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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
2022년 7월 20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태중에서 성별하시어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씨는 길에 떨어져 새들에게 먹히고, 돌밭에 떨어져 말라 버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숨이 막히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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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3장 1-9절
열매는
백 배가 되었다.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김동주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7월 20일 (수)
김동주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7월 20일 (수)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마태오 복음 13장에서는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소개합니다. 이는 ‘예수님 삶의 신비’고,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의 신비’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 선포와 깊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농부들은 밭을 갈기 전에 씨를 뿌렸기에 씨앗이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 또는 좋은 땅에 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이 어디든지 뿌려질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을 선별해서 말씀을 뿌리지 않으시기에 말씀이 떨어지는 곳은 준비가 안 된 곳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때문에 혜택을 본 사람들은 아닐까요?
예수님 말씀이라는 씨앗이 좋은 마음에 뿌려질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 씨앗을 뿌리신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열매로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 실망스러울 때도 있고, 우리 각자 안에도 열매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는 실망하지 않으시고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에 대한 희망으로 씨를 뿌리십니다. 그 열매는 씨 뿌리는 과정의 수고와 손해를 모두 보상하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이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자기는 예언자 되기에 부당하다고 얘기하며 발을 뺍니다.
먼저 읽은 이사야서의 이사야 예언자는 자기는 입이 더러워서 예언자 되기에 부당하다고 하고, 아모스 예언자는 자기는 양치기에 농사꾼일 뿐이고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아들도 아니"라며 사양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언자가 아님은 당연하고 그렇게 말함이 마땅합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뽑으시긴 전까지는 그들뿐 아니라 그 누구도 예언자가 아니니 그렇게 얘기함이 당연하고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뽑힌 다음에는 아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예레미야에게 하느님께서는 아이라고 하지 말라 하시고 우리에게도 하느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하실 겁니다.
그런데 아이가 아니라는 말씀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고작 아이가 아니니 어른스러워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 직무에 선출될 때 자주 할 줄 모른다고 핑계 대며 자기가 회장이나 봉사자나 평의원에 선출된 것을 거부합니다. 오늘 예레미야가 아이라서 할 줄 모른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도 처음 청원장과 원장을 동시에 하라는 관구장님 말씀을 들었을 때 서른을 갓 넘었고 제가 가르칠 청원자 중에는 저보다 더 나이 먹은 형제들이 있어서 상당히 고민이 되어 수락을 한 달이나 망설였는데 그때 선배 형제 한 분이 직책을 주시는 하느님이 능력도 주실 거라고 충고하시는 것이었고 그 믿음 때문에 저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아이가 아니고 하느님의 뜻이면 무엇이든 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그리고 이 말씀은 당신에게 어리광 부리지 말라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께는 어리광 부리더라도 당신 대신 사람들에게 갈 때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그들 앞에 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과 신원 의식이 있어야 하고, 그럴 때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대로 두려움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관건은 믿음입니다. 사람들의 선출로 교회의 직무를 맡게 되었을 때 그것이 사람의 선출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출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한탄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우리에게 그런 믿음은 없는 것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코로나가 무서워 성당에 못 나오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 백성 맞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농부는 씨를 길과 자갈밭, 가시밭에 뿌리고 좋은 땅에도 뿌립니다. 당연히 좋은 땅에서만 30배, 60배, 100배의 소출을 거둡니다. 길은 교만을, 자갈밭은 육욕을, 가시밭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뜻합니다. 이것이 있는 땅에서는 말씀이 죽습니다.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잃습니다. 삼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비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산도 돈이요, 물도 돈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세속에 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져서 사회성이 떨어집니다. 대신 공부를 잘하고 모든 것의 이면을 바라볼 눈을 지녔습니다. 사건을 맡아서 해결할 때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런데 우영우가 가장 잘 먹는 음식이 아버지가 만들어주는 김밥이라는 독특한 설정도 나옵니다. 저는 이것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나보다 위의 세상에 사는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은 다 비유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약 제가 끝까지 교만하였다면 어머니를 믿지 못하였을 것이고 지금도 다리 밑에서 진짜 엄마를 찾아다닐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야 그 다리가 어머니 다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의심될 때는 어머니가 주시는 음식은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비유를 이해하여 어머니가 참 어머니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어머니가 주시는 음식 안에 어머니의 살과 피가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라면 하나를 끓여주더라도 반찬 투정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생명의 빵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것들이 하나의 상징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영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례나 성체성사와 같은 교회의 성사가 하느님의 살과 피로 이루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체를 영하면서도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냉장고를 부탁해’란 프로에 보면 어머니가 해주셨던 음식을 재현한 셰프의 요리를 먹으며 눈물을 흘리는 출연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어머니가 해 주셨던 음식과 똑같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것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다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해하게 되는 것이 ‘밥’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코로나 때문에 성체를 영하러 오지 않는 이전의 신자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저는 그들이 아직은 세속-육신-마귀에 사로잡혀서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들이라 여겨집니다. 만약 말씀의 열매를 맺었다면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를 원치는 않지만, 논리적으로 본다면 수십 년을 신앙생활하고도 코로나라는 작은 병균에 생명의 양식을 포기한다는 것은 교만하거나 육욕에 빠졌거나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빵의 가치를 몰라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마태 13,34)라고 합니다. 꿀을 먹어본 사람은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비유로밖에 꿀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의 수준을 배워갈수록 이 비유 말씀을 더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가 필요합니다. 들을 귀는 바로 ‘도움의 은총’입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묵상하여 말씀을 잉태하셨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셨다는 뜻은 성모님께서 세속-육신-마귀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웠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들을 귀가 생기고 그래야 천상의 비유가 이해되며 그래야 순종할 수 있고 그래야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들여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세속-육신-마귀의 욕구와도 싸워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칭찬하는 것부터 시작하기.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 활동하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봉사 활동의 기쁨으로 성당 가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즐거움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의 부탁은 자기를 부려 먹는 것만 같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간섭하고 판단하는 사람을 보면서 미움이 가득해졌습니다. 이제는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봉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제 아예 성당 가는 것도 싫어졌습니다.
어느 날, 성당 동생이 이 자매에게 “언니! 나 성당 나오기 싫어졌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밝은 분위기를 만들며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동생이었기에, 성당 나오기 싫다는 동생의 말에 깜짝 놀라서 “왜?”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나 잘한다고 칭찬을 안 해줘. 언니도 전에는 칭찬을 많이 해주더니, 요즘에는 전혀 안 하잖아.”
그때 자신이 왜 힘들었었는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동생처럼 ‘칭찬을 못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니, 먼저 칭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오늘 너무 예뻐 보여요.”라고 말하면, “당연하죠. 저 예쁘잖아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슨 말씀이에요? 자매님이 더 예쁘신데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곧바로 대답하지 않더라도 이른 시일 안에 칭찬한 사람을 향해 칭찬의 말을 건네줄 것입니다.
내가 칭찬하지 않으면 상대로부터 칭찬도 들을 수 없습니다. 칭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성당 나가는 것이 즐거워질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자신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도 퍼져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랑을 이기심과 욕심으로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받아야 나도 그만큼의 사랑을 베푼다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먼저 사랑의 말과 행동을 해야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것뿐 아니라 내 주위에도 많은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뜻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길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가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죽어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씨가 떨어진 곳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로지 사랑의 마음만이 주님의 말씀이 많은 열매를 이 세상에서 맺도록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하루하루를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같이 살아라. 언젠가는 그날들 가운데 진짜 마지막 날이 있을 테니까.
- 레오 부스칼리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마태 13, 3)
씨를 뿌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씨를 뿌리시는 주님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를 살게하여 주시는 주님이시다. 끝을 알 수 없는 주님의 마음이시다.
주님의 농사법은 우리를 향한 믿음과 희망이다. 씨앗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씨앗이며 주님의 열매이다. 주님의 자리에서 주님의 열매가 자라난다.
열매는 씨앗의 가장 큰 기쁨이다. 주님을 알게되는 우리 삶의 모든 여정이다. 주님을 맞이하는 모든 시간이 실은 열매라는 은총의 시간이다. 은총임을 잊고 살았다. 은총을 통해 우리가 가야할 길이 열매의 길임을 알게된다.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고있는지를 씨 뿌리시는 주님을 통하여 묻는다. 어제의 열매가 아니라 오늘의 열매이다. 사랑은 씨앗으로 시작되고 은총은 열매로 드러난다. 은총의 주님께서 은총의 씨를 뿌리신다. 주님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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