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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4주간 화요일 -
2022년 3월 29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는 것을 보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는 천사의 말을 듣습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던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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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에제 47장 1-9절, 12절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3
그 사람이 동쪽으로 나가는데, 그의 손에는 줄자가 들려 있었다. 그가 천 암마를 재고서는 나에게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발목까지 찼다.
4
그가 또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무릎까지 찼다. 그가 다시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허리까지 찼다.
5
그가 또 천 암마를 재었는데, 그곳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을 치기 전에는 건널 수 없었다.
6
그는 나에게 “사람의 아들아, 잘 보았느냐?” 하고서는, 나를 데리고 강가로 돌아갔다.
7
그가 나를 데리고 돌아갈 때에 보니, 강가 이쪽저쪽으로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화답송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 우리의 힘. 어려울 때마다 늘 도와주셨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네. 땅이 뒤흔들린다 해도, 산들이 바다 깊이 빠진다 해도.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이 동틀 녘에 구해 주시네.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와서 보아라, 주님의 업적을, 이 세상에 이루신 놀라운 일을!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복음
요한 5장 1-16절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인자하신 주님, 이 천상의 성사로 저희 마음을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 죽을 몸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종욱 바오로 신부 집전
2022년 3월 29일 (화)
김종욱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29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고통에서 구해 주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저마다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어제 복음(요한 4,43-54 참조)에 이어서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치유 자체가 아니라 치유 기적을 통하여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에 주목합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가 전하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특별히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 당신을 계시하시는 ‘표징’입니다(5,17 참조).
예수님께서는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아 온 병자를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눈으로 그 병자의 불쌍한 처지를 살펴보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병자는 예수님의 구체적 행위가 아니라 ‘말씀’으로 치유되었습니다(5,8-9 참조).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은 유다인들과 갈등을 겪는 원인이 되었고 이로써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의 적대감은 커져 갑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판한 까닭은 그분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5,10 참조). 율법에 따르면 누구도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는데(탈출 20,8-10 참조),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지시는 이 규정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종교적 관습에 사로잡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일하시며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지켜 주시는 분이시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아드님으로서 아버지 뜻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십니다(5,17 참조). 유다인들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소개하시는 예수님에게 신성 모독의 죄를 씌워 죽이려고 합니다(5,18 참조).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서른여덟 해 동안 앓던 병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긍정적 반응을 보여 준 카나의 왕실 관리의 모습(어제 복음 참조)과 차이를 보입니다.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 주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저마다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생명의 샘
오늘 주님께서는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는 환자, 그래서 벳자따 못에 몸을 씻어 치유받고 싶어하는 환자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그에게 물으나마나한 질문이고, 건강해지고 싶은 것은 그뿐 아니라 우리도 모두 바라는 바이지요.
많은 분이, 아니 모든 사람이 건강하기를 원할 겁니다. 병들어 오래 사느니 건강하게 일찍 죽는 것이 낫다고 하고, 오래 살고 싶지는 않지만 건강하게 살다가 죽고 싶다고 모두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쁜 욕심이나 세속적인 욕심이 아니기에 건강하게 살다가 죽는 것을 하느님도 바라실 것이고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건강하고 싶냐고 물으신 겁니다.
문제는 그 건강이 무엇이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건강이 육신의 건강만이라면 많이 아쉽습니다. 사실 육신만 건강하기도 어렵고, 육신만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은 오늘 주님께서 뜻하신 건강과 다릅니다.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건강에는 네 가지 차원이 있고, 이 네 가지 차원이 매우 유기적이어서 어느 하나가 건강하지 않으면 다른 건강에도 영향을 줍니다.
네 가지 차원이란 육신의 건강, 마음의 건강, 정신의 건강, 영혼의 건강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성 생활이란 바로 영혼이 건강한 생활입니다. 바른 영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의 영혼이 건강하고, 영이 건강하면 육신과 마음과 정신까지 모두 건강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성 생활을 추구하는 이유와 목적이 바로 이것이지요. 종합적이고 전존재적인 건강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근심 걱정이 있으면 몸이 천근만근이고,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니 우리가 건강하려면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신 건강입니다. 정신 이상이 되거나 썩어빠지 정신을 소유하면 우리 존재 전체가 파괴되고 삶 전체가 망가집니다.
그런데 심약하거나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영적인 문제까지 겹친다면 하느님과의 관계까지 단절이 되거나 악화되어 현세에서뿐 아니라 내세 구원까지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성 생활이란 건강한 영/정신을 지니도록 성령이나 프란치스칸 정신과 같은 것은 받아들이고 더러운 영이나 악령이나 세속적이고 썩어빠진 정신은 몰아내는 것이요, 그리하여 몸뿐 아니라 전존개가, 현세뿐 아니라 내세의 구원까지 살게하는 거지요.
오늘 독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모든 것을 살게하고 풍성하게 한다고 하고 복음에서 갖가지 병자들은 성전의 베짜타 못의 물이 병자를 낫게 한다고 믿는데 실은 주님에게서 생명의 물이 나옴을 오늘 복음과 전례는 얘기하고자 하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편 저자처럼 이렇게 주님을 찬미합시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의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36,10).
오늘의 말씀 묵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자비하신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언젠가 반드시 내 인생에 봄날이 찾아오리라.
한해 두해도 아니고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꼼짝못한 채 앓아누워있던 병자의 외침이 남의 말 같지 않습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복음 5장 7절)
저도 돌아보니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끝도 없이 길고 어둔 터널을 빨리 빠져나가 버려고, 그렇게 발버둥쳐도 스스로의 힘으로 안 되더군요. 깊고 축축한 수렁에서 벗어나보려고 기를 써봐도, 그럴수록 더 깊이 빠져들더군요. 빨리 나아보려고, 그래서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도 허사였습니다.
아무리 기를 써도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있더군요.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고,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며 모든 것 다 포기하고 내려놓는 순간, 위로부터 가느다란 희망의 빛이 내려왔습니다.
오늘 은혜롭게도 벳자타 못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38년 차 환자 역시 그랬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10년, 20년도 아니고 38년입니다. 당시 유다 사회 평균 수명입니다. 그는 거의 한평생을 병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냥 병도 아니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꼼짝달싹 못하는 중증의 병이었습니다. 그의 엄청난 인내심이 놀랍니다. 기대할 것이라고는 단1도 없는 상황에서도 끝끝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자신에게도 기회가 오겠지, 하는 간절한 기대를 안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 무한한 인내의 결실이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유심히 주변을 살펴볼 일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래서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인 우리들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오늘 은혜롭게도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은총을 입은 환자가 평생에 걸쳐 바친 기도는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언젠가 반드시 때가 오리라. 그때 나는 힘차게 일어서리라. 단 한 순간이라도 사람답게 살다가 죽으리라. 언젠가 반드시 내 인생에 봄날이 오리라!”
환자가 견뎌온 그 오랜 인고의 세월이 결국 오늘 결실을 맺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자비가 환우의 비참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질병이든 영혼의 질병이든, 우리 인간의 병은 여간해서 잘 낫지 않습니다. 천천히 주님께서 개입하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들과 더불어 주고받은 상처, 우리가 부모로부터 겪은 애정결핍,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끼고 사는 극도의 미성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순식간에 치유되지 않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면,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면,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아주 천천히 은총의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에겐 이 두 질문의 답을 찾기 전까지는 안식이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양 문 곁에 있는 벳자타 못에서 병의 치유를 바라며 38년이나 매일 그곳에 나와 앉아있는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선 요한에게 ‘양 문’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40’을 채워야 합니다. 숫자 ‘40’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이 완성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숫자입니다. 38년은 ‘은총과 진리’, 곧 ‘2’가 모자란 숫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를 충만히 지니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 은총과 진리가 어떻게 전해지는지 보여주십니다.
먼저 ‘벳자타’는 ‘올리브의 집’이라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은총은 보통 기름으로 상징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곧 ‘은총’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온 그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으로써 벳자타 연못의 병자는 완전히 그리스도의 양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은총과 진리를 받기 전에 38년이나 은총을 바라며 연못에 머물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벳자타 연못에 가끔 천사들이 내려오는데 그때면 물이 출렁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가는 한 사람만 치유를 받습니다. 하늘의 은혜를 바라며 평생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을 주님은 불러주십니다.
‘가톨릭 신문’에 카이스트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이론물리학연구센터에 재직 중이던 뛰어난 물리학자가 사제의 길을 택한 예수회 김도현 바오로 신부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외아들인 그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친척들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오늘 벳자타 연못에서 일어난 일을 볼 수 있습니다.
김 신부는 50년 중 30여 년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시기였다고 표현합니다. 38년은 안 돼도 30년을 찾은 것입니다. 76년도 4월에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갑자기 쓰러지셨고 수술은 해야 하지만 사실상 사망하실 가능성이 더 컸던 시기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뇌종양을 수술해서 살아나신 분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셨고 그 후유증을 견디며 사셔야 했습니다.
이때 친가의 유일한 천주교 신자께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인간의 생사를 쥐고 계신 분은 따로 계시다”라는 말씀과 함께 세례를 받기를 권유했습니다. 이때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 뒤로 계속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미사도 다니고 냉담도 하며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공부를 잘하여 카이스트에 입학하였습니다. 삶은 하루하루가 고난이었습니다. 굉장한 경쟁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적이 안 되는 학생들은 아래서부터 퇴학당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도 몇 명씩 자살하는 학생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와중에 실제로 자신이 잘 아는 친구도 자살하였습니다.
여러 친구가 학업 때문에 목숨을 끊는 것을 보며 다시 76년에 자신에게 닥쳤던 질문이 심각하게 다시 올라왔습니다.
“인간의 생과 사는 과연 무엇인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왜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죽음 이후의 세상은 무엇인가?”
물론 주위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지만, 과학을 공부하다 보니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신앙에서는 다들 멀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과학이 죽음과 내세까지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았어도 더는 벳자타에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생과 사를 주관하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지 않으면 주님은 그 사람에게 은총을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나 김 신부는 이 질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김 신부는 그런 사조에 빠지지 않고 대학원 다니면서도 오히려 매일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논문 지도교수가 그런 것을 원치 않았음에도 그는 더 중요한 질문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악착같이 매일 미사와 묵주기도 성체조배를 했습니다.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2000년에 어머니와 상주 가르멜 수녀원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원장 수녀님이 “수도 성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를 통해서는 은총을, 이 수녀님을 통해서는 진리가 다가온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펄쩍 뛰셨고 김 신부는 귀가 솔깃했습니다. 수녀님은 가르멜보다는 예수회에 가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그 이후 예수회 성소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서울대 이론물리학연구센터에 가서 일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결혼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습니다. 이때 자신의 학년에서 가장 유능하여 3년에 대학을 끝내고 또 3년에 박사 학위를 마쳐 독일 연구원에서 경력을 쌓고 있던 누구나 부러워하던 한 친구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됩니다. 2004년의 일입니다. 며칠간 큰 충격에 빠져 있다가, 다시 생사를 쥐고 계신 분 그리고 삶의 의미를 바라볼 수 있었고 수도회 입회의 마음을 굳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처음의 질문이 인간의 생사를 쥐고 계시는 분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었다면, 이젠 그분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은총과 진리가 주는 답변입니다. 먼저 여러 기적과 같은 체험을 통해 생사를 쥐고 계신 분이 당신임을 알려주시고 그다음엔 지니를 통해 죄짓지 말고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해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기도하던 중 한 성경 구절이 머릿속을 스쳐 갔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르 8,35)
순간 세상에서 무엇을 가진다 한들 결국 하느님 품에서 제대로 죽는 게 가장 좋은 삶이고, 다른 이들 또한 그렇게 잘 죽도록 도와주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주님, 이제 저는 그냥 무조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 묻는 것을 포기하면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생과 사를 주관하는 분이 계신지, 나는 왜 생겨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입니다. 벳자타 병자의 38년은 생과 사를 주관하는 존재를 찾는 마음입니다.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찾는 마음입니다. 이 두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진리로 응답해 주십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하느님의 양의 무리에 들게 됩니다.
벳자타 연못은 하느님 나라의 양의 무리에 들기 위해 반드시 고민해야만 하는 그곳에 끝까지 머물 줄 아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 마음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주님은 은총과 진리로 그 사람을 당신 우리로 초대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면 아직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데로 이끌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데로 이끌어주시는 분.
매사에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사업도 성공적이었고, 가족 안에서도 문제가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몸에 중병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수술만 받으면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워낙 큰 수술이었기에 회복 기간이 길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살던 사람이 누워만 있으니 점점 우울한 마음이 들었고, 병원에서 이제 퇴원해도 된다는 말이 자신을 병원에서 포기한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몸이 분명 예전 같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수술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분명 몸에 무리를 주어 예전 같은 생활을 당연히 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인정하지 못하니, 헛된 기대에서 좌절로 이어진 것입니다.
저 역시 30대의 몸과 지금 50대의 몸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을 나의 몸으로 인정해야 50대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0대의 몫으로 돌아가길 바란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욕심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이는 곧 주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데로 이끌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데로 이끌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벳자타 못은 가끔 샘물이 솟으며 물이 움직였는데, 이때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는다는 민간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이 흔들릴 때 제일 먼저 들어가 몸을 적시면 어떤 병이든 낫는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병자가 못 주위에 있었겠습니까?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이런 이유로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불편해서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남보다 먼저 물속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한 절망 상태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지요. 못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건강해지고 싶은 것이지요. 그러나 원래의 목적 자체를 잊어버렸습니다.
다른 병자의 치유처럼, 병자의 간청을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믿음을 요구하셨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 병자에게 제일 필요한 것을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주시는 분이십니다. 병자가 원하는 못에 들어가게 해주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병의 치유를 주십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나마저 나를 미워한다면 더 이상 누가 날 사랑하겠습니까?
- 한동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건강해지고 싶으냐? (요한 5, 6)
우리가 놓치고 사는 삶이 바로 건강한 삶이다. 건강한 삶은 주님처럼 아주 가까이 있다. 가장 정직하게 만나는 것이다. 먼저 변명을 내려놓는 것이다. 변명을 멈추는 거기에서 삶은 새로워진다.
건강하지 못한 제자신을 되돌아보는 은총의 사순이다. 참된 사랑을 위해 살지 못했다. 건강은 건강하신 주님과 연결되어 있다. 주님께 변명하지 않고 우리자신의 간절함을 나누는 것이다. 나누는 이것이 진정 우리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하는 방법이다.
건강한 소통과 분리될 수 없는 건강한 삶이다. 주님 안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삶이 건강한 삶이다. 건강한 삶은 자신의 삶을 기쁘게 사는 삶이다. 거짓에서 깨어나 주님을 향한다. 건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믿는다.
삶의 중심을 되찾는 건강이다.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건강한 삶이다. 건강한 삶의 예수님께서 건강한 삶의 길을 걸어가신다. 건강한 삶을 따르는 변화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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