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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7월 19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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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

 

 

2022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주님께,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사 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당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이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7월 19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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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2장 46-50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남창현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강론

 

 

2022년 7월 19일 (화)
남창현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22년 7월 19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가족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오늘 복음은 ‘어머니’와 ‘형제’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반복되어 나오는데도 매우 차갑게 느껴집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대하셨던 분께서 가족들에게는 참으로 냉정히 대하십니다. 가족 관계를 부정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는 의도였을까요?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을 핑계로 가족을 뒷전으로 미루는 태도를 합리화하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새로운 가족을 초대하십니다. 따라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예수님의 반문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제자들을 첫 번째 가족으로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새로운 가족은 ‘혈연과 혼인’이 아닌 ‘아버지의 뜻’으로 모인 이들입니다.

교회 생활이 갈수록 개인주의화 되고 공동체 안에서 형제, 자매라는 말도 점차 듣기 어려워지니, 사목자들은 친목 단체를 통하여 관계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새로운 예수님의 가족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울러 피조물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고 이민자들을 환대하는 이들,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이가 예수님의 가족이요 우리의 가족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분노와 참을성과 사랑의 관계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오늘 미카서는 하느님께서 영원히 분노를 품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떤 뜻일까요? 하느님의 분노는 영원히 가지 않는다는 뜻일까요? 하느님께서는 분노하지 않으신다는 뜻일까요? 

구약의 하느님은 분노하시는 하느님으로 묘사되고, 분노하시기에 벌도 내리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분노 또는 화란 자기 뜻과 반대될 때 터져 나오는 감정이지요. 그러니 하느님의 분노는 하느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터져 나오는 것이겠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과 다른 짓을 인간이 할 때 분노하시고, 벌을 내리시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제가 하느님을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성전에서 상인들이 장사하는 것을 보고 진노하시고, 정화하셨잖습니까? 그러니 하느님도 당신 뜻을 거슬러 인간이 죄를 지을 때 분노하신다는 것은 맞는 말이고 또 그러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분노가 우리의 분노와 같은 거라고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정의롭지 않은 분노 곧 정의에 입각하지 않는 분노지만 하느님의 분노는 정의로운 분노이니 크게 다르지요. 

이 말을 뒤집으면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정의롭지만 우리 인간의 뜻은 정의롭지 않고 자기중심일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정의에 어긋나기에 화를 내기보다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를 내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오늘은 제가 하느님의 분노와 우리 인간의 분노가 다르다는 것을 다른 관점에서 또 얘기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있지만 하느님께 참을 수 없는 분노란 없습니다. 우리말에 참을성이 참 많다는 말이 있는데 말하자면 우리는 참을성이 없지만, 하느님은 참을성이 많다는 것이고 많은 정도가 아니라 무한대의 참을성을 가진 분이시라는 얘깁니다. 

그리고 이 말은 사랑의 통제안에 있지 않은 하느님 분노는 없다는 얘기이고, 아무리 당신 분노가 크셔도 당신 사랑보다 크지 않다는 얘기이며 그러므로 분노도 벌도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얘기입니다. 용서도 하느님 사랑의 표시이지만 분노와 벌도 하느님의 분노와 벌이라면 사랑의 표시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도 사랑이 분노보다 작으면 참을 수 없어 애를 때리지만 사랑이 분노보다 크면 분노를 참을 수 있고, 언제 어떻게 매를 대야 아이가 잘못을 고칠지 생각하고 매를 대지요. 

아무튼, 오늘 미카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분노하시더라도 영원히 분노를 품지 않으신다고 얘기하고 죄지은 인간을 가엾이 여기신다고 얘기하고, 죄를 모르는 체하기도 하신다고 얘기합니다. 

분노와 참을성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오늘이 되시길 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세상 누구에게도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가르침을 주실 때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머니께서 기분나쁘실 수도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중략)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48-50)

사실 어머니는 기분 나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만큼 아버지 뜻을 따르신 분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만이 우리가 세상 모든 것의 휘둘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끔은 부모님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자녀들이 부모가 반대하는데 결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찾아오곤 합니다. 저는 먼저 둘의 만남이 ‘하느님의 뜻’인지 찾으라고 합니다. 심지어 부모의 뜻도 하느님 뜻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님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진리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면 부모님이 반대하더라도 결혼하라고 합니다. 

저도 신학교 들어오는 것을 부모님과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반대하셨지만 저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우선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은 나를 부모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심리적으로 지배하려 한다면 먼저 나에게 고마움을 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가장 고마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외롭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를 때 항상 나를 이끌어준 것이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기 연민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빠지면 자아의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청년 버핏’으로 불렸던 박철상 씨가 있습니다. 그는 대학생 때 주식으로 400억을 벌었다며 20억 가까이 기부하여 TV에도 출연하는 등 유명세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수십억 원대의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처음 주식으로 몇억을 벌어서 자선활동을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명해졌는데 주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돈을 꾸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걸려든 사람들도 자신이 이 사람의 좋은 이미지에 참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믿어서 가족의 모든 돈을 끌어모아 13억 9천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고마워하면 그 사람에게 가스라이팅 당합니다. 자아에게 고마워해도 결국엔 지배당합니다. 내가 감사하는 대상에게 지배 당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뜻에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길러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현재를 즐길 수 있습니다. 

미국 테니스 선수 ‘잭 삭’은 호프만컵 테니스 대회에서 호주의 레이튼 휴이트 선수와 국가별 경기하고 있었습니다. 미국과 호주의 경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호주 선수의 서브가 아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잭 삭은 비디오 판독을 신청했습니다. 서브를 한 사람은 하지 않고 넘어가는데 오히려 아웃 된 것을 기뻐해야 하는 사람이 비디오 판독을 신청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미국의 모든 기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비디오 판독을 해보니 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승리보다는 페어플레이에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중압감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족의 모든 애정의 중압감으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 뜻에 가스라이팅 당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에는 지배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피조물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다는 창조자의 뜻에 지배당하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피조물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셨습니다. 

참 자유는 진리에 있습니다. 하느님 뜻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뜻에 지배당하려면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가스라이팅의 힘은 감사에서 옵니다. 감사하는 것이 지배당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부모에게 감사하고 싶다면 하느님께서 그런 부모를 주셨음에 감사합시다. 그러면 부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효도도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인데 하느님의 뜻이 진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다 보면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신부가 되고 나서 새벽 운동으로 ‘수영’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당 근처에 수영장이 있어서 걸어서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수영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워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수영장에 등록하지 못했습니다. 수영을 배우지 못할 이유가 너무나도 많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새벽 미사 끝나고 가야 하는 데 피곤할 것이라는 생각, 수영 못 한다고 수영 강사에게 핀잔 들을 것 같다는 생각, 혹시 성당 교우분을 만나서 서로 민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서른 넘어서 배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 등등…. 고개를 저으며 수영 배우기를 포기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해에 등록했습니다. 또 걱정이 밀려들었지만, 그냥 먼저 등록했습니다. 그리고 걱정의 생각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수영을 통해 정신이 번쩍 들어서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었고, 수영 강사는 제게 잘한다며 칭찬만 해주었습니다. 성당 교우들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수경과 수영 모자를 쓴 상태에서는 누구도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또 할아버지, 할머니도 너무 많았습니다. 제가 제일 젊었습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다 보면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어도 해보는 용기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이런 사람만이 불가능은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바쁘다는 이유가 제일 많지만, 그에 못지않은 이유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도 많이 짓고, 기도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열심히 할 자신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과연 자격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가족이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그들을 먼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시는 바쁜 와중에서도 이 소식을 전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어머니와 형제들이 서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을 위한 일 외에는 어떤 것도 중요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족이라서 저절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만, 특별한 자격을 받은 이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가능의 이유를 찾으며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그 주인공이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가짐과 돈을 대하는 자세다.

- 이즈미 마사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마태 12, 49)

 

마음을 낮추어야 함께 사는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어머니와 형제는 마음의 영역이며 실천의 영역이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기에 우리자신이 있을 수 있다. 생활 속의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다. 

모든 만남이 이와같이 은총이다. 믿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하느님 중심적인 관계가 참으로 건강한 관계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건강하지 않는 관계를 올바른 실천을 통하여 새롭게 하는 것이다. 

혈연중심의 가족공동체는 서로를 가슴으로 보듬어 주는 수도공동체로 이어지듯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공동체는 우리들 관계처럼 편협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소외된 이들과 함께 지내셨다. 

나눔의 실천 사랑의 봉사가 우리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게한다. 제자들의 어머니 성모님과 인도 캘거타의 마더 데레사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실천은 모든 구분과 모든 경계를 뛰어넘으며 우리모두를 주님의 형제가 되게한다. 

주님의 어머니 주님의 형제가 되는 길은 진심을 다하여 주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실천이 없는 가족 실천이 없는 관계는 죽어있는 삶같이 차고 차다. 실천을 향해 뜻을 향해 열려있어야 할 오늘이다. 

같이 할 수 있는 실천이 우리에게 가장 큰 은총이다. 실천의 부활이 어머니와 형제 공동체의 참된 부활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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