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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
2022년 7월 14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베푸신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모두 당신에게 오라시며 당신께서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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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1장 28-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신희섭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7월 14일 (목)
신희섭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7월 14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사랑이라는 멍에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을 향하여,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 따르면 “무거운 짐”은 율법과 관련됩니다(마태 23,4 참조). 당시 율법 학자들은 율법의 세부 규정들을 만드는 일에는 열중하면서도 정작 그 규정을 마주한 이들의 어려움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세부 규정들 앞에서 느끼는 부담과 죄책감을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신심 있는 태도로 여겼나 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세부 규정들을 마주하는 이들의 힘겨움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께 초대하시며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성당 입구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 말씀이 좋아 보였는지 이단과 사이비 종교 교주들도 세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걱정 없이 쉬게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직장이나 가족, 인간관계에서 오는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그런 것과 다른 세상을 경험하라고 합니다. 내려놓아야 할 ‘무거운 짐’은 힘든 의무들이고, ‘안식’은 단절을 통한 일시적 편안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짐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라는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단순히 짐을 지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에 밀착시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배우는 사랑은 율법으로는 해낼 수 없었던 일, 나와 우리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향한 진정한 안식, 곧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방향도 바꾸고 방식도 바꿔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제게 이 말씀은 가장 짧아도 가장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하나도 빠지지 말고 당신께 오라는 말씀이고, 안식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대를 하시면 사람들이 다 갈까? 이런 묵상을 해봤습니다. 고생도 모르고 짐이 없는 사람은 주님께 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렇겠지요? 고생을 모르는 사람, 무거운 짐을 다 남에게 지우는 사람은 주님께 갈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생각해보니 고생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몸 고생이 없으면 마음고생이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몸 고생이든 마음고생이든 고생스러울 때 그리고 지고 있는 짐이 너무도 무거울 때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찾아가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 신자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사람이 고생스럽고 책임이나 인생의 무게가 무거워 위안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 주님께 가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인간에게 가서 인간의 위안과 조언을 받고 그것도 시원치 않으면 점쟁이한테 가서 점쟁이의 위안이나 조언을 받습니다.
세례 받았지만 성당에 나오지 않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아마 그런 사람들일 겁니다. 주님께 가서 위안을 받았거나 받는다면 왜 냉담하겠습니까?
앞에서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찾아가느냐 그것이 문제라고 했는데 사실 고생스러울 때 위를 보지 않고 옆을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영적 감각이 없는 사람에겐 그만큼 위를 쳐다보는 것이 쉽지 않고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바로 위로의 말을 내 귀에 들려줄 사람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수없이 벌을 받으면서도 우상을 만들고 숭배한 것이 뭣 때문이겠습니까? 하느님은 멀고 사람들은 가깝기 때문이 아닙니까?
문제는 인간이 안식을 주고 인간이 만든 것이 답을 주느냐 그것입니다. 안식을 주길 바라는 그도 위안을 바라기에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안식과 위로를 필요로 하기에 인간이 위로를 줄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이 위로를 주지 못하면 실망하고, 위로를 주지 않으면 섭섭하거나 더 나아가 밉거나 화가 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리석지 않으려면 이럴 때라도 위로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옆이 아니라 위로 방향을 바꾸고 차제에 위로받는 방식도 바꿔야 합니다.
그러니까 안식을 달라고 말만 하지 말고 들려주시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때 당신이 옆에 있으니 두려워말고 안심하라고도 하시지만 어떤 때는 오늘처럼 안식 법 그러니까 안식을 얻는 법을 알려주시기도 합니다.
고기를 주지 않고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스승처럼 주님은 안식을 주지 않고 안식을 얻는 법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고생을 없애주시지 않고 고생 중에도 안식을 얻는 법을 알려주시고, 짐을 덜어주시지 않고 짐을 편하고 가볍게 지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멍에 곧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의 멍에입니다. 그것으로 짐을 지면 그리 고생스럽지도 않고 그리 무겁지도 않다는데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믿고서 그 멍에로 짐을 져 보시겠습니까?
제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서 어제 강론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수녀원 컴퓨터로 강론을 올렸는데 컴퓨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당분간 강론 못 올릴 수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심장으로 산다.
‘금쪽같은 내새끼 104회’에서 아빠 눈치를 너무나도 많이 보는 초2 금쪽이가 나왔습니다. 금쪽이는 사고뭉치입니다. 그래서 아빠에게 맨날 따끔한 훈육을 받습니다. 아이도 자기가 왜 그러는지 모릅니다. 길을 가다 쓰레기통을 짓밟고 화단의 꽃들을 뽑아 엉망으로 만들어놓습니다. 그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면 그게 다 문제 행동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는 게 너무 버겁습니다.
문제는 아빠에게 있었습니다. 아빠는 13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그전에도 아빠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책을 보고 자신은 좋은 아빠가 되려고 합니다. 훈육에 너무 철저합니다. 하지만 아빠는 아이에게 줄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 아버지에게 마음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빠가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닌 잔소리가 됩니다.
아이는 아빠의 훈육 때문에 아빠가 무섭습니다. 무서운 대상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를 사회에 적응시키려면 따듯한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타인의 아픔을 읽고 대인관계를 잘해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 금쪽이는 인형 외에는 친구가 없습니다. 이웃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아빠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만 줄 수 있습니다. 가지려면 받아야 합니다.
아이는 아빠의 따듯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빠가 먼저 따듯한 마음을 가진 이를 사랑해야 하고 자녀가 자신을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들이 아빠 심장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한 마을에 이웃한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넓은 초원에 많은 염소를 키우고 있었고 그 옆집에는 사냥꾼이 살았는데 아주 사나운 개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 사냥개는 종종 집 울타리를 넘어 염소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걸 본 염소 주인은 사냥꾼에게 개들을 우리에 가둬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지만, 사냥꾼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오히려 속으로 화를 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우리 집 마당에서 개를 키우는데 무슨 상관이야?’
며칠 후 사냥꾼의 개는 또 농장의 울타리를 뛰었고, 염소 몇 마리를 물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염소 주인은 더는 참지 못하고 마을의 치안 판사에게 달려갔습니다.
염소 주인의 사연을 들은 판사는 “사냥꾼을 처벌할 수도 있고, 또 사냥꾼에게 개를 가두도록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판사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친구를 잃고 적을 한 명 얻게 될 겁니다. 적과 이웃이 되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친구와 이웃이 되고 싶으신가요?”
염소 주인은 “당연히 친구와 이웃이 되고 싶죠”라고 답했습니다.
판사는 “잘됐군요. 한 가지 방법을 알려드릴 테니 그렇게 해보시죠. 그럼 당신의 염소도 안전하고 좋은 이웃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제안했습니다.
판사에게 방법을 전해 들은 염소 주인은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웃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장 사랑스러운 새끼 염소 세 마리를 골라 이웃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웃의 어린 세 아들에게 염소를 선물했습니다. 사냥꾼의 세 아들은 염소를 보자마자 푹 빠졌죠. 집으로 돌아오면 매일 염소들과 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들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사냥꾼의 마음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마당의 개가 염소를 물어서 해치지 않을까 걱정이 된 사냥꾼은 개를 큰 우리에 가뒀습니다. 염소 주인도 그제야 안심했습니다. 사냥꾼은 염소 주인의 친절함에 보답하려고 사냥한 것들을 그와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염소 주인은 사냥꾼에게 염소 우유와 치즈를 보답으로 주었고요. 그 후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이웃이자 친구로 지냈습니다.
상대가 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닮게 하고 싶거든 나를 사랑하게 만드십시오. 나를 사랑하게 되면 나의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사랑은 서로의 심장을 교환하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 마음으로 당신과 세상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그분께 드리고 그분 마음을 받읍시다. 그러려면 오늘도 조금 더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것을 위해 당신은 당신 심장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내어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Just Do It.
1960~70년대 스포츠화 시장의 독보적인 회사는 ‘아디다스’였습니다. 워낙 독보적이어서 다른 브랜드는 감히 경쟁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아디다스가 독점하고 있는 시장에서 몇몇 젊은이가 운동화 회사를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자본도 부족하고 경험도 없기에, 주위에서는 부정적 평가가 가득했습니다. 창업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폐업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모여서 판도를 바꿀 전략을 모색했습니다. 여러 방안이 제시되었지만, 그 어떤 것도 판도를 바꾸기에는 부족한 방안이었습니다. 한참을 회의하다가 이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떠들든 간에 상관하지 말자고. 그냥 하자!”
“그냥 하자!”는 말에 젊은이들은 힘을 얻었고, 이를 회사의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Just Do It.”
맞습니다. ‘나이키’ 회사입니다. 나이키는 창업 후 10년도 채 되지 않아 아디다스를 앞질러 전 세계 최대 스포츠용품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찾는 것보다, 그냥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보다, 그냥 해야 희망도 보입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지루해서…. 등의 이유를 찾다 보면 주님의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일이 너무나 커다랗고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는 주님의 큰 은총을 받을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라서 그냥 해야 합니다. “Just Do It.”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는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하여 마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 ‘멍에’라는 표현을 ‘하느님의 법’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은 하느님의 법이 무겁다거나 사람을 짓누른다고 여긴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기 위한 세부 조항이 613개나 있었음에도 이를 무겁고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고, 일상 안에서 지키기 어려워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절대로 무거운 짐이 아닌, 진정으로 편하고 가벼운 짐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믿음을 간직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인생의 짐을 흔쾌히 지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멍에를 매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이 세상 안에서 어려워 보일 수도 있지만,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가져오며 더 나아가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그냥 해야 합니다.
“Just Do It.”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의 가치를 직접 드러내는 것은 재산도 지위도 아니고 그의 인격이다.
- 드니 아미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 29)
오직 주님뿐이시다. 고집센 우리를 끌고갈 수 있는 것은 다름아닌 주님의 멍에뿐이다. 우리를 살리는 멍에이다. 주님의 멍에는 우리 삶의 방향이 주님께 있음을 너무도 잘 가르쳐 주신다. 주님을 찾지 못한 수 많은 감정들이 멍에를 통해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
멍에를 메어야 회개를 배우고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멍에를 주신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한 참된 사랑이었다. 삶의 방향을 멍에를 통해 잡을 시간이다. 주님의 멍에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닌 우리를 매순간 품어주고 있음을 배운다. 멍에를 메어야 순종을 배우고 사랑의 질서를 배울 수 있다.
멍에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주님을 잊고 산 마음이 더 무겁다. 멍에의 출발점에서 다시 우리의 본성을 만나고 사랑의 참된 의미가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는 것임을 깨닫는다.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멍에이다. 주님께로 가는 아름다운 사람은 주님의 멍에를 지고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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