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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2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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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4주간 토요일 -

 

 

2022년 4월 2일 사순 제4주간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아 악인들의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이들에게 니코데모는 율법대로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하는 일을 알아본 뒤에 심판하자고 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4월 2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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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예레 11장 18-20절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18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19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20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오니, 뒤쫓는 모든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저를 구해 주소서. 사자처럼 이 몸 물어 가지 못하게 하소서. 아무도 구해 주는 이 없나이다.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주님, 제 의로움,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시다.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하느님은 나의 방패, 마음 바른 이들을 구하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신 심판자, 하느님은 언제든 진노하시는 분.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7장 40-53절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53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성사로 저희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온전히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황중호 베드로 신부 집전

 

 

2022년 4월 2일 (토)
황중호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2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과 예수님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는 상황이 그려집니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인 군중, 성전 경비병들, 수석 사제들, 바리사이들, 니코데모 사이에서도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여러 부류로 나뉩니다.

첫 번째로, 군중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며(마태 1,1 참조), 베들레헴 출신이시라는(마태 2,1; 루카 2,4 참조) 사실 관계조차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분을 거부합니다. 

두 번째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성전 경비병들에게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라며 나무랍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잘못된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저지르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 니코데모는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바리사이들에게서 타박만 듣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어떤 메시아로 생각합니까? 혹시 우리의 신앙생활이, 각자가 원하는 모습을 그분께 ‘투사’하는 것에 머무르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는 유다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우리 각자의 모습에 비추어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복수와 기도 중 무엇을?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이 청이랄까 기도는 악한 사람이나 여느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예언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고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용서해달라고 하신 주님을 생각할 때 이 말이 낯설고 얼핏 드는 생각에는 이렇게 기도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 이 기도는 예언자의 기도이고, 분명 복수를 운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복수를 우리 입에 올려도 되고, 복수를 하고 싶을 땐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복수를 청하기 전에 예언자는 먼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정의로운 분이시고  인간의 마음속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는 분이시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언자는 송사를 하느님께 맡깁니다. 인간의 법정에 송사를 맡기지 않고 하느님께 맡기는 것인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의로운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억울한 일이 있을 때 보통 하느님께 그 심정을 토로하기 보다는 친한 사람이나 자기 마음을 이해해줄 것 같은 사람에게 토로하는데 예언자는 역시 그것을 하느님께 토로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인간적인 토로를 기도로 승화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아시다시피 저의 지론입니다. 어떤 때 실천이 잘 안 될 때도 있지만 그 순간 생각이 나면 인간적 하소연을 기도로 바꿉니다. 

그런데 억울할 때 더 나아가 복수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날 때 하느님이 떠오를 수 있도록 우리는 의식화되어 있어야 하고, 실패를 할 때마다 다음에는 꼭 인간적으로 하소연하지 않고 기도로 승화할 것을 반복적으로 다짐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키고, 민간인들을 의도적으로 살해할 때 저런 인간은 죽여야 한다고 인간적으로 분노를 터트리거나 국제 사회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정치적인 주장을 펼치다가도 이내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예언자는 복수의 칼을 자기 마음에서 빼내버립니다. 어떤 때, 아니 많은 경우 내 손으로 복수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복수해주거나 하느님께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꼭 내 손으로 복수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래서 옛날 어떤 아빠는 자식이 맞고 들어왔을 때 조폭을 시켜 때린 사람을 붙잡아 놓고는 아들에게 직접 복수하게 했다지요. 

이렇게 해도 성이 풀리고 분노랄까 미움이 마음에서 빠져나갈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고 그래서 분노를 마음에 계속 갖고 있을 때 그 복수의 칼이 그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해치기 싶고, 설사 복수할 수 있었다 해도 내 손에 피를 묻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 안 대고 코 풀고 내 손에 피 안 묻히고 복수하는 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물론 직접 복수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 중의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복수와 기도 중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이 오늘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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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은 걱정이 없을 때만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다.

 

오늘 복음도 ‘초막절’ 축제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남다른 초막절을 지내러 올라가십니다. 초막절의 핵심은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깨닫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초막절을 제대로 지내면 이 세상은 여행지일 뿐입니다. 심판의 장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초막이나 성막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의 집, 곧 성막을 향하는 모세와 같습니다. 그 성막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되고 또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소명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초막을 그리스도 성막으로 삼아야 합니다. 

초막절은 초막에 주님 은총의 물이 부어지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진정한 초막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

초막절에 하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실로암에서 물을 떠서 제단에 붓는 예식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란 뜻입니다. 본래 비가 오기를 바라는 가나안 땅의 예식이었을 것이지만, 이것이 유대교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요한은 이 예식이 곧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39)라고 하며, 초막절은 그리스도라는 실로암에서 성령을 길어 우리 제단에 뿌리는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대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야훼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비는 유목민들에게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초막이십니다. 그 초막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의 피와 물로 우리가 풍성해져서 그분께 제물을 바치는 온전한 제단이 됩니다. 

초막이 그리스도인들임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아니면 마치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 없이 광야에서 말라 죽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병사들이 예수님을 잡아 오지 못한 것에 대해 나무랍니다. 그리고 성경에 메시아가 다윗 후손이고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예수님도 그에 적합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멍청하게도 예수님을 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왜 어리석은 실수를 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말은 인간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성적일까요? 인간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인간이 이성적이라면 모두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감정의 노예일 뿐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초르노바이우카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유명한 마을이 되었다고 합니다. 러시아가 같은 방식으로 똑같이 열 번 공격해 왔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군이 아주 손쉽게 그들을 열 번 모두 이겼기 때문입니다. 

이 공격으로 러시아 장군 두 명이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러시아군은 이미 그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똑같이 들어와서 똑같이 폭탄을 맞았습니다. 그것도 열 번이나. 합리적으로 생각했다면 두세 번 같은 자리에 같은 포탄이 떨어지면 그다음에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었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정말로 일어납니다. 마치 자신이 타는 줄 모르고 계속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습니다. 사실 푸틴이 전쟁을 일으킨 것도 현명한 지도자의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파멸시키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자기 머리를 믿는 것입니다. 머리는 다만 감정의 종일뿐인데 말입니다. 

인간이 멍청해지는 이유는 생존 욕구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생존 욕구 때문에 생존하는 것보다 생존을 잃게 되는 것을 더 겁냅니다. 그래서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지금 1,000만 원을 드리거나, 혹은 여러분 중 추첨하여서 한 달 뒤에 80%에게 2,000만 원을 드린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은 지금 당장 1,000만 원을 받는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컴퓨터에 물어보면 20%의 위험을 감수하고 2,000만 원에 도전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합니다. 그 받는 기댓값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심리학자이지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인간이 경제활동에서도 멍청함을 실험으로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얻는 기쁨보다 잃는 고통을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낍니다. 조금 덜 갖더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속 육신 마귀에 빠진 사람은 더는 그 욕망을 통제할 전전두엽이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전전두엽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욕구를 통제하는 부위입니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서 이런 장면을 목격합니다. 아침마다 독일 병사들은 일부러 그러는지 밖에서 고기를 끓입니다. 굶주림에 지친 한 사람이 대열을 이탈해 그 냄새 나는 곳으로 갑니다. 사람들이 말려도 독일군들이 총구를 들이대도 소용없습니다. 한 번이라도 고기를 먹으면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죽었습니다. 

인간은 이렇듯 멍청한 선택을 합니다. 그 이유는 욕구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 욕구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실제로는 더 큰 손해를 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현명해지는 길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의 환경이 항상 풍족하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곳이 초막입니다. 에덴동산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피가 부어집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부유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농부에게는 네 명의 자식이 있었으며, 맏아들은 군인 ‘세묜’, 둘째 아들은 배불뚝이 장사꾼 ‘타라스’, 셋째 아들은 바보 ‘농부’지만 성실한 ‘이반’, 막내딸은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이나 ‘눈썰미 좋은’ ‘말라니야’였습니다. 자식들이 장성하면서 아버지는 세 아들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공평하게 3분의 1로 분배했습니다.

군인, 세묜과 장사꾼, 타라스는 집을 떠나서 독립한 이후, 각각 사치스러운 귀족의 딸과 상인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군인 세묜은 아내의 사치를 감당하는 것에 대한 부담으로, 장사하는 타라스는 더욱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아버지를 찾아와서 남은 재산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남은 재산은 ‘이반의 몫’이라고 말했지만 두 형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인 이반과 벙어리인 말라니야가 재산을 가져봐야 무엇하냐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이반은 흔쾌히 형들에게 자신의 몫으로 남은 재산들을 반씩 준 다음, 홀로 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부모님과 말라니야를 돌보며 살아갔습니다. 

한편 지하에서 살아가던 악마는 이들 삼 형제가 서로 싸우지 않고 지내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자기 부하들인 작은 악마 세 마리를 보내서 이반 형제들의 사이를 나쁘게 만들 것을 명령했습니다. 첫째 악마는 세묜에게 가서 호승심을 불려놓아 인디아와 괜한 전쟁을 벌이게 한 다음, 화약에 물을 적셔서 못 쓰게 만들어서 전쟁에 지게 했습니다. 둘째 악마는 타라스의 욕심을 부려 물건들을 잔뜩 사들이게 한 다음, 그것들을 모두 거름으로 만들어서 채무자들에게 쫓기는 신세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세묜과 타라스는 계략에 말려들어서 그동안 쌓았던 지위와 부를 잃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반을 맡았던 셋째 악마는 이반의 농사를 방해하였지만, 그때마다 이반은 포기하지 않고 농사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악마가 잡혔습니다. 이반은 흙 속에 나무뿌리라도 새로 돋아났나 싶어서 흙 속에 손을 넣었다가 작은 악마를 잡아 올렸습니다. 이반이 질겁하며 악마를 돌에 내리쳐 죽이려 하자 악마는 목숨만은 살려 달라면서 원하는 소원을 들어준다 했습니다. 이반은 무슨 병이든 치료하는 ‘풀뿌리’, 짚단을 ‘군사’로 바꿀 힘, 나뭇잎을 비벼 금으로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반은 자신의 무엇이든 고치는 풀뿌리로 중병에 걸린 공주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일합니다. 이번엔 마귀 왕이 찾아와 꾑니다. 군대를 보강해야 하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머리를 써야 한다’라고 한 것입니다. 머리는 그저 내가 선택한 주인이 자아내는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 백성은 이반 임금처럼 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언제든 군사를 만들 수 있고 언제든 나뭇잎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쥐어박던 나이 많은 악마는 술집에 술이라도 한잔하러 들어갔는데, 손에 굳은살이 안 박였다고 쫓겨나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악마는 음식을 먹지 못해 배고픈 상태에서 망루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머리로 일하는 법을 알려주겠다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떨어져 머리가 깨져 죽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아무도 없습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추구하는 욕구가 합리적임을 증명하려고 하지 그 욕구가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판단력 부족은 내 안의 욕구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공부를 아무리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똑똑한 마귀가될 뿐입니다. 

생존을 위해 머리를 쓰면 이성도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머리가 생존만을 위해 사용되면 동물의 수준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성은 그저 나의 감정을 따를 뿐입니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 머리를 쓰지 않으려면 초막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곳에서는 생존을 위해 머리를 쓸 필요가 없어서 현명해집니다. 왜냐하면 초막에는 물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바보라 불리겠지만 초막에 머무는 이들은 가진 것이 충만하여 머리를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네가 날 좀 쳐다봤으면 좋겠어.

 

어느 부부가 오랜만에 단둘이 데이트했습니다. 장소는 경관이 너무나 멋진 레스토랑이었습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리에 앉는데, 아내가 남편에게 창가 의자에 앉으라고 합니다. 남편은 창밖의 야경이 멋지다면서 아내에게 창가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창을 바라보는 쪽에 앉으면 나를 보지 않을 거 아니야. 당신이 나만 쳐다봤으면 좋겠어.” 
 
자기만을 바라봐주고 있는데,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다면 어떨까요? 기분이 영 좋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자기만을 바라봐주길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것에 너무나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스마트폰뿐 아니라, 세상일에 대한 걱정으로 지금 바라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당신을 바라봐주길 원하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와 대화하길 원하십니다. 문제는 계속해서 자기 혼자 말하고, 다른 것 보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네가 날 좀 쳐다봤으면 좋겠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의 기적을 보고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게 한 모세를 생각했고, 또 생명의 물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즈카리야 예언서에 언급한 승리의 왕 메시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갈릴래아 출신이어서 아니라는 주장도 지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무지의 편견에서 나오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도 아니었고, 또 실제로 베들레헴 태생이었던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중에 믿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예수님을 적대시합니다. 니코데모가 율법에 나온 대로 예수님의 말을 들어 보고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판단하자고 했으나 이 역시 거부합니다. 자기 아집에만 사로잡혀서 어떤 말도 듣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것만을 바라본다면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길은 전혀 생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구원할 하느님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큰 손해를 볼까요? 다름 아닌 바로 나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적당히 불안해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을 배운 셈이다.

- 키르케고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요한 7, 52)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들 완고한 마음에 다시금 흠칫 놀란다. 고정된 선입견에서는 아무 것도 탄생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머물 수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들 모순이다. 

예언의 내용은 기억하진 못해도 예언자들의 출생지는 기억하는 우리들 모습이다. 하느님마저도 출신배경을 따지며 묻는 어리석은 우리들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삶임을 다시 기억하는 사순이다. 모든 곳의 배경이 되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십자가는 출신배경을 따지지 않으며 우리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십자가가 편견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힌다. 우리 일상의 고정관념을 복음 앞에 내려놓는다.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공통분모를 다시 찾게된다. 

예언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인간 삶의 모순을 보여주고 예언자들은 출신배경의 덧없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건네야 할 것은 출신배경의 정보가 아니라 우리를 바꾸어놓는 복음(福音)이다. 출신배경을 뛰어넘는 복음이 시작된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우리의 고정관념을 들어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복음의 인격은 학연 지연에 묶여 있는 인격이 아니라 기도와 사랑을 실천하는 인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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