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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7월 17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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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6주일 -

 

 

2022년 7월 17일 연중 제16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환대를 받으시고, 이듬해 그의 부인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드러났는데, 그 신비는 그리스도이시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보시고,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7월 17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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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루카 10장 38-42절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6주일
안영배 사도 요한 신부 강론

 

 

2022년 7월 17일 (일)
안영배 사도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6주일
김주신 멜키올 신부 강론

 

 

2022년 7월 17일 (일)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마음의 과녁과 균형잡힌 삶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특별한 묵상 거리를 소개합니다.

첫째, 마음의 과녁은 언제나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를 묘사하는 단어는 “듣고 있었다”입니다. 스승의 말을 듣는 제자처럼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반면 마르타를 묘사하는 단어는 “분주하였다”입니다. 

‘사방에서 마음을 끌어당김’을 뜻합니다. 예수님 앞에 머물러 있더라도 주변에 마음을 빼앗기면 분주할 수 있고, 반대로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들을 수 있습니다. 

머무름과 분주함을 가르는 것은 태도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아이를 돌보고, 일하고 사랑하며,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그 일들 안에서 예수님이라는 과녁을 잃지 않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둘째, 균형 잡힌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행동이 배제된 들음은 허공에 떠다니는 구름을 좇기 쉽고, 반대로 들음이 없는 행동은 자신을 드러내는 수준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듣는 삶, 마르타와 같이 봉사하는 삶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말씀 안에 머물 줄 알아야 하고, 말씀 안에 머물 줄 아는 사람은 봉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활동의 진정성을 가지게 해 줍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그리고 예수님께서 함께하셨던 그 공간이 오늘 우리 마음과 삶 안에서 체험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리아와 마르타를 합친 사람

 

우리의 사랑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이 하나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뭔가 하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이고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 두 가지를 얘기하는데 먼저 주님을 위해 뭔가 하는 것 곧 Doing 차원의 사랑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주님을 위해 뭔가를 하는 두 사람 곧 주님께 시중을 드는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런데 똑같이 시중드는 일을 하는데 아브라함은 복음 받는 데 비해 오늘 복음의 마르타는 꾸중을 듣습니다. 꾸중이 아니라면 적어도 칭찬이나 복을 받지는 못하는 모양새입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기껏 주님을 위해 애를 썼는데 칭찬은커녕 꾸지람이라니! 

그러면 마르타는 왜 기껏 시중들고도 지청구를 듣는 억울한 일을 당합니까? 아브라함과 비교하여 시중드는 일에 있어서 무슨 잘못을 한 것입니까? 

아브라함처럼 순전히 사랑으로 시중들면 그 시중이 사랑이 되고 복이 될 텐데 주님께는 불평했고 마리아에게는 시샘했기 때문에 순수한 사랑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마르타가 좀 더 현명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했으면 좋았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시중들면서 사라와 같이 시중들었습니다. 곧 사라를 초대하여 같이 시중들고 그래서 같이 복을 받았습니다. 

마르타도 너무 바빴다면 조용히 마리아에게 가서 지금 너무 바쁘니 너도 좀 같이 시중드는 일을 하자고 초대했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 가서 마리아보고 자기 일을 돕게 하라고 불평을 한 것입니까? 

자기의 고생을 주님께서 인정해달라는 것이고, 마리아의 저 철없음을 질책해달라는 거였지요. 주님께는 인정받고 마리아하고는 비교를 했던 것입니다. 

마르타도 주님을 사랑하여 시중드는 일을 한 것이 분명하지만 인정받고 싶은 것과 마리아와 비교한 것이 그 사랑의 불순물이었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한 거라고 오히려 나무라신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한 거라고 하신 것을 마리아만 좋은 몫을 택한 것이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르타도 순수한 사랑으로 시중들었으면 그것도 좋은 몫이었을 겁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랑 곧 Being 차원의 사랑에 대해서도 보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일도 해야 하지만,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일하느라 주님을 놓치거나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랑에 소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반대의 잘못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곧 주님과 함께 있으려고만 하고 주님을 위한 일은 하지 않으려는 것 말입니다. 이것도 사랑이 아닐 것이고 이럴 때 주님께서도 마냥 칭찬만 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것은 게으른 사랑일 뿐이고 영적 이기주의일 뿐입니다. 요즘 봉사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몸으로 하는 하느님의 일은 하지 않고 영성 강의 들으러는 열심히 갑니다. 이웃 사랑은 돈으로 곧 후원금으로 때우고 기도회에는 열심입니다. 그런데 영성 강의 듣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지요. 하느님 사랑 까닭에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게으른 것이 문제지요. 

저희 식당에 봉사오는 분 중에 이런 면에서 정말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일이 있는데도 월차 휴가를 내서 오는 분이 있고, 새벽 일 마치고 피곤할 텐데도 와서는 묵묵히 일하고 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런 분들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합친 분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마르타와 마리아를 합친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상대의 마음을 읽는 방법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서 아무 일도 안 합니다. 이에 열이 받은 마르타는 예수님께 이렇게 고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타를 부드럽게 꾸짖으시고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마르타가 아닌 마리아를 칭찬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마르타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예수님께 봉사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말씀을 드리려고 왔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듣지 않아서 잘 나가다 망하는 사람, 기업, 나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이폰을 비롯한 카메라 내장형 휴대전화가 세상에 나오면서 필름 업체들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코닥은 망했고 글로벌 2위 업체였던 후지필름은 살아남았습니다. 이들의 성패를 가른 것은 바로 혁신이었습니다. 혁신은 고객의 마음을 듣는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코닥은 최초의 디지털카메라 초기 모델을 발명한 회사입니다. 그러나 필름이 필요 없는 카메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디지털카메라의 상용화에 미온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구매자들은 이미 필름은 원치 않고 종이로 인화되는 사진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 마음을 읽을 수 없어서 코닥은 망했습니다. 

하지만 후지필름은 달랐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기술을 이용해 구매자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화장품, 건강관리, 반도체 소재 등 신사업에 진출하며 혁신을 거듭했습니다. 혁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생각만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에게는 들어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감정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마르타는 나의 감정을 강요하려 하였습니다. 내가 상대의 감정을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내 감정이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렇게 해 주면 행복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대의 감정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평안해집니다. 

하와가 하느님의 마음을 읽지 못한 이유는 뱀의 유혹 때문입니다. 뱀이 하느님께 불만을 품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바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불만을 느끼면 상대의 마음에는 귀를 막는 사람이 됩니다. 감사해야 들을 귀가 열립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자기 아이들에게 새엄마가 낳은 아이들의 육아를 강요하는 아빠가 나왔습니다. 이전 혼인에서 낳은 삼 남매는 아버지의 육아 강요에 매우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호강에 겨워가지고 이것들이!”라고 하며 화를 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된 데에는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어 매우 가난하게 커야 했습니다. 물이 새는 집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자야 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집에 살게 해 줄 아버지가 너무 그리웠습니다. 자기는 그런 아버지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돈만 벌어주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집에 살게 해 주었는데 자녀들이 동생들을 돌보려 하지 않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이 좋은 점은 코끼리 인형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코끼리 인형에게 말을 하도록 합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말들도 다 털어놓습니다. 왜냐하면 코끼리는 자기들에게 원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코끼리에게 털어놓는 말들을 들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돈만 바라다가 자녀 모두를 잃을 것 같다는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독립시켜주고 육아는 아빠가 책임지기로 합니다. 자녀들은 너무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빠를 위해 이벤트까지 해 줍니다. 다시 가족이 화목해 진 것입니다. 

소통의 핵심은 상대의 마음을 읽어주는 마음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상대에 대한 고마운 감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고마워야 내 감정이 우선되지 않고 상대의 감정을 먼저 들어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줄 수 있고 관계가 회복됩니다. 

교회는 이런 것에 매우 서툴렀습니다. 마르타와 같았습니다. 2천 년 가까이 라틴어로 신자들이 미사를 하게 했습니다. 신자들의 마음을 읽어줄 준비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사제로 신자들에게 해 주며 그것으로 충분히 준다고 여겼습니다. 마르타처럼 불만을 품고 신자들을 대한 것입니다. 

교회가 쇄신되려면 성직자들이 신자들에게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자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마르타처럼 다가가는지, 마리아처럼 다가가는지 생각해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경청하는 사람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잘 지내시죠? 어떻게 지내세요?” 등의 말로 묻곤 합니다. 이 물음에 “너무 잘 지내고 있죠. 아주 좋아요.”라고 답하시는 분도 있지만, 이렇게 대답하시는 분도 참 많습니다. 
 
“요즘 너무 힘들어요. 마지못해 살고 있어요. 그저 그래요….” 
 
이 둘의 표정을 비교하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다며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이는 사람 대부분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감사의 효과는 실험을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 그룹은 감사한 일을 기록하고 다른 그룹은 골치 아프고 힘든 일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3주 뒤, 감사한 일을 기록했던 사람이 힘든 일을 기록한 사람보다 의욕이 충만하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잠도 깊이 자는 것입니다. 또 감사한 일을 기록한 사람이 이웃을 향한 사랑 실천에서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결국 감사하는 사람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감사할 일이 없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감사할 일을 찾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자기를 더 안 좋은 쪽으로 이끌 뿐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십니다. 여기서 ‘모셔 들였다’라는 성경 구절은 그저 ‘손님을 대접한다’라는 정도의 뜻이 아니고, ‘주님을 모시고 모든 봉사를 한다’라는 신앙적인 뜻을 지닙니다. 즉, 마르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와 반대로 여동생 마리아는 명상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새기는 영성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시 여성의 지위는 높지 않았습니다. 특히 공식적인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고, 오로지 가사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미덕이었습니다. 탈무드에서도 여성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을 볼 때,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을 보고서 그 누구도 좋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마르타가 예수님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질투의 마음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시선을 염두에 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딱 한 가지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것들에 이것저것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경청하는 사람은 그만큼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기쁘고 행복하게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의 마음은 낙하산과 같아서 활짝 펼쳤을 때 제 기능을 발휘한다.

- 토머스 듀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루카 10, 42)

 

생명의 질서를 온 몸으로 체험하는 농민들의 삶이다. 땅과 농민은 분리될 수 없듯이 절박한 우리들 삶과 하느님은 나누어 질 수 없다. 분주함 속에서 분주함을 내려놓고 먼저 주님을 만나야 할 소중한 주일이다. 우리의 분주함이 주님께 의탁하는 맡겨드림의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분주함 속에 스며있는 염려와 걱정이다. 

우리의 삶 속에 숨어있는 염려와 걱정이다. 염려와 걱정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듣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제자리를 잡는다. 주님과의 만남이 가장 좋은 우리들의 몫이다.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삶의 자리로 오셨다. 함께하는 기쁨이다. 참된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다. 참된 사랑이란 굳어있는 우리의 분주함을 주님의 절박함으로 맡겨드리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좋은 몫이 필요하다. 가장 좋으신 주님께서는 분주한 일보다 먼저 당신을 만나길 간절히 바라신다. 빼앗을 수 없는 간절함의 관계이다. 간절함으로 자라나는 관계의 신비이다. 일과 마음을 주님께 봉헌한다. 먼저 해야 할 일이 마음을 나누는 것임을 이제야 깨닫는 주일 아침이다. 가장 좋은 몫을 되찾는 마음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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