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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30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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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4주간 수요일 -

 

 

2022년 3월 30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30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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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49장 8-15절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네.

주님은 말씀마다 참되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넘어지는 누구라도 주님은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네.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5장 17-30절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천상 선물을 받고 비오니 이 성사로 저희가 심판을 받지 않고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민회 시몬 신부 집전

 

 

2022년 3월 30일 (수)
김민회 시몬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30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

 

어제 복음(요한 5,1-16 참조)에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반감을 품고 그분의 치유 행위를 비난하는 유다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규정을 위반하셨고, 하느님의 신성을 모독하셨다는 이유로 그분을 고발하였습니다(5,17-18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깨닫지 못하는 유다인들을 상대로 스스로 변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아버지와 이루는 일치를 강조하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떠나 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으시며, 오직 아버지와 온전히 일치하시어 행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5,19-20.30 참조).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 곧 하느님과 맺는 완전한 일치의 상태를 강조하시고자 ‘아들’이라는 개념을 여러 차례 사용하셨습니다(5,20.22.23.25.26.27 참조).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 세상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이 세상에 파견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 계획을 완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여 생명을 주는 일(5,21 참조)과 심판하는 일(5,22 참조)을 수행하십니다. 아버지에게 유보된 일이 이제는 아들에게 주어진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부여받은 권한으로 믿는 이에게 생명을 주시고(5,24-26 참조),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5,27-30 참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먼저 따른 ‘아들’이셨습니다(5,30 참조). 그분의 온 생애가 요한 복음서의 증언을 뒷받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와 맺으신 관계로 초대하시면서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떻게? 사랑으로.

 

어제 서른여덟 해를 앓은 사람을 고쳐주신 것이 시빗거리가 되자 오늘 주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안식일에 일을 하신 것만으로도 시빗거리가 되고 박해를 하려고 하는데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을 동일시하시니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격이 되어 이제는 신성모독죄로 죽이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당신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느님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불경죄를 짓는 것이지만 오늘 요한 복음의 주님은 수다스러우시고 더 심하게 얘기하면 너절하게 당신이 하시는 일에 대해 설명인지 변명인지를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간단하게 종합을 하면 그것은 <창조와 구원>입니다. 

저는 가톨릭 전례를 매우 사랑하고 특히 오랜 전통의 축적인 미사 경본을 사랑하며 미사 경본 안에서도 감사송을 더 사랑하는데 연중 시기 공통 감사송 2는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인간을 선으로 창조하시고, 정의로 책벌하셨으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비로 구원하셨나이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얼마나 잘 요약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창조하신 좋은 것들을 책벌도 하시지만 책벌도 구원을 위한 것이기에 결국은 구원을 하시는 것인데 그 구원 사업을 하시는 분이 우리 주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을 선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기에 모든 것을 당신 마음에 들게 만드실 수 있으시고, 그래서 당신이 만드신 것을 싫어하실 리 없으십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는 지혜서 11장 23-4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창조된 피조물 중에 우리 인간은 사랑으로 주신 자유 의지를 가지고 죄를 짓기에 책벌을 하시지만, 이 또한 구원을 위한 것이고 그래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으시고, 그래서 책벌도 하시고 구원도 하십니다.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이런 하느님 사랑을 어미의 사랑에 빗대어 얘기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우리도 하느님처럼 그리고 어머니들처럼 창조와 구원의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사랑으로.

 

 

 

오늘의 말씀 묵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 희망합니다.

 

예언서 중의 예언서라고 할 수 있는 이사야서는 꽤나 흥미롭고 특별한 예언서입니다. 작품의 역사적 상황, 사용되는 언어와 문체, 주요 신학 사상 등을 고려할 때 이사야서는 통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세 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39장을 제 1 이사야서, 40~55장을 제 2 이사야서, 56~66장을 제 3 이사야서라고 요즘 칭하기도 합니다.

특히 제 2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 선포 대상자들은 더 이상 유다나 이스라엘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처절하게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유배를 당했습니다. 바빌론으로 끌려온 백성들은 비참하고도 굴욕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제 1 이사야 예언자와 제2이사야 예언자의 활동 시기는 적어도 150년 정도의 차이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제 2 이사야 예언서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이며 창조주이신 주님께서는 가련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남의 나라 땅에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바빌론 제국이 난다 긴다 하지만 인간 존재의 힘이나 위대함은 풀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 임금 키루스를 이스라엘의 해방과 재건을 위한 도구로 뽑으셨다. 그를 통해 주님께서는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당신 백성을 유배에서 해방시켜 위로해주실 것이다. 제 2의 출애굽, 새출애굽이 도래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시온의 재건이 이루어질 것인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결정적인 구원에 도달할 것이다.

유다왕국이 멸망한 후에 바빌론으로 끌려와 살아가고 있던 유다인들의 하루하루는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참으로 복잡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시다면 어찌 이리도 참혹한 현실을 허락하시는지? 과연 주님께서 계시기나 한건지? 그분께서 계시다면 어찌 이리 오래도록 남의 나라 땅에서 수모를 당하게 하시는지? 혹시라도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완전히 저버리신 것은 아닌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난 한 예언자가 있었으니, 이사야의 사상을 이어받은 제2이사야 예언자였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절망에 빠져있던 백성들을 따뜻이 위로합니다. 첫 선포 말씀부터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이사 40,1-2)

특히 오늘 첫 번째 독서로 선포되는 말씀의 말미 부분은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위로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4-15)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키루스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는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왕으로서 당대 ‘핵인싸’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벌이는 전투마다 승승장구했습니다. 페르시아 백성들은 크게 환호하고 지지를 보냈습니다. 정복한 나라 백성들에게는 유화 정책을 써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여세를 몰아서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강대국 바빌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설명에 따르면 바빌론은 천 개의 성문으로 둘러쌓여 있었으며, 수많은 보화와 보물로 가득 찬 황금의 도시였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성문과 성벽을 새로 세우고 튼튼하게 보수하고 증축했습니다. 성벽은 2층에다 높이는 6.5미터였습니다. 성벽은 일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열로 되어 있었는데, 두 성벽 사이의 폭은 3.72미터였습니다.

키루스는 이토록 강력한 바빌론을 함락하고 멸망시킵니다. 엉겁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로부터 해방을 맞이합니다. 이를 통해 키루스는 주님 구원의 도구로 선포됩니다. 그는 주님의 구원 행위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키루스를 인도하시어 그로 하여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결국 키루스가 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의 일이었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경우 그분이 계획하시는 일을 우리의 좁은 안목과 머리로 알아차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그저 그분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시리라 낙관하는 일입니다.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그분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고 희망하는 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평안(平安)에 이르는 법 : 평화와 안식의 차이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는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38년 동안 병을 앓던 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였습니다. 40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의 양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하는 하느님의 일이란 이렇게 동물을 새로 태어나게 하여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이때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다고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요한은 안식일의 의미가 사실 주일에 일하지 않고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오늘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은 아담의 일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은 이렇게 안식이 일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 하십니다. 여섯째 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일곱째 날을 맞을 수 있게 됩니다. 

안식을 우리말로 한다면 ‘평안’(平安)이 제일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평안은 평화와 안녕, 혹은 안식이 합쳐진 말입니다. 안식일에 도달하려면 먼저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평화를 찾았다고 안식에 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처럼 일해야 합니다. 

평화와 안식은 조금 다릅니다. ‘평화’는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으셨음을 알고는 평화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은 그렇게 하신 분처럼 나도 자녀로서 따라 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행복입니다. 

예를 들자면 저에게 예수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을 때 가지게 된 것이 ‘평화’입니다. ‘아, 이렇게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셨구나!’라고 깨닫는 게 평화입니다. 제가 ‘내 어머니는 다리 밑에 계신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다가, 어머니가 해 주시는 사랑을 보고는 ‘아, 내 어머니가 저분이 맞는구나!’라고 느끼는 것이 평화입니다. 

평화를 얻었다고 안식에 이른 게 아닙니다. 부모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셨다면 나도 자녀 된 도리로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고 부모처럼 양식을 먹이며 일을 마치고 나서 느끼는 평화가 바로 안식입니다. 받은 것처럼 해줄 때 비로소 부모 앞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의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세례 때 받은 성령과 말씀을 그에게 전해 주어 그도 당신처럼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 후에 ‘안식’을 누리기 위함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만으로는 안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분처럼 일해서 그분의 자녀라는 안도감이 들 때 비로소 안식일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의 아저씨’는 아이유가 연기한 지안이란 한 상처투성이 젊은 청년의 성장기입니다. 이를 ‘지’(至), 평안 ‘안’(安). 평화도 없던 한 사람이 안식에 이르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네…. 네.”

지안은 살인자입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며 구타당하는 어머니를 구하려다 사람을 살해한 21살 여자입니다. 이지안은 정당방위로 무죄입니다. 그러나 살인자란 꼬리표는 여전히 이지안을 따라다닙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의 아들인 이광일로부터 여전히 빚 독촉에 시달립니다. 이광일은 빚이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로 무조건 지안이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죽고 싶은,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지안은 어떤 회사에 들어갑니다. 이력표에 달리기 잘한다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지안이를 박동훈이란 만년 부장이 뽑아주고 인간적으로 대해줍니다. 힘든 처지에서도 노모를 모시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지안이는 점점 마음을 열고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도 믿어갑니다. 

박동훈도 후배에게 밀려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붙어살아야만 하는 불쌍한 인간입니다. 아내가 자신을 앞질러 대표이사가 된 도준영과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내야 합니다. 박동훈은 아내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집 밖에서나 집 안에서나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아나가야 합니다. 

처음에 지안이는 박동훈을 이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유일하게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박동훈 부장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됩니다. 회사에서는 박동훈을 몰아내기 위해 이지안을 이용합니다. 이지안이 박동훈을 인간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지안은 많은 회사 중역들이 모인 곳에서 박동훈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박동훈도 그녀가 살인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회사에 받아주었다고 말합니다. 

박동훈에게 안 좋은 일을 벌어지게 한 자신을 탓하며 이지안은 또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그러나 박동훈은 그래도 지안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지안이는 그렇게 평안을 찾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런 희생을 실천해야 평안에 이르는 것입니다. 

지안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인 이광일도 용서합니다. 광일은 어느 날 자신의 어렸을 때의 관계를 기억하는 지안이의 이런 말을 듣습니다.

“착했던 애예요. 걔네 아버지가 나 때리면 말리다가 대신 맞고…. 걘 날 좋아했던 기억 때문에 괴롭고, 난 걔가 착했던 기억 때문에 괴롭고. 미안해, 광일아.”

광일은 지안이가 그런 마음을 가졌으면서 자신에게 당해준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이 어둠임을 지안이를 통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상처를 딛고 일어섭니다. 지안이는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박동훈은 회사를 나와 개인사업을 합니다.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둘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들만의 대화입니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네…. 네.”

사랑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이 평안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받는 감정이 안식입니다. 안식에 이르기 전까지 그 평안함은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피를 흘리며 나를 낳기 땀을 흘리며 키웠다면, 나도 그렇게 할 때 참 안식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은총에 의해 얻는 것이고 안식은 진리에 의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저의 안식은 이렇게 복음 묵상을 나눔으로써 완성됩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얻은 것이 평화입니다. 그런데 나도 이웃에게 그렇게 다 내어주기 전까지는 안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평화를 거저 받았기에 빚을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갚아야 안식에 이릅니다. 먼저 하느님 사랑을 깨달아 평화를 누립시다. 그다음엔 그 평화가 안식이 되도록 키워가야 합니다. 그분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안식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법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당신의 인생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책 제목에 끌려서 구매한 책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에디 제이쿠, 동양북스) 
 
보통 말년에는 후회할 일이 더 늘어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100세라는 노인임에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의 인생이 너무나 궁금해서 책을 샀습니다. 
 
책의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것입니다. 수용소에서 탈출해서 구조되었을 때의 몸무게가 28kg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생활을 했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저자인 에디 제이쿠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수용소를 전전하며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모님과 친척들의 죽음을 봐야만 했었지요. 그래서 자신도 죽음의 유혹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희망을 발견하려고 했고, 이 책을 통해 희망을 사람들에게 지금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인생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최고의 무게만이 아님을 기억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계속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신원을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안식일 법을 무시하는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자기가 하느님과 같은 일을 한다고 하는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인으로 단정했습니다. 이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하느님의 특권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특권을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위임받았다고 선언하시며, 동시에 사람들을 심판할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자신 있게 선포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원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아버지 아들 관계에 있으며 꼭 같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받지 않게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혹시 과거의 유다인들처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나이가 들었다고 꼭 그 나이인 건 아니다.

- 파스칼 브뤼크네르 (Pascal Bruckner)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요한 5,25)

 

최초에도 사랑이 있었다. 어디에서 이 사랑이 시작되었는지를 알게되었다. 가장 분명한 것은 순간순간 우리에게 펼쳐지는 하느님 사랑이다. 가장 중요한 사랑을 알게 된다. 사랑의 같은 시간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이 넘치게 펼쳐지는 바로 지금 이때이다.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다.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바로 지금이 다시 살게하시는 하느님 은총의 때이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고스란히 드러난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이시다. 아버지 하느님 사랑의 계획은 예수님을 통하여 전달된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자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사랑을 되살아나게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지난날들도 사랑이었고 앞으로 펼쳐질 모든 날들도 가장 좋은 사랑이다. 지금이 가장 좋은 사랑의 때이다. 사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자녀들이다. 예상치 못한 하느님 사랑이 우리에게 오셨다. 이 사랑을 받아들여야 할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가장 좋은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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