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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1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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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4주간 금요일 -

 

 

2022년 4월 1일 사순 제4주간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악인들이 의인을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하며 수치스러운 죽음을 안기려 작당한다고 꾸짖습니다.

 

 

✠ 오늘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으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에 그분께 손을 대지 못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4월 1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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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지혜 2장 1ㄱ절, 12-22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악인들은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신다.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신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신다.

그의 뼈를 고스란히 지켜 주시니, 뼈마디 하나도 꺾이지 않으리라. 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신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7장 1-2절, 10절, 25-30절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성사로 저희가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 건너갔으니 옛 악습을 버리고 거룩한 마음으로 새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민회 시몬 신부 집전

 

 

2022년 4월 1일 (금)
김민회 시몬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1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신앙을 따를 것인가? 세상을 따를 것인가?

 

고대 유다교 전통에 따라 ‘초막절’은 포도를 거두어들이는 9월에 지냅니다(탈출 23,16; 레위 23,33-44; 신명 16,13-17 참조). 이때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한 해의 수확에 대하여 감사드릴 뿐만 아니라,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히브리 백성을 해방하셨던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드립니다. 한편 구약 후기 문헌에 따르면, 초막절 축제는 메시아 시대에 펼쳐질 하느님의 축복을 예고하는 예언적 특징도 담고 있었습니다(즈카 14,16-19 참조).

오늘 복음은 이 같은 배경 속에서 읽을 때 더 풍성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막절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구약의 백성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께서 초막절 축제를 지내시러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당시 유다교 지도자였던 최고 의회 의원들이 그분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구세주 메시아를 눈앞에 두고서 알아뵙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유다인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들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우리도 일상에서 때때로 경험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복음 정신과 신앙의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 속에 매몰되어 현세적 가치를 좇을 것인가? 이 갈림길에서 종종 갈팡질팡합니다. 이처럼 나약한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는 참된 길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저는 양성을 오래 그리고 이것저것 많이 했지만 성소 계발은 청원장을 겸하여 1년 한 것이 전부입니다. 

1년 성소 계발을 하면서 기억나는 사람이 딱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입회하지 않은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입회하여 저에게서 청원기를 보내고 이제는 저의 도반이 된 형제입니다. 

먼저 입회하지 않은 사람 얘기를 하면 그는 계모 밑에서 컸지만 계모가 자기의 친모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계모가 당신이 낳은 자식들과 똑같이 그를 사랑으로 키웠기 때문인데 그것을 저를 찾아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물론 충격이 컸습니다. 부모가 원치 않은 그러니까 불장난의 결과로 태어났다는 것과 지금까지의 엄마가 갑자기 자기 엄마가 아니라는 것과 자기가 모르는 친모가 있다는 것 등이 충격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모가 그렇게 자기를 사랑한 것이 너무도 고마웠고, 수도자가 되려고 한 이유도 자기도 계모와 같은 사람이 되어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고 싶은 거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련을 줬습니다. 계모처럼 되고 싶어서 수도자가 되려는 것은 좋지만 너의 출생이 부모의 불장난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요 성소임을 믿게 될 때, 그때 다시 오라고 하며 돌려보냈는데 그 형제는 결국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와 같이 살고 있는 형제도 제가 1년간의 시련을 준 형제입니다. 수도자가 되려는 열망이 얼마나 큰지, 특히 다른 수도회가 아닌 우리 수도회에 입회하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큰지 이 시련을 통해서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소에 대한 확고함이 얼마나 큰지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정도의 시련으로 자기에게 성소가 없다고 생각하고 팽개친다면 그는 수도원 들어와서도 수없이 성소가 흔들릴 것이고 떠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교만한 사람인지, 겸손한 사람인지. 어려움을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인지, 못견디는 사람인지.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시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불쾌해할 것이고 더 나아가 분노할 것이며 그 경우 이 시련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인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 지혜서를 보면 예언자의 적대자들도 이렇게 예언자를 시험합니다.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시련이나 시험을 받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시련과 시험을 받고 하느님의 사람답게 시련과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적대자가 시험을 해도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하느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을 것이고 하느님의 사람답게 받자는 것입니다. 

앞서 봤듯이 겸손하지도 온유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시험을 받을 때 내가 이런 시련을 뭣하러 받느냐며 거부할 것이고 실제로 수도원 들어올 사람이 아니라면 성소의 시험을 받지 않듯이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시련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그것이 비록 적대자가 주는 시련일지라도 적대자의 손을 빌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사람에게 주시는 시련이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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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성당으로 파견 받는가, 성당에서 파견 받는가?

 

오늘 복음의 시기는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포도 수확 철에 가을걷이를 도둑맞지 않으려고 초막을 치고 농장을 지켰던 가나안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전통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초막을 치고 살았던 시절을 되새기는 새로운 축제로 바뀐 것입니다. 초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친 초막을 의미하기도 하고 성막을 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 

축제는 이렇듯 무언가를 기억하며 그 교훈을 잊지 않으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굳이 시기가 초막절이라 말하는 이유는 초막절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남모르게 올라가십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께서 치르시려는 초막절이 그들이 원하는 초막절에는 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메이아일 수 없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구원자인데 자신들이 알 수 있는 곳에서 온다면 구원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 떼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야 하는 목자는 양 떼가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와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동의하시면서 결국엔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오셨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그 아버지를 모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신 곳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곳입니다. 아버지가 계신 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 초막절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영화 ‘안테벨룸’(2022)의 줄거리입니다. 남부 연합군이 운영하는 루이지애나 노예 농장, 노예들은 가혹한 대우를 받으며 말을 누군가 먼저 걸어주지 않으면 말도 한마디 하지 못합니다. 탈출 시도하는 사람들은 살해당하고 그들의 시체는 화장당합니다. 그들을 도왔던 이든이라는 여자는 잔인하게 구타당하고 강간당하고 장군에 의해 낙인이 찍힙니다. 이든의 친구인 줄리아도 매를 맞아 유산합니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핸드폰 전화벨 소리가 들립니다. 이 모든 것은 꿈이었던 것입니다. 이든은 본래 베로니카 헨리 박사라는 유명한 사회학자입니다. 그녀는 인종차별에 대해 TV 토론 쇼에서 강력한 발언을 합니다. 친구들과 파티를 즐기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려고 우버를 타고 레스토랑을 나가는데 실제로는 엘리자베스가 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남편 재스퍼가 베로니카를 때려눕힙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전 내용에서 이든과 흑인 노예들을 부리던 백인 부부였습니다. 

베로니카가 눈을 뜨니 다시 과거의 농장입니다. 농장에서 베로니카는 줄리아가 목을 매 죽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분노한 그녀는 일라이에게 그날 밤 탈출할 거라 말합니다. 일라이는 이든과 함께 탈출하려다 아내를 잃은 남자입니다. 사실 현재 노예 생활하는 장소는 우리나라 민속촌과 같이 과거 시대를 재연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실제 목화를 따는 흑인들이 납치되어 말도 못 하고 실제 노예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로니카는 다시 한번 오두막에서 몰래 빠져나와서 장군의 전화를 훔칩니다. 장군이 베로니카를 공격하는데 일라이가 베로니카를 보호하다 살해당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총검으로 장군을 찌르고 전화기 잠금 해제하고 GPS를 사용해 남편에게 위치를 보냅니다. 베로니카는 그와 다른 병사들을 화장터에 끌어들이고는 불을 지르고 장군의 말을 훔쳐 타고 나갑니다. FBI가 들이닥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 장소를 부수어버립니다. 

다른 모든 납치되어 온 흑인들은 이 집단이 너무 무서워 조금씩 자신의 신원을 잊고 그들의 말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야 적어도 생존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로니카만은 자신이 갇힌 곳에 딸이 그려준 그림을 새깁니다. 그 그림을 보고 만지며 자기 집이 본래 어딘지 잊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문에 왁스를 바르고 방에서 걸을 때 바닥의 나무 소리가 나지 않는 곳을 외워둡니다. 그리고 장군이 쓰는 핸드폰을 두는 위치를 기억하고 결국엔 자신만이 아니라 그곳의 모든 이들을 해방합니다. 

내가 본래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온 곳으로 이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기억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로부터 온 분은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나자렛 출신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출신입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이 ‘초막절’의 의미임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예루살렘이 목적지였지만 예수님은 이 축제 때 당신의 목적지는 천국임을 되새기시는 유일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일에 성당으로 향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의 초막은 성전입니다. 우리는 성전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에 나가서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잊지 않고 살게 됩니다. 성당은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초막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되면 집 밖에 천막을 짓고 일주일을 삽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기억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압니다. 이를 기억하게 하는 초막이 지금의 성당입니다. 

영화 ‘집으로’에서 아이는 버릇이 없었지만 억지로라도 할머니와 지내면서 남도 생각할 줄 아는 모습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아이는 할머니에게 가슴을 쓸며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영화 제목이 ‘집으로’인 이유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집으로일까요, 아니면 다시 힘들 때 돌아와야 하는 집이 할머니라는 의미일까요? 아무리 봐도 후자일 것입니다. 사랑이 주어지는 곳이 참으로 집입니다. 

따라서 성당에 올 수 있음에도 TV를 보며 미사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 전화로만 부모님을 만나면 된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성전에 직접 와야 하는 이유는 베로니카처럼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진짜 집이 성당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인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집에서 성당으로 파견받는 것이 아니라 성당에서 집으로 파견받는 것입니다. 성당은 추리가 축제를 지내야 하는 초막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음악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17세기 바로크 음악의 대표 음악가로, ‘음악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 바치는 음악을 수없이 작곡했습니다. 많은 미사곡뿐 아니라, 마태오와 요한 수난곡도 너무 유명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삶은 하느님께 은총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11살에 고아가 되었고, 사랑하는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20명이나 두었지만, 절반가량이 자신보다 먼저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자신도 돌팔이 의사에게 받은 백내장 수술로 인한 시력을 잃었고, 수술 후 4개월 후에 뇌졸중으로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는 인정받지 못해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하느님께 바치는 곡을 만들었습니다. 상실과 절망으로 점철된 삶 안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 뜻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흐처럼 하느님의 뜻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이는 행복보다, 하느님 안에서 보이는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행복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르쳐야 할 중대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군중 앞에서 거리낄 없이 자유롭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적대자들은 이 예수님을 향해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성도 이름도 없이 언제 어디서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메시아가 맞다.’, ‘메시아가 아니다.’로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모세나 엘리야 같은 예언자였습니다. 그들도 기적을 행하기는 했지만, 기적보다는 민족의 지도자 역할을 맡을 메시아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혜성처럼 나타나 이스라엘을 굳건히 해서 세상에 떨칠 왕국의 건설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즉, 세속적인 만족을 가져다줄 주님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절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거대한 경계선은 단어 다섯 개로 표현할 수 있다. ‘내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다.

- 프랭클린 필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7,30)

 

주님의 때가 오고 있다. 주님의 때와 주님의 뜻 사이에 우리가 있다. 주님께서 지나가신 방향으로 주님의 때가 펼쳐진다. 주님의 때가 있다. 주님의 때에서 봉헌의 삶을 배운다. 우리의 때와 주님의 때는 분명히 다르다. 주님의 때 앞에서 수많은 계획들을 세우는 어리석은 우리들 삶이다. 

주님의 때를 알아보지 못한다. 주님의 때는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은총과 믿음의 때이다. 십자가에서 시작되는 주님의 때이다. 시작이 있으면 마무리의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의 때 안에 정화되어야 할 우리들 욕심만 있다. 주님의 때와 우리의 때가 십자가로 만나는 아픔이다. 

주님 사랑을 만나는 지점이 역설적이게도 십자가이다. 주님의 십자가로 주님의 때를 만나는 사순이다. 십자가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우리의 뜻을 짊어지고 가시는 주님이시다. 감출 수 없는 우리의 뜻이다. 우리의 뜻을 버릴 때 삶은 부활이 된다. 삶이 바뀌어야 할 때가 있다. 주님의 때를 가르쳐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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