 예수님께 자신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길거리에서 손을 올리고 하였습니다. 

이 어린 선교사가 쇼하는 것인지 착각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예수님께서 길거리에서 전도하시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놀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당신 기적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무라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신자들을 나무랄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겸손하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올 리가 없어!’

치유해 주겠다고 하지 않고 병원에서 치료 잘 받고 오라고 강복해줍니다. 나 자신이 치유의 힘이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는 치유의 능력을 주시고 나쁜 영들에 대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사제는 성령의 힘으로 죄를 사하고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합니다. 그런 기적에 비하면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은 새 발의 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믿으면서 치유의 능력을 주셨음은 믿지 못합니다. 개신교가 치유의 능력은 믿으면서 죄 용서의 권한은 주지 않으셨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몸이 좀 안 좋아 양호실에 누워있었습니다. 단순한 감기·몸살 정도였습니다.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개신교 학교를 나왔습니다. 양호실에 누워있는데 종교를 가르치던 선교사님이 갑자기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저의 머리에 손을 대더니 낫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조금 기도를 드리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았니?”

저는 속으로 웃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았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분은 다시 안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나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 모르겠지만 자꾸 물어보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나중에는 이렇게 얼버무렸습니다. 

“아, 예…. 나은 거 같아요….”

그런데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선교사님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마에 짚었던 그 따듯한 손길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쉽게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왜 나한테 안수 달라고 해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믿고 기도해주면 그 사람에게 적어도 사제를 통해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따듯한 위로는 남습니다. 

아프면서도 사제에게 치유를 청하지 않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가톨릭에 와서 고해성사만 보면 죄가 용서받는데, 본인 스스로 용서받겠다고 하는 개신교 신자들과 같습니다. 

서로 부족한 면을 보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완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치유의 능력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제들도 무조건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믿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신자들도 아프면 무조건 사제에게 청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이제 우리는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무랄 수도 없는 상황이 됩니다. 겸손해지려고 받은 능력을 믿지 않고 포기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의 사랑을 잊고서 그분께 기도하기는 어렵다.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믿음도 부족했고 기도도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신학교에 들어와서도 기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루하고 너무 길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도가 너무 즐겁습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를 묵상해보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족한 ‘나’임에도 당신의 일꾼으로 삼아 이끌어 주신 그분의 사랑, 저의 능력을 당신의 은총으로 채워 주시는 사랑, 신부로 사제서품도 받고 전혀 상상도 못 했던 방법과 장소에서 저를 쓰시는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니 기도가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미사, 기도, 묵상, 성경 읽기 등을 계속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우선되지 않아서, 즉 맨 뒤로 밀려나 기도를 못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다른 일이 있으면 짜투리 시간이라도 만들어서 만나거나 그것도 안 되면 전화 통화라도 합니다. 기도라는 하느님과의 대화도 짜투리 시간을 이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T.S.엘리엇은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잊고서 그분께 기도하기는 어렵다.” 
 
괜히 일 핑계를 대지 말고, 하느님 사랑에 집중해보십시오.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질책하는 장면이 두 가지 경우에 나타납니다. 하나는 위선을 일삼는 종교 지도자를 향한 질책이었고, 따른 하나가 주님의 은혜를 많이 입고도 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을 향한 질책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두 번째의 경우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세 도시는 상업적으로 가장 발달한 곳이었고, 동시에 많은 사람이 있어서 종교 교육이 가장 성행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만과 자기도취로 주님의 가르침을 외면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기적을 보고도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기를 간절하게 원하셨지만, 그들은 끝내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것에 관한 관심이 하느님 사랑보다 더 컸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일 때문에 사랑에 집중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기보다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나는 남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보다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을 언제나 생각한다. 고통과 괴로움에 지지 않고 끝까지 달렸을 때 그것은 승리로 연결되었다.

- 아베베 비킬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 11,20)

 

하느님의 뜻을 많이도 놓치며 살았다. 하느님의 간절한 뜻은 우리자신의 회개이다. 모든 성장의 시작에는 회개가 있었다.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회개이다. 우리자신에게서 시작되는 내적 질서의 올바른 회개이다. 

회개하는 사람은 복음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아름다운 복음의 사람은 생활의 변화로 생활을 치유하는 사람이다. 생활의 새로움은 언제나 십자가의 고통을 동반한다. 해산의 진통을 감수하는 탄생의 기쁨이다. 

겸손과 반성으로 하느님을 드러낸다. 세속이 주지 못하는 새로운 생명력을 우리들에게 주신다. 가장 강력한 생명력은 다름아닌 우리자신의 회개이다. 회개는 우리 삶의 목적이자 의무이다. 더 멋진 세상 더 밝은 세상을 위한 첫시작은 우리자신의 회개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회개의 길을 열어주신다. 한발 짝도 벗어날 수 없는 회개의 길이다. 가장 간절한 회개의 진리이다. 회개 없는 진리는 우리의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우리의 회개로 활짝 피어난다. 

우리의 회개로 우리 세상은 우리 삶의 자리는 보다 건전하고 보다 아름답게 바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란 매순간 정성들여 하느님을 향하는 회개의 삶이다. 회개는 행복을 위한 유일한 길임을 믿는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