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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7월 21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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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

 

 

2022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저버리고,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7월 21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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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3장 10-17절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남창현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강론

 

 

2022년 7월 21일 (목)
남창현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7월 21일 (목)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쇠귀에 경 읽기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와 “저 사람들”이 대조적인 상황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너희’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듣고 깨달으며 하느님 나라를 보고 이를 알아보는 이들이지만, ‘저 사람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인용된 이사야서의 말씀에 따르면, 이는 마음이 무디고 귀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입니다(6,9-10 참조).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은 그저 ‘쇠귀에 경 읽기’일 따름입니다. ‘선택적 집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듣고 싶은 것만 들리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죄로 양심이 무디어지고, 자신의 실속과 세상 것에만 눈과 귀를 발달시키면 영적인 눈과 귀는 점차 제 기능을 잃어 갑니다. 그런 “저 사람들”과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보고 들을 수 있는 제자들의 눈과 귀를 두고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영적 감각이 살아 있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가 경기에 참여하지 않을 때에도 신체 감각을 유지하고자 훈련을 하듯 그리스도인은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훈련, 공동체와 세상을 위하여 좋은 일을 찾는 훈련,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키우는 훈련으로 영적인 감각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눈과 귀를 축복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기에게 행하는 악행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악행이 남에게 하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는데 오늘 예레미야서는 자기에게 하는 악행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이스라엘이 하고 있는 짓이 자해행위, 자살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짓이? 

하나는 생수의 원천인 하느님을 저버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해 물이 고이지 않는 저수 동굴을 판 것입니다. 

그런데 따져 보면 저수 동굴을 판 것이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기껏 저수 동굴을 파놓고는 생수의 원천을 저버린 것이 근본 문제이고 저수 동굴이라고 팠는데 그 동굴에 물이 고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저수 동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물을 받을 수 있고 저장할 수 있으며 그것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저수 동굴이 없는 것은 쪽박도 없이 음식을 달라는 것이고, 동냥은 주지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쪽박이 있어야 얻어먹을 수도 있는데 그 쪽박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근본적인 악은 생수의 원천인 하느님을 저버린 것이라고 예레미야는 얘기합니다. 

물줄기가 끊기면 저수 동굴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는 마치 물을 못 댄 논과 같습니다. 

저는 지금도 물 댄 논을 보면 마음이 충만합니다. 어렸을 때 저희 논에 물대기 위해 새벽같이 물 대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수리 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던 때 자기 논에 물 대는 것은 전쟁이었고 그래서 아전인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기 논에 물 대는 건 중요한 문제였지요. 

저희 집은 남자 어른이 없어서 항상 물 대는 순서에서 밀렸고, 제가 초저녁잠이 많아 한두 시에 일어나 논에 물을 대곤 했는데 그때 저희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면 행복이 들어오는 것 같았지요. 

이렇듯이 물을 대는 것이 중요한데 물줄기를 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살 행위 또는 자해 행위지요. 

그런데 저수 동굴을 만든 사람이 기껏 만들어 놓고 왜 물줄기를 끊겠습니까? 그럴 리 없고 물을 댄다고 댔는데 그것이 생수의 원천인 하느님이 아니라 원천이 아닌 그래서 곧 말라버릴 다른 물줄기서 물을 대려고 했던 거겠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의 주님은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 와서 마셔라.” 다른 곳이 아닌 당신에게 와서 마시라고 하시고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서의 주님도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고 당신께로 초대하시며 그러나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며 다른 데서 물을 찾는 사람을 나무라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생수의 원천인 하느님을 저버린 이스라엘의 악행을 말씀하신 주님께서 다른 악행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물이 새는 악행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물을 대지 않는 것도 악행이지만 기껏 댄 물을 간수하지 못하는 것도 악행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다시 물 댄 논 얘기를 하면 기껏 논에 물을 댔는데 웅어가 논두렁에 구멍을 내 물이 다 빠지게 내버려두는 것과 같습니다. 은총의 낭비랄까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내버려두는 악행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고마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고, 자신을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진정 사랑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 그런 악행.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또 다른 심판의 기준 : 비유가 이해되는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비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곧 ‘심판’과 직결됨을 말씀하십니다. 심판의 기준은 사랑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도 하나의 비유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좀비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좀비는 아버지와 딸처럼 보입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놀이기구를 태워줍니다. 딸이 놀이기구에서 떨어져 손뼈가 부러지자 아버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모습은 영락없는 좀비이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 좀비를 향해 총을 쏩니다. 아버지 좀비는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그러자 딸 좀비가 쓰러진 아버지 좀비 앞에 서서 아버지를 보호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비유입니다. 여러분이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라면 딸도 쏠 수 있습니까? 만약 쏠 수 있다면 여러분이 좀비입니다. 좀비는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타인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는 모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비록 좀비처럼 보이지만 아빠와 딸은 상대의 고통을 느낍니다. 대신 고통을 감내하려 합니다. 그런데도 딸까지 쏜다면 내가 사랑이 없는 좀비임이 드러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도 사랑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무시한다면 내가 좀비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말씀은 살려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라고 하신 어머니의 말씀도 비유입니다. 이 비유 말씀을 이해할 때 나도 어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가정을 꾸릴 수준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진짜 어머니를 찾기 위해 다리 밑을 찾아다닌다면 나는 영원히 그 가정의 일원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성경 말씀과 비유를 이해하지 못할까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사랑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형과 싸우는 금쪽이를 아빠가 말릴 때 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치고받고 싸우게 놔두지, 그랬어!”

금쪽이는 분노로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소리 지릅니다. 

“날 죽이려는 거잖아. 난 아들이 아니라는 거잖아. 말이 충격적인 게 아니라 뜻이 충격적인 거잖아.”

엄마는 황상해서 말합니다. 

“야, 내가 너 죽이라고 했어?!”

도대체 금쪽이는 왜 엄마 말을 비유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걸까요? 엄마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금쪽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 심한 학대를 당하였는데 그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금쪽이는 30cm 자로 폭력을 당했고 어두운 작은 공간에 자주 감금당했었다고 합니다. 물론 금쪽이 형이 말해준 것이라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황상 학교에서는 착한 아이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싸우면 말려야지, 왜 보호해주지 않아? 그때도 그랬잖아? 난 자식 아니야?”

그러나 부모도 금쪽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도 난리를 치니까 미운 마음이 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를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해줍니다. 아이는 그제야 부모가 자신을 보호해주는 사람임을 느끼고 진짜 싸우다 죽으라고 한 말이 아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랑은 이해하게 합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와서 성체를 영했을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성경의 비유가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섬겼던 ‘금송아지’처럼 제가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당신 위해 다 포기하고 들어왔으니 당신도 나를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고 불만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물 줄 테니 밭 갈라는 식으로 하느님을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는 성경을 상징으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들을 귀가 생겼다는 증거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사랑합니까? 비유가 이해됩니까? 아니면 곧이곧대로 문자대로만 해석합니까?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영적으로 해석이 되면 성경이 비유로 보입니다. 상징으로 보입니다. 상징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나에게 말씀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죽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비유가 이해됩니다. 

저는 하.사.시.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많이 높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을 더 사랑합시다. 그러면 성경의 비유가 이해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내 이웃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 있을까요?

 

친구들과 등산을 갔던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처음 가는 등산이었기에 큰 기대가 있었지만, 산 정상까지의 등산은 그에게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힘들다는 생각이 계속되면서 정상에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입니다. 다리도 풀려서 더는 앞으로 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또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함께하는 친구에게 커다란 피해를 줄 것이 분명했습니다. 
 
친구들에게 “먼저 가! 나는 틀렸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 떼어 놓고 가면 우리 마음이 좋겠니? 그리고 이 정도까지 왔으면 정상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어. 지금까지도 잘했잖아. 그러니 잠깐 쉬었다가 다시 힘내서 올라가자.”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준 친구들 덕분에 생애 첫 등산에 성공했습니다. 이런 친구와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일까요? 솔직히 긍정적으로 나를 끌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기 삶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나를 주저앉게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자기의 모습을 되돌아보십시오. 나는 내 이웃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을까요?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포기하고 좌절하게 했던 것은 아닐까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 곁에는 역시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내 주위를 바꾸고, 결국 나를 변화시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늘 긍정적인 방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포기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늘 희망을 간직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몇몇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어렵고 복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어떤 이도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다녀온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더 알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면서 율법의 조항들을 더 복잡하게 만들면서, 하느님 나라에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일상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소재를 따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일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깨달을 수 있는 단순하고 긍정적인 마음이 필요합니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 또 하느님 나라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절대로 어렵고 복잡한 곳이 아닙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하루하루를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같이 살아라. 언젠가는 그날들 가운데 진짜 마지막 날이 있을 테니까.

- 레오 부스칼리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마태 13, 11)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신비의 삶이다. 신비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우리의 삶은 헛되지 않다. 신비를 구하고 신비를 허락하시는 신비의 여정을 우리는 걸어간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봉헌한다. 

아픔도 신비이다. 삶은 신비이며 신비는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볼 수 없고 감사하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다. 사랑을 건너뛸 수 없듯이 가장 좋은 신비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사랑으로 도와주시고 사랑으로 허락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하느님의 허락없이는 알 수 없는 우리들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한 번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으시다. 

다시 마음을 열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삶은 사랑의 신비이다. 사랑의 신비 속에서도 사랑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방향을 틀어 하느님께로 향하는 회개를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날이다.

 거부할 수 없는 신비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신비의 원천이 사랑의 힘임을 회개로 믿는 하느님 자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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